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직접 진입하신다면 인질극으로 번질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평소답지 않게 서두르십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저희가 지켜봐 온 폐하께서는 이 렇게 성급히 행동하여 상황을 악화 시킬 분이 아닙니다. 저희까지 떼어 놓고 가실 생각이라니 위험합니다. 조금 더 상황을 확인하고 다수가 한 번에 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냉정한 머리로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뜯어말릴 상황인가.
그는 황좌에 오른 뒤에 늘 객관 적으로 판단하려 애썼고, 제 지위에 맞게 처세하려 노력했다. 그것을 위 해서라면 마음에 안 드는 간언도 모 두 귀 기울이려고 했다.
디펜더의 말은 타당했다.
“셀레스티아 님께서도 그러길 바 라실 겁니다.”
반은 디펜더의 얼굴을 쏘아보았 다. 원래 저놈이 이렇게까지 대꾸를 잘 하는 놈이 아닌데.
그는 잠깐 대답을 미루고 손에 모아 들었던 마력을 흩어 버렸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전력 마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셀레스티아의 위치뿐이지, 그 녀의 생사나 의식의 존재 여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별 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사라졌다. 더 늦어질수록 생사가 더 위태로워 질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 다. 시종장의 아내가 납치되어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저는 폐하를 믿고 지지합니다. 제가 납치되어도 그리해 주셔야 합 니다.’
‘나를 탓하지 않는군.’
‘어찌 제가 그리하겠습니까.’
‘좋다, 내 기꺼이 그리하마.’
그리하겠다고 말은 했는데.
반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지하로를 쏘아보았다. 덫일지도 모 르고, 덫이 아니라면 디펜더와 제 수하들이 알아서 잘 구해 낼 거다. 제가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지금부 터는 더 큰 위험 요소였다. 어깨 위 에 한둘의 목숨이 있는 게 아니었 다.
때아닌 후회가 머리를 두드렸다.
그 침입자를 보러 간다고 그녀가 말했을 때, 섣부르게 허락해 주는 게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함께 가 자고 말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 녀가 이렇게 쉽게 납치당할 일도 없 었다.
아니, 황실 경비를 우습게 뚫을 수 있는 쿤을 면회하겠다고 불러올 린 황태후가 문제다. 하여간에 그가 손대는 일이라면 다 궁금하고 다 끼 어들고 싶어서 환장한 여자다. 그 여자가 관할하의 죄수에게 관심을 보일 가능성도 염두에 뒀어야 했다.
오늘은 종일 그답지 않은 후회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녀에게 키스했을 때부터.
제 위치도 자각할 줄 모르는 바 보도 아니고. 오늘은 하루 종일 모 든 게 엉망진창이다.
“좋다. 나는 돌아간다. 4지구대 6 길의 두 번째 건물이다. 10분 준다. 습격 준비를 마쳐라.”
“명을 받듭니다.”
디펜더 네 명의 목소리가 하나처 럼 울리고, 그를 지킬 둘을 두고 나 머지 둘은 지령을 전달하러 훌쩍 사 라졌다.
13. 테포다 제국
깨어났을 때는 머리가 온통 지끈 거렸고 눈을 뜨기도 버거웠다. 주먹 을 꽉 쥐어서라도 의식을 차리려 애 를 쓰자, 간신히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창문에 비치는 것은 다른 건물의 지붕 일부와 새까만 하늘이었다. 늦 은 시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 고, 1층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 는 정도.
확실한 것은 여기가 내가 아는
곳이 아니라는 거였다-
여긴 어디고, 도대체 난 여기에 왜 와 있는 걸까.
지끈거리는 머리로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의외스럽고 걱 정이 됐다. 내가 눈엣가시인 거라면 죽여 버리면 그만인 것을, 살려서 납치했다니? 내가 어디 쓸 데라도 있다는 걸까?
골디나인 마법사에게 납치당하던 장면은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얌전 히 놓아주진 않을 거라고 예상했으 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달가운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고 르 베르티티. 그녀가 거기에 잡혀 있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녀는 마치 고문이라도 당한 사람처 럼 드러난 피부에 상처가 새겨져 있 었다. 황궁에 온 뒤로, 제가 편지를 보낸 다음 답장이 오지 않아 내내 걱정했었는데……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졸리니까 생각도 제대로 진행이 되질 않고 뚝뚝 끊겼다. 염려도, 현 상황에 대한 파악도 생각하는 틈틈 이 꾸벅꾸벅 조는 통에 도무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냥 정신을 놓고 누가 데리러 와 주길 기다릴 일이 아니다. 정신 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둘러본 주위에, 나 이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향이 내가 누운 곳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본디 오감 중에서 가장 쉽게 익숙해지고 둔해지는 것이 후 각이라고들 하는데, 오랜 시간 맡았 을 게 틀림없는 향이 이렇게까지 진 하게 느껴지다니. 공기 중에 피워서 쓰는 마취제를 얼마나 진하게 쓴 걸 까.
비척비척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고개를 창밖에 처박았다. 마취제에 얼마나 절어 있었는지, 붉은 머리칼 이 스르르 흘러내려 창밖에 늘어지
는 게 아주 느린 동작처럼 보였다. 그러고 바깥 공기를 맡으며 늘어져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내 정신이 명징해지기 시작했다.
똑바로 걸을 수 있겠다 싶을 정 도로 정신이 든 나는, 방 안에 피워 져 있는 향들을 모두 꺼 버리고 나 머지 창문도 모두 열어 환기를 시켰 다.
