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내가 입을 제대로 다물지도 못하 자, 르베르티티는 내게 다가와 가만 히 나를 안아 주었다. 나를 납치한 장본인치고는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 다.
나는 그녀를 더 다그치려다가 그 녀의 품에 안겨서 말을 잃었다. 새 삼 르베르티티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녀는 몸을 맞댄 채로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해 왔다.
“내가 수장인 게 대수야? 그리고 너만 해도 보라고, 지금 뭐가 돼 있 는지. 겨우 자리 잡고 데려오려고
했더니 네가 황제 비서가 돼 있다고 해서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아?”
내가 황제 비서가 된 거랑 르베 르티티가 길드 수장이 된 거랑 같냐 고. 어이가 없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해. 어 떻게 하다가 이렇게까지 됐는지
한참 만에 팔을 푼 그녀가 내 볼 을 손으로 감싸며 말문을 뗐다.
“정말 나를 전당포 주인으로 생각 한 건 너밖에 없었을걸. 하긴 우린 널 소중하게 생각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험한 곳에서도 바르게 살 아가려고 애썼잖아. 부모 얼굴도 모 르는 주제에, 쓸데없이 발라서는. 그 래서 넌 우리 부길드장이 예뻐했다 고.”
“부길드장이 누군지도 몰라, 나 느 ”
“왜 몰라, 네가 소매치기 길드 앞 을 지나갈 때마다 앉아 있던 그 할 아범 있잖아.”
“그 책방 할아범?”
“그래.”
이게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 겠다. 어이가 없어서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자, 르베르티티는 뭐가 그 렇게 웃긴지 입을 가려 가며 웃었 다.
“이렇게 순진해서 내가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렇게 순 진하진 않았어.”
“세렉 때문에 네가 그렇게 되고,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어. 수소문해 도 어디 갔는지 알 수도 없고. 게다 가 사미디온도 어느 날 훌쩍 사라지 고.”
우울한 투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니 죄책감이 들었다.
“좀 늦긴 했지만, 그래도 자리 잡 고 바로 연락했잖아!”
그녀가 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 보았다.
“그래, 제국의 황제에게 팔려 갔 다며. 내가 그걸 보고 나서부터는 더 걱정했어.”
“아니, 잘 지낸다고 연락한 건데 왜!”
“제국의 황제가 어떤 놈인지, 넌 잘 모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놈, 굉장한 미치광이라고.”
“미치광이?”
“합병국에 최근 은밀히 도는 소문 에 의하면, 그 황제가 은밀히 세력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나 봐.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황실을 향한 불만을 모두 합병국으로 돌린다는 거야.”
그런 일을 한다고?
난 들은 적도 없다.
“차별이 가속화되고, 합병국 국민 들은 이제 곧 노예로 팔려 나갈 거 라고 하더군. 심하게는 피와 내장을 뽑아다 인체 실험까지 한다고. 마법 실험이라나 뭐라나.”
이 대사, 최근에 한 번 더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복면 사내가 지껄였던 어이없는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르베르티티를 쏘아보았다.
“그딴 헛소문을 믿어?”
“헛소문이라고? 이거 봐! 네가 그 렇게 세뇌가 단단히 돼 있을 줄 알 았어.”
“ 뭐?”
“난 이래 봬도 정보 길드의 두목 이야.”
“난 황제와 매일 같이 일한다니 까?”
르베르티티는 내 말이 뭐가 그렇 게 답답한지 제 긴 녹색 머리를 왕 창 헝클어 놓더니 가슴까지 팍팍 두 드려 댔다. 그러곤 빽 고함을 질렀 다.
“넌 세렉이랑도 매일 같이 지냈잖 아! 그러는 동안 네가 뭘 제대로 알 아내기나 했어? 내가 아무리 걔가 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해도 순진한 얼굴로 헤헤 웃으면서 그럴 리가 없 다는 소리나 해 댔잖아. 안 그래?”
난 누가 입을 틀어막은 것도 아 닌데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
긴 하다. 내가 좀 멍청하고 눈치가 없었지. 감정에 눈이 멀어 있었지. 그렇다곤 하지만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게 어딨어.
내가 어이가 없고 말문이 막혀서 입을 꾹 다물자, 르베르티티는 기세 가 등등해졌다.
“어서 황제 곁에서 탈출해. 황태 후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황제가 무슨 부효과 방지 알약의 효 과를 못 본다나? 그런 이야기가 있 던데. 그 자식이 네 능력을 알기라 도 했다간, 그땐 놓아주지도 않을 걸?”
“내가 원해서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잖아. 사미디온 때 문에 또 억지로 꾸역꾸역 참고 일하 고 있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무튼 황제는 이제 패망할 테니 까 우리가 널 구해 내는 데 동의한 거야. 테포다의 황자님께서도 마침 네가 도와줄 만한 일이 있다고 해주 셔서 일이 잘 풀렸어.”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그 ‘도와줄 일’이라는 게 대체 뭔 줄 알고?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지만 르베르티티도 무장 저항 단체 중 하
나를 이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황태후와 테포다 제국에게 이용당하고 있겠지.
날 구해 낸 게 아니다.
아직 명확한 목적은 모르겠지만, 쿤은 어떤 이유로든 나를 빼내 오려 고 했고, 그게 르베르티티의 목적과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렇게까지 확고하게 황제파가 뭔 가를 잘못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내가 여기에서 설득해 봤자 먹혀들 리도 없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적당히 협조해 주는 척하고
정보를 좀 더 캐내 보는 수밖에.
어차피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고, 이야기를 나눠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좀 더 들어 봐야 알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차피 들어 봐야 할걸.”
