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리온은 술을 따라 주며 황제의 눈치를 흘끗 봤다. 요즘 들어 종종 볼 수 있었던 느긋해 보이는 표정 같은 것은 어디 갔는지 없었다.
그는 받은 술잔을 한 번에 비우 곤 다시 잔을 내밀었다.
“천천히 좀 마셔.”
“글쎄…… 어차피 맨정신이어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소식이 있을 거야.”
“ 하.”
기가 막힌지 혀를 차는 반의 손 안에서 술잔이 퍽 소리를 내며 깨졌
다. 그의 손바닥이 깨진 술잔에 베 어 피가 흘렀지만 반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바닥에 닿기 직전에 멈춰 선 잔 속 술이 둥둥 떠 있다 가, 때를 놓친 것처럼 뒤늦게 바닥 으로 쏟아졌다.
방 밖에 서 있던 시종은 유리 떨 어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얼굴이 창 백해져서 다가왔지만, 황제는 상처 고 뭐고 됐다고 손을 흔들며 모두를 다시 물렸다.
가뜩이나 요 며칠 사나운 기운을 몰고 다니는 그였다.
“수색의 성과가 이리도 없는데 요
구해 오는 것도 없다니.”
“하고 있지만……『
“그럴듯한 성과는 없다?”
“그 마법사가 어지간한 능력자가 아닌 모양이라…… 그렇다고 하는 군. 너무 초조해하지 말게.”
초조해하지 말라.
그저 부효과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느끼는 초조함일까, 아니면 모처럼 유능한 인재를 얻었다가 잃은 초조함일까.
반은 수하를 잃는 것도 지긋지긋 할 만큼 많이 겪어 봤으면서도 어느 때보다 조급하게 구는 스스로가 우 스웠다.
“그래, 그래야지.”
앞으로 테포다 왕국에 기별을 넣 지 않고 며칠이나 더 참을 수 있을 까. 별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혼자 곱씹으며, 그는 술을 다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방에서 탈출해 보려 애쓰던 나는, 창문에서 다 기어 나가기도 전에 그 들의 손에 붙들려 르베르티티 앞으 로 끌려갔다. 의자에 꽁꽁 묶인 나 는 의자째로 들려 그녀의 앞에 놓였 다.
“깨어났네.”
“……뭐, 그렇지.”
어두운 풍경 속으로 희미하게 마 법 등이 켜진 것이 보였고, 작은 호 롱을 든 사내들이 여럿 무기를 들고 선 것도 보였다. 힘도, 무기도 제대 로 쓸 줄 모르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지?
르베르티티 앞으로 날 데려온 복 면 사내와 그리고, 제록스 강사가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와 똑같 은 유들유들한 태도로 서 있다가 나 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제록스 저 사람은 뭔데 여깄어? 왜 너희한테 협조하지?”
르베르티티가 얼굴을 찌푸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
“ 뭐?”
“그도 간부다.”
“간부도 납시고, 고작 나 하나 데 리고 가자고 수고가 많네. 날 데려 다 뭐 하려고 그래?”
르베르티티는 날 데려온 복면 사 내와 눈빛을 주고받더니, 작게 한숨 을 쉬었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다른 팔을 톡톡 두드리다가 문득 입을 열
었다.
“뭐, 돌려 말할 필요도 없겠지. 부르크 제국의 황제가 부효과가 안 낫는 몸이어야 되거든, 우리 입장에 선.”
“뭐……?”
“그 대단하신 몸을 죽여 보려고 별 시도를 다 했는데, 그 끈질긴 목 숨은 죽지도 않더라 이 말이야. 그 래서 생각해 낸 게 저주거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너도 알겠지만, 저주와 마법에 있어서는 골디나를 따라올 만한 곳 이 없잖아. 황제의 그 부작용, 우리
가 5년을 공들여 만든 거거든.”
난 이 기막힌 이야기에 턱을 떨 어트렸다.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려고 하기까지 했다.
“미친 거 아니야? 그것 때문에 얼마나 폐하가 고생하는지 알아? 대 체 얼마나 처참한 꼴을 하고 오는지 아냐고! 그걸 네가, 아니 너희들이 했다고?!”
르베르티티는 이 상황이 곤란하다 는 듯 잎담배를 한 모금 크게 빨아 들였다가 뱉었다. 볼을 슬쩍 긁은 그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거이거, 단단히 부르크 제국 황제의 개가 됐네. 뭐, 솔직히 최근 에 시종장이 불지 않았으면 황제에 게 저주가 안 들었는 줄 알았을 거 야.”
“뭐라고?”
