- 57화
르베르티티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 직전, 문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깨어난 모양이군.”
골디나인이라고 착각했던 적이 있 을 정도로 짙은 피부가 인상적인 남 자, 쿤 황자였다. 금사로 짙은 남빛 옷감의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모습이, 고귀한 핏줄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었다. 비취 귀걸이 이외 에는 신분을 특징지을 만한 물건이 라곤 조금도 걸치지 않고 있었던 부 르크 제국 내에서의 모습과 전연 딴 판이 었다.
이제 제 구역으로 돌아왔다는 거
겠지.
“황자님!”
르베르티티가 아는 체를 하는 것 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그녀가 갑작스레 병합된 국가에 불과한 부 르크 제국에 호의적일 필요가 없다 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예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제3의 국가의 개로 살아왔다니.
“자리를 좀 피해 줬으면 좋겠는 데.”
“네, 황자님.”
르베르티티가 나와 눈을 마주치곤 조용히 물러가고 나자, 황자는 내
앞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태연히 그와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가, 그의 수하에 의해 바닥에 무릎 꼻렸다. 거칠게 무릎이 바닥에 닿는 감각이 기분 더러웠다.
입 밖으로 소리 내서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막상 또 내 처지를 생 각해 보면 기분이 나쁠 일도 아니 다. 납치당한 주제에 목숨이 붙어 있기만 해도 감사해야지. 그런데 왜 이렇게 무릎 꿇는 게 어색하고 짜증 이 날까?
옛날 같았으면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상대가 왕족이라고 해도 벌벌
떨고 내가 먼저 무릎을 꿇었을 텐 데, 하물며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 는 황자인데.
생각 끝에 신세 비관보다는 웃음 이 다 났다.
흑발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광경이 먼저 생각났으니 까. 쓸데없이 사람을 잘 대접하는 황제 때문에 안 좋은 버릇이 든 거 다. 황제에게 베개를 던지고도 목숨 이 붙어 있는 삶에 적응하고 나니 간이 부어 있었든지……오 나도 모르 게 의자에 앉게 되고, 자존심이라는 없던 것도 괜히 챙기게 되고.
평민에 노예였던 주제에.
난 끌려오는 통에도 내 가슴팍에 잘 달려 있는 배지를 슬쩍 내려다보 았다.
그러나 엄연히 내가 가진 신분이 있었고, 나는 그것에 맞는 대접을 받길 원했다. 예전에 나는 내 영리 와 내 동생의 안부만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내가 가진 지위에 대해 생각 하는 법을 배웠다.
“묘하게 여유가 있군.”
“저를 이딴 식으로 대접하면서 죽 이지는 않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 니다.”
황제의 곁에 있던 것을 뻔히 알
고 있는 쿤 황자는, 간이 부은 내 말투에도 크게 놀라지는 않는 눈치 였다.
“이름이, 셀레스티아라고?”
“알면서 굳이 물으시는군요.”
쿤의 옆에 선 기사가 날 죽일 듯 이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기가 죽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 었다.
솔직히 이대로 돌아가지 못할 공 산이 더 크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 다. 부르크의 황제 반이 나를 찾을 리도 없었고, 협상을 할 리도 없었 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설설 기고
싶진 않았다.
쿤이 웃음을 그치자, 나는 의연하 게 턱을 들고 그를 바라봤다.
“실례지만, 황자 저하. 저는 지금 억지로 끌려온 신세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한 제국의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던 몸입니다. 이런 식으로 막 대하시는 것은 테포다 제국의 위상 에도 누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 다.”
“……간이 큰 건지, 부은 건지 모 르겠군.”
“서로 너무 돌려서 말할 필요 없 을 것 같습니다만. 저같이 하잘것없
는 것에게 바라는 게 있으시다면 빨 리 말씀해 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 까.”
쿤은 나의 불쾌한 표정을 보다가 방 안의 기사들을 물렸다.
방 안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쿤의 진한 남 색 눈에 담겨 있는 감정을 굳이 꼽 자면, 묘하게도 호기심이었다. 적의 도, 깔보는 눈빛도 아니었다.
르베르티티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다. 나를 황제의 곁에서 치우는 것만이 목표였다고 생각한다면, 그 냥 날 죽여 버리면 가장 간단한 일 일 텐데- 굳이 날 데려온 이유가 무
엇일까?
그는 뜸 들이지 않고 다리를 비 딱하게 꼰 채로 곧장 이야기를 시작 했다.
“제록스는 내 휘하의 수하다.”
제록스 강사.
지금도 그가 나의 납치에 힘을 보탰다는 것을 생각하면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지요.”
“제록스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 다.”
“저에 대해서요?”
“명석하다고 칭찬을 하도 하기에 그냥 하는 말인가 했는데, 내 정체 까지 맞힐 줄은 솔직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대는 여러 가지로 재밌는 사람이군.”
“……그렇습니까.”
쿤은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듯 내 게 턱짓했고, 나는 무릎 꿇고 있는 게 내키지 않던 터라 냉큼 일어났 다.
음울한 눈을 한 그가 창 쪽을 바 라보며 말을 이었다.
“부르크 제국에만 언데드가 출몰
하는 건 아니다.”
언데 드?
“그래.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 만……오 그래, 이제 와서 숨길 필요 는 없겠지. 부르크의 황태후는 내게 반 황제의 폐위를 돕는다면 내가 후 계자로 지목 받을 수 있도록 공을 세우게 해 주겠노라 약조한 바 있 다.”
“……후계자로 지목 받을 공이라 니.”
“국내의 국경은 지금 엉망진창이 니까.”