돌려보낼 생각 같은 건 없구나.
난 그녀가 아무리 좋게좋게 말하 고 있다 해도, 그녀의 주위에 있는 부하들이 장식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나를 구해 내려고 했 다는 것도 그저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 든 싫든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일 이다.
“날 눈에 거슬려 하는 귀족 나리 들이 날 없애 달라고 사주라도 했 어‘?”
르베르티티는 쓰게 웃더니 주위에 선 사람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들은 내가 큰 고함을 지르지 못하도록 입 을 틀어막더니 양옆에서 팔짱을 꼈 다.
“일단 좀 재워. 진정하라고.”
“난 진정했어.”
“하지만 먼 길을 가야 할 테니까,
셀레스티아.”
그녀의 난처한 듯한 표정이 내가 본 마지막이었다. 손수건이 내 입과 코를 틀어막았고, 그것의 냄새를 맡 지 않으려 애쓰는 사이에 의식은 까 마득히 멀어져 버렸다.
알림 마법을 걸어 둔 것은 셀레 스티아의 방이었지, 그 본인이 아니 었다.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없는 게 한이 었다.
경비병이 설명한 대로 정문 첨탑 방향을 향해 날아가 다시 근처를 살
폈다.
“흩어져서 수색합니다.”
반이 멈춰 서자, 디펜더의 넷은 각기 반에게 가볍게 부복하곤 장대 하게 높은 성벽 위에서 그대로 뛰어 내렸다. 반은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등을 눈으로 좇았다.
마음이 조급해서 판단력이 흐려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좋지 않은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 자들은 셀레스티아가 마법을 무력화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집단이다. 모르는 자들이 데려갔다 면 차라리 죽음을 걱정했겠지만, 이 집단은 의도를 알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이용할 생각으로 그녀를 찾은 거지?
그때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 은 디펜더 하나가 허공을 밟으며 달 려와 반에게 보고했다.
“3시 방향 4지구대 안에서 기척 을 감지했습니다.”
“4지구대.”
“더 좁은 반경을 특정할 수 있으 면 좋겠습니다만, 그분께서는 마법
에 감지되지 않으셔서.”
“ 알겠다.”
마법에 감지되지 않는다.
그 속성을 바탕으로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반은 훌쩍 몸을 띄워 4지구대 앞 으로 날아갔다.
“……설마 전수 조사할 생각은 아 니시겠죠?”
디펜더 소속의 마법사가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은 잘 없는 데. 어지간히 위험해 보였나.
“반은 이자를 다시 찾지 않고서
는,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다 시 찾아야겠다.”
“주군의 뜻이 그러시다면……?
디펜더들은 여느 때처럼 그의 안 위를 가장 첫째로 하며 주변으로 자 취를 감추었다.
새벽 3시를 넘은 시간. 허공에 떠 다니는 가로등 불빛을 빼면, 거의 모든 집 불이 꺼져 있는 시간이었 다. 옹기종기 모인 집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반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 셨다.
4지구대는 꽤 거대한 공간이었지
만,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다. 그의 나라의 수도니까.
머릿속으로 그 공간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떠올렸다. 그리고 아주 가 벼운 전력 계열의 마법을 그 범위 전체에 깔았다. 케이크 위에 생크림 을 바르듯 천천히 깔아 나가는 동 안, 그 안에 불순물처럼 느껴지는 게 있는지를 살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알게 되겠지.
이건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디 펜더가 말렸을 정도니 말을 다 한 셈이지. 예상대로 지나치게 넓은 범 주에다 대고 마구잡이식 수색을 하
는 바람에 빠르게 과부하가 걸렸다. 심장이 꽉 죄어 오는 듯한 느낌은 이제 익숙할 지경이었고, 반이 쓰는 마법의 문양에 따라 등에 새로운 문 양이 새겨지는 것도 그리 낯설지 않 았다.
이 등을 셀레스티아가 보면 또 울상이겠는데.
반은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 서도 최대한 정밀하게 수색하려고 애썼다. 1층만 평면적으로 뒤지는 게 아니라, 지하와 마구간, 천장, 혹 은 2층, 3층까지 모두 확인하고 넘 어가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왼팔이 부들부들 떨려 올 때쯤, 반은 묘하게 기분 나쁜 감촉이 가상 의 마법적 손에 스치는 것을 느꼈 다.
4지구대의 분수 아래, 중앙 지하 수도.
반은 다시 한번 더듬듯 전력으로 만든 망으로 그 지역을 더듬었다.
틀림없다. 셀레스티아다.
반은 셀레스티아가 있는 위치를 특정하는 내내도 조바심이 너무 나
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사실 이런 일에 황제의 위치에 있는 그가 직접 나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 떻게든 데리고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조급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던가?
4지구대의 지하 수로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심장이 죄는 느낌 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 은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이동 하고 있었고, 전체 인원은 꽤 많았 다.
지하 수로의 구조라면 설계도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이 걸어 다니기 에 좋을 만한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 어 있긴 하지만, 정상적인 시민이 거길 기어들어 가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음침한 장소였다. 일단 임시 은닉처로 사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 었다.
게이트가 없는 곳 사이에서 순간 이동을 하는 것은 지형지물을 파악 하기 힘들어 잘 하지 않는다. 아니, 잘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방금까지 4지구대의 모든 지형지물 및 살아 있는 생물들의 위
치를 눈으로 보듯 훑어내린 반은 그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먼저 간다. 쫓아와라.”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그는 튀어 나가려다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디펜더의 두 번째 간섭이었다. 요즘 셀레스티아가 대 드는 것을 내내 본 뒤로 이자들 역 시 좀 더 말이 는 것 같았다. 반은 의외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