“무슨 괴물 같은 인내심이냐고. 티를 워낙 안 내고 다녔으니까 몰랐 지, 뭐. 그렇게 진즉에 제대로 저주 가 먹힌 줄 알았으면 보수도 제때 지급받을 수 있었는데.”
“르베르티티!”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녀 옆에 서 있던 조직원 하나가 달려들
어 내 손을 떼어 냈다.
“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나라 여왕께서 나라를 팔아 먹을 줄 내가 알았나. 그냥 다른 나 라 왕 암살해 주면 돈 준다기에 덥 석 받아들였던 거지. 그땐 다른 나 라였다고.”
그건 맞는 말이다. 합병 전에 그 녀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비열 하다는 이유로 비난하기엔 뒷골목에 서 살아간 우리들은 매일이 절박했 다. 돈 많은 나리들의 암살 의뢰 같 은 것은 의외로 흔히 굴러다니는 일 감이 었다.
그녀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네가 거기에 간 게 문제였어. 세 렉 그 새끼 때문에 네가 팔려 가지 만 않았어도, 황제는 이미 쓰러졌을 텐데 말이야.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여서.”
“그래서 이제 와서 날 데리고 나 온 거야?”
“그래, 맞아.”
이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 충은 알겠다.
그렇다면 제록스 강사도, 그 복면 쓴 남자도 르베르티티와 한 팀이라
는 게 된다. 도대체 이 조직, 뭐 하 는 조직이길래 이렇게 규모가 큰 거 지? 그들 모두 범상치 않은 자들이 었다.
난 문득 르베르티티가 날 돌려보 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를 조건으로 내걸지도 않을 생 각인 거다. 이렇게까지 정보를 술술 털어놓는다는 건.
죽이거나, 혹은 가둬두거나. 어느 쪽이든 달갑진 않았다. 가만히 있으 면 죽기 딱 좋겠군. 난 그녀를 설득 하는 게 가장 빠르리란 생각을 했 다.
“의뢰한 사람은?”
내 질문에 르베르티티가 잎담배를 비벼 껐다. 손가락 끝까지 올라온 문신이 눈에 띄었다. 뒤늦게 자책이 들었다. 매주 문신을 지우러 오는 전당포 주인이 어딨다고, 나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했던가. 중요한 보호 마법진이나 중요한 정보를 그때그때 새겨야 하는 정보 길드 사람인 게 틀림없는데.
“말해. 말해 줘.”
“이거 진짜 곤란하네. 대신 말해 주면 다신 돌아가지 마. 우리랑 같 이 일하자. 보수는 톡톡히 쳐 줄게.”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이야기는
편해지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르 베르티티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 과 이것은 별개다.
“그건 안 돼. 돌아가야 해.”
“왜? 왜 그렇게까지 해?!”
“내가 가장 바닥일 때, 날 구해 준 사람이 황제야. 그리고 그 사람 옆에 있을 때 난 내가 가진 능력을 가장 잘 펼칠 수 있어. 보람 있고 즐거워. 날 잘 알아주고 인정해 줘. 알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아카데미 에 가고 싶었는지.”
르베르티티가 내 낯빛을 살피더니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 그러고 보면 낯이 참 밝아 진 건 맞아. 눈빛도 또랑또랑해졌고, 잘 먹고 잘 지내서 뺨도 발그스름해 져서 장밋빛까지 돌고 말이야. 옛날 엔 푸석하던 머릿결도 매끄러워졌고 옷도 고급스러워서 잘 지낸다고 생 각했어. 그래서 이상하다곤 생각했 어.”
이상해?
나는 인상을 그었다.
“고작 그런 거라고 말할 거야? 그런 것 가지고 개처럼 꼬리를 흔든 다고?”
르베르티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주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지. 사실…… 난 고작 얼마 전에야 황제가 부효과 저주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제야 왜 너를 황제가 데리고 있는지 깨달았 거든. 그 전엔 정말로 노예로 팔려 가서 궁에 들어갔나 생각만 했으니 까……-”
요 0 ” 흐-
“내가 황제라면, 널 감옥에 가둬 두고 필요할 때만 부려 먹었을 거라 고 생각해.”
진짜 악랄하다.
나는 그녀를 쏘아봤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치유 능력만이 필요했다면 협 박을 하면 된다. 굳이 돈을 들여 아 카데미에 보내 줄 이유는 뭐란 말인 가. 그 황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 할 줄 안다. 나는 그게 좋았던 거 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르베르 티티도 알겠지.
“그러니까 세렉 같은 개새끼에게 도 기꺼이 메여 있던 너라면, 제대 로 된 주인을 만나면 충성을 다하겠 지. 널 이해해. 배신하라고 설득해 봤자 말을 안 듣겠지. 그러면 우린 널 돌려보내 줄 이유가 없어. 황제 의 상태가 악화돼야 우리로선 이득
이니까.”