그의 말에 따르면, 전에 없이 마
수 굴의 봉인이 무질서하게 해체되 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황제 덕분에 언데드 굴에 대해서라면 꽤 나 연구해 본 적 있는 나는 그 말 을 순간 이해했다.
언데드가 갇혀 있는 굴들이 그렇 게 단단히 봉인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뛰어난 마법사들이 대거 나타났던 세대가 있었다. 약 300년 전쯤의 일이었다. 언데드의 속성상 그들을 모조리 전 멸시키는 것도, 공존하는 것도 불가 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그들은 개미 굴처럼 지하로 깊게 이어진 언데드 굴의 입구를 봉쇄하기에 이르렀고,
그 봉인이 후대에도 계속해서 이어 질 수 있도록 거대한 마법진을 남겼 다.
테포다 제국이나 부르크 제국은 워낙 차지한 국토가 넓다 보니 접하 고 있는 언데드 굴의 수도 많았다. 그것들의 봉인이 깨진다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혼란이 야기될 것이 다.
일반 병사로서는 도검 공격으로는 죽지 않는 언데드가 얼마나 큰 공포 의 존재일까.
그런 마수 굴의 봉인이 해체되고 있다는 말은, 즉…… 봉인의 시효가 다 되어 간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나는 마법을 직접 사용할 수 없는 존재인데, 내게 그런 걸 부 탁해 봤자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납 치하신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니 불렀겠지. 그 저 진의 일부를 수선하기만 하면 된 다.”
수선?
“마법진에 대해서라면 아카데미에 서 공부한 정도입니다. 제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그런 일은 어떻게 했지? 넌 그 누구도 시도해서 성공한 적
없다는 금기의 마법진을 성공시킨 자가 아닌가.”
쿤 황자는 내 팔뚝을 보고 있었 다.
젠장. 이 무효화 마법진이 나보다 인기가 많은 모양이라, 이것 때문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는 인생이라니. 세렉 그놈을 만나면 다음에는 뺨이 라도 한 대 올려붙여 줘야겠다. 그 자식 때문에 새긴 마법진이라는 건 내 의지로 한 일이니까 어찌어찌 넘 어가겠는데, 그 자식이 입을 나불대 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진 않았잖아.
“……이것은 우연의 결과입니다.”
“우연? 아니, 몇 안 되는 조기 졸 업자라고까지 하던데. 절대 우연이 아니겠지. 개인적으로는 탐나는 인 재야. 누구라도 탐내겠지.”
그의 남빛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 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앞에 둔 듯 한 그 눈이 부담스러워 나는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래서 그 진의 보수라는 것을 왜 제가 해야 됩니까? 달리 많은 인재들을 데리고 계실 텐데요.”
“마법진이 있는 곳이 언데드 굴의 안이다. 약화되었다곤 해도 인간이 통과할 정도가 아니야. 아마 통과한
다고 부숴 버린다면 그것도 재앙의 시작이겠지.”
나는 단박에 이해했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진을 짜 넣어야 하는데, 결계를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군요.”
이렇게까지 이상한 논리적 오류도 그리 흔치 않을 거다. 멍청한 이야 기다. 안에서부터 진이 붕괴될 거라 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6황자의 눈에 이채가 지났다.
“역시 이해가 빠르군. 저번부터 느꼈는데, 웬만한 인재가 아니군. 센 스도 있고, 머리도 좋아. 어느 대단
한 가문의 자식인가 했더니, 제록스 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아니라고 하 고……소 볼수록 정체를 알 수 없군.”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 담스러웠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종 류의 눈빛이었다. 나는 말을 돌릴 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자국으로 돌아가서, 혹은 테포다 제국민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흘린다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 할 겁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 술술 알려 주다니, 이건 곧 누구나 알게 될 정도로 사 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뜻인 겁니까?”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남빛 눈동자에 서린 절박함 을 보곤 난 수긍했다. 황자 정도 되 는 이가 직접 나서서 타국의 황궁에 침입해야 할 정도로 급했다는 거니 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덥석 도와 줄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 무례한 이들을 도와주어서 내가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제가 왜 그런 일을 순순히 해 드 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 않으면 어쩔 건가?”
“죽이진 못해도 고문은 할 수 있
다‘?”
“뭐, 그렇게까지 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은 아니야.”
남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라고 부 탁하는 태도치고는 오만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해해 줘야겠지. 원래 로열 블러드라는 것들은 다 저렇게 나고 저렇게 자라는 법이니까.
“기분이 나빠 보이는군.”
“그야…… 저 같은 무지렁이에겐 충성심이라는 것도 없을 거라고 생 각하시는 겁니까? 사람을 납치해 놓 고 기분이 좋길 바라는 쪽이 무리겠
지요.”
“하지만 처우도 잘해 주고 돈도 주면 그만 아닌가? 애초에 부르크 제국 출신도 아니질 않나?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일자리 정돈 옮길 수 있을 텐데?”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이제 동생은 황제가 보호해 주고 있는 게 아니라, 내 돈으로 고용한 사람이 돌봐 주고 있으니 상관없었 다. 그리고 새삼스레 부르크 제국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도 사실 별로 없다.
하지만 개도 제 주인을 알아보는
데, 돈 몇 푼을 더 준다고 해서 받 은 은혜를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 지 않을까.
물론 그냥 은혜라고 하기엔, 처음 엔 계약 관계로 시작했던 것은 맞지 만……, 그래도 말이다. 그래도 사람 관계라는 게……소
분명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집을 부리는 건 그저, 의 리와 정때문이다.
그게 뭐가 나빠.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 저는……,”
쿤은 아마 내가 말하기 전에 이 미 내 표정에서 내 의사를 읽어 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길게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고 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