그리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천히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낯설 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온통 황토 색과 쨍한 노란색으로 도배되어 있 는 건물들은 난생처음 봤다. 붉은 홁이 많아 그것을 개서 만든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 위주의 부르크 제 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단순 히 색만 다른 것이 아니라, 지붕을 뾰족하게 올려서 폭설에 대비한 부 르크 양식과는 달리, 납작하거나 동 그랗게 올린 지붕들도 특징적이었 다.
실제로 목도한 것은 처음이나 이 런 건물 양식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었다. 분명 삽화로도 본 기억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르크 제국에 이어 대륙의 이인자라고 칭할 수 있 을 라시움 제국의 양식이었으니까.
얼결에 우리의 가장 큰 적대국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내자 심장이 빠 르게 뛰었다. 이야기가 잘못돼도 단 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적국에 와 있다는 것을 알 자, 오히려 더 침착해지는 기분이었 다. 적의 입 속에 들어와 있는 이 상,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목 이 날아가긴 퍽 쉬운 일일 거다. 그 들이 어떤 목적인지는 몰라도 나를 살려서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은 내게서 어떤 이용 가치를 발견했다 는 거겠지.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별자리와 달의 위치를 보았다. 여긴 라시움 제국의 수도 비반이 틀림없었다. 그
리고 달 모양의 일그러짐으로 짐작 건대 내가 납치당한 날로부터 사흘 이 흘러 있었다.
“……미치겠군.”
눈을 떠 보니 적국이라니.
지금까지 날 죽이지 않았다는 것 하나가 유일한 위로였다.
한 번씩 타의에 의해 국경을 이 동하는 인생이라니, 도대체 내 삶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대충 따져 봐도 불가능하다.
황제는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 있을까? 내가 제 발로 달아났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아니, 그라면 그 리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보잘것없고 마법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을 굳이 이렇게 납치하 다니. 뒷골목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자라 온 것치곤, 참 큰 인물이 됐다 고 뿌듯해해야 하나.
막막한 상황에 한숨을 절로 쉬며 문에 바싹 붙어 섰다.
르베르티티는 나를 잘 안다. 그녀 가 얽혀 있다면, 제록스 강사를 비 롯한 무리가 어떻게 나의 능력을 알 아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황제 폐하의 병을 만약
알고 있다면…… 이제 일이 커지겠 지.
수색을 총괄 담당하고 있는 수도 경비대장 밀리가 대표로 나서서 무 릎을 낮추었다.
“……송구합니다.”
황제의 비서, 셀레스티아가 납치 당해 사라진 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그녀의 종적은 그간 어디서도 찾아 낼 수 없었고, 그녀로부터도, 그녀를 납치한 남자로부터도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록스 강사라는
놈도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반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제 부 하들이 “찾아내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일주일째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꼴을 가만히 앉아서 듣다가 픽 웃었다. 분명 처음에는 간단하게 찾 아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는데, 위 치를 확인한 그날엔 분명 그렇게 확 신했는데. 수하들이 일제히 덮친 그 곳엔 이미 쥐새끼 한 마리 남아 있 지 않았다고. 웬만한 놈들이 아니었 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종적을 찾아 낼 수 없다는 보고만 줄줄이 이어지 고 있었다.
반은 아쉬움과 한심함들을 모두 속으로 갈무리하며 관심 없는 얼굴 을 가장했다. 서류에 시선을 둔 그 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됐다. 물러가라.”
“내일은 더 나은 소식을 들려 드 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다음 의제나 떠들어 보 게.”
반의 수하들이 물러나고 나자, 회 의석에는 묘하게 싸한 공기가 돌았 다. 황제는 눈을 내리감고 남은 의 제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태도 를 고수하고 있었다. 황제의 비서가
납치당한 지 일주일인데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니 분위기가 싸늘할 수밖에 없는 거다.
뭘 떠들어 대도 안 들린다는 듯 눈만 감고 있는 그를 보다 못한 황 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봅 니다, 황상께서는. 참으로 피도 차가 운 분이시지.”
반의 감긴 눈이 뜨였다. 그는 황 태후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내가 어때야 하오?”
“애지중지하시는 듯하더니 없어졌 는데도 이리 관심도 없으시니 드리
는 말씀이 아닙니까.”
“참으로 뻔뻔도 하시군.”
이어지는 듯 이어지지 않는 대화 였다.
황제는 그 뒤로도 한참을 따분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회의장을 나섰 다. 의회 건물에서 나오는 그의 뒤 로 리온이 바삐 따라붙었다.
모두가 물러가고 둘만 남자, 리온 은 황제의 앞에 술잔을 가져다 놓고 독주를 따라 주면서 중얼거렸다.
“오늘도 신하들을 쥐어패지 않으 려 노력하신 황제 폐하 만만세.”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곧 돌아오겠지. 기운 내.”
“글쎄.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럴 거면 굳이 납치하지도 않았 을 거라는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래서 그렇게 다급한 티를 안 내는 거고.”
“무능력하게 살아가는 것에도 진 력이 나는군.”
반이 제 손바닥을 빤히 보며 그 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리온은 그가 얼마나 지금까지 노 력해 왔는지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 고 있었다. 역대 황제 중 그 누구보 다도 대단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났 고, 그 누구보다도 백성들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그였다.
그의 단점이랄까, 불운이 있다면 시류를 잘못 타고난 것 하나였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조금쯤 편안해 보이고 짜증이 줄었던 것은 모두 옆 에 붙어 있던 비서 때문이었다. 나 라 하나가 통째로 굽히고 들어와 합 병이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어도 좀처럼 낯을 펴지 않는 그에게 마음
의 위로가 생긴 것 같아 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노
하필 그 여자가 사라지다니……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