난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누가 의뢰인인지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 았다.
“테포다 제국이야, 황태후야?”
스
대답을 흐리는 것으로 대답을 들 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그 둘 다이리라.
난 양옆에 붙어 선 사내들을 밀 치고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내 쪽에 붙어.”
“뭐‘?”
“언제까지 남의 나라 중개 상인을 할 거야? 이제 제국의 국민 소속이 됐으면, 여왕의 폭정에 대항하는 무 리라는 명목도 없어진 거잖아. 제국 의 가장 큰 정보 길드가 될 생각 없어?”
“하지만……/
“내가 도와줄게.”
“네가 그럴 입장이야?”
“난 황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 해. 물론 서로 신뢰 관계를 쌓을 만 한 담보가 있어야겠지만, 적절하게 잘 응해 주기만 한다면 좋아.”
“하지만 이미 우리는 황제에게 저 주를 건……?
“풀어 주면 되잖아.”
르베르티티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런 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잖 아.”
안 된다니 그건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게 진심인지도 알 수 없 다.
“뭐, 그건 차차 해결하면 될 테 고. 우리랑 손잡아.”
“넌 지금, 네가 납치당한 입장이
라는 거 알고 있지?”
“그래.”
“그런데 지금 협상을 하겠다고?”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솔직히 솔깃하다고 생각했잖아?”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은 그녀 가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리 셀레스티아, 자기도 정말 많이 컸어. 못 본 사이에 이렇게 의 젓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정보 길드? 금기에 대한 연구서 를 좀 더 가지고 있다고 해서 뻐기 는 것 같지만, 그래 봤자 골디나 촌 구석에 있던 집단 아냐? 가지고 있
는 정보의 질이 좋아 봤자 얼마나 좋겠어. 너무 자신하지 마. 황궁 아 래로 와. 황태후 말고 현 정권 아래 로.”
“아니. 그만둬. 설득될 것도 아니 고.”
난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부터 는 나도, 풀고 싶지 않은 정보이지 만 어쩔 수 없다.
“있잖아, 너희가 지금 도대체 뭘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고작 정권 교체? 솔직히 말해서 내 입장에선 현 황제가 왕관을 쓰 든, 황태후의 아들이 왕관을 쓰든
알 바 아니잖아? 이득이 되는 쪽을 따를 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토사구팽이 라는 단어 몰라?”
르베르티티는 기분이 썩 좋지 않 은지 입술을 짓씹었다.
난 의자를 들썩여 조금 더 움직 이곤 황제가 항상 하듯, 눈을 가늘 게 뜨고 입매를 비틀었다. 일부러 따라 할 셈은 아니었는데, 여유 있 고 강한 사람인 척하고 싶으니까 나 도 모르게 그를 떠올렸나 보다.
“수도 아카데미를 습격한 집단에 대해서는 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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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황태후가 보낸 사람들이 야.”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저 히 믿기 힘든지 얼굴이 잔뜩 찌푸려 져 있었다.
“뭐라고……?”
“황태후가 보낸 사람들이라고. 틀 림 없어.”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해?”
“골디나인들이 더럽고, 무차별적 으로 제국민들을 공격하고 다닌다. 이게 황태후가 퍼뜨리려는 소문이
야.”
“그렇다면……,”
“맞아. 실제 골디나인들과는 상관 없어. 이제 제국민들은 골디나인들 에 대한 적개심만 커졌겠지. 이러다 가 또 무슨 유혈 사태라도 일어나면 골은 더 깊어지겠지. 유화 정책을 펼치고 있는 현 황제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질 테고.”
“황태후는…… 분란을 일으킬 셈 인 거야?”
“그래. 나라가 더 혼란스럽고 어 지러울수록, 그럴수록 현 황제와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테니까.
그렇게 여론이 조성되기만 하면 현 황제에 대한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 이겠지.”
“세상에……/
“자칫하면 골디나인들이 모두 황 태후가 하는 여론 몰이의 희생양이 돼서 죽거나 노예가 될 판이야. 그 런 일에 협조할 생각이야?”
그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내 말이 진실이라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우둔한 짓인지 알 겠지. 황태후를 돕는다는 게, 즉 골 디나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일이라는 데.
“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의뢰인 을 바꿀 수는 없어. 돈이야 돌려준 다고 하지만, 의뢰인에게 등을 돌린 이력을 가진 길드가 살아남을 수 있 을 것 같아?”
“왜 못 살아남지?”
“누가 그런 박쥐 같은 길드에게 의뢰를 맡기겠어?”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 찮아. 우리가 맡길 테니까.”
르베르티티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