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53화 (53/103)

- 53화

“그것을 내놓으면, 저는 죽겠더군 요.”

황태후가 혀를 찼다.

“놀리시는 것도 아니고 누가 들으 면 오해합니다, 황상.”

“오해요? 어린 나이에 황태자의 지위에 오른 뒤로, 무슨 일이 있었 는지 황태후께서 가장 잘 아시질 않 습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짙어지는 적의 에 황태후는 대꾸할 생각도 잊고 그 를 쏘아보았다. 황제는 그녀가 부정 하지 않는 것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 다.

“자고 일어나면 절 아끼던 할멈인 최고 사법관은 부모님을 돌보러 타 국에 갔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부모 는 제국 사람인데도 말이오. 또 자 고 일어나면 저와 함께 수학했던 해 군 장관은 오지로 발령이 났다고 하 더군요. 살아 있으면 연락이라도 닿 아야 할 텐데, 그것도 안 되더군. 죽이질 않았소?”

황태후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 고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저를 겁박하시는 겁니까, 황상! 말도 안 되는 억지 누명을 씌우실 셈입니까?”

“그래도 요즘은 저만 건드리시기 에 그냥 두었습니다.”

“무슨……-”

황제가 또 손가락을 놀리자, 나머 지 찻잔 조각들도 모두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져 내렸다.

“그런데 제 사람에게 또 손을 대 셨더군. 그것도 매일 내 옆을 지키 는 사람을.”

“제가 그러지 않았다고 말씀드리 지 않았습니까!”

“선을 모르시는 것 같으니 내 직 접 그어 드리지. 제게 독약을 먹이 는 것은 뭐, 성공하면 제가 없어지

니 보복은 안 당하실 테지만, 제 사 람을 건드리면 좋게 죽지는 못하실 겁니다.”

“황태후는 내 비서가 무사하길 바 라야 할 거요. 무사히 발견되길. 난 이제 내 사람을 더 이상 잃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만큼 힘이 없지 도 않고, 세가 없지도 않고, 인내심 이 많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그가 다시 찻잔 받침을 톡톡 두 번 두들겼을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찻잔이 원래의 모양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황태후 가 그것을 보고 놀라 쥐고 있던 손 잡이를 떨어트리자, 그것마저도 찻

잔으로 그대로 가서 달라붙었다.

황제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 다.

“저 찻잔에 일어난 일이, 그대의 머리통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함께 기도드려 봅시다. 자비로운 우리의 신에게 말이오.”

“황상!”

황태후의 궁에서 빠져나온 반은 그대로 의회 건물로 향했다. 오늘 종일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에 대 해 논의하던 치들은 아직도 의회 건

물에 그대로 남아 열띤 토의를 하고 있었다.

황제의 입장을 알리느라 시종이 소리 높여 고함을 치자, 장내에 일 순 정적이 감돌았다.

반은 황좌에 앉지도 않고 선 채 로 소리 높여 고했다.

“지금 지하 감옥에 가둔 범죄자가 탈옥했다고 하는데, 그가 내 비서를 납치해 갔소. 군대를 사용할 것은 아니지만, 병력을 사용하려면 그대 들에게 통보하는 게 수순이니 말하

는 거요.”

황태후 측에서 나선 사내 하나가

흉흉한 황제의 기세에 눈치를 살피 며 조심스레 손을 들고 물었다.

“납치라니요. 무엇을 요구해 왔습 니까?”

“아직 아무것도 요구해 온 것은 없다.”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모두 놀 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요 구하는 것이 없는 납치범이라니, 그 렇게 수상한 얘기도 없다.

“이상하게 느껴질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그렇다면……?

“다 죽여 버리든 어떻게 하든 상

관없겠지. 더 이상 의견을 들을 생 각은 없다. 이만 해산하지.”

살기등등한 표정에 황태후 측 귀 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로 조용해지진 않겠지만, 워 낙 민감한 사안이었다.

리온 공작은 그들을 쭉 둘러보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황제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저 황제는 국정 을 지겨워해 온 만큼, 오히려 더 객 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해 올 수 있었다.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황제파의 귀족들이 셀레스티아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를 이

제 그도 슬슬 알 것 같았다. 노예 출신의 존재가 비서가 되었다는 것 자체도 달갑지 않을 수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데, 황비 자리는 비어 있다.

황비의 예정자로 되어 있는 비키 와 혼인하여 황태후 쪽 세력을 어느 정도 빼앗아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고, 옆 제국의 공주와 혼인하 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대로 된 안주인이 있어서 질서 가 잡힌 뒤라면 누구의 시선도 크게 상관없겠지. 하지만 제대로 된 황궁

의 안주인이 들어오기도 전에 황제 의 크게 기운 태도는 오해를 산다.

그는 둘 사이를 응원할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비로 들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 니었다.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 으니까. 황비의 재목이라고도 생각 했지만, 신분의 벽이 너무 컸다.

그 자리는 전략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자리이며, 무엇보다 멀리까지 내 다볼 수 있는 해안을 가진 여자가 와야 한다. 그런 여자라면 이렇게까 지 귀애하는 여자가 있는데 황비의 자리에 오고 싶을 리 없다.

리온 공작은 황제의 빈자리를 보

며 황비를 빨리 들이도록 건의해야 겠다는 생각을 혼자 곱씹었다. 섣부 른 짐작으로 하는 기우일지도 모르 겠으나, 전에 없이 초조해 보이는 황제를 보고 기묘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애초에 황궁의 내 방까지 침입해 들어올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를 혼자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었 다. 아니, 황태후가 살펴보고 있다고 했을 때 보러 가지 말았어야 했다. 황태후는 그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 는지 전혀 모르는 게 틀림없으니까.

황제가 제대로 구속하여 지하 감 옥에 보내 둔 자에게 황태후는 뭐 그리 물어볼 게 많았는지 그를 제게 불러올리라 명한 모양이었다. 아랫 사람들이야 황태후의 지시를 거역하 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의 말대로 해도 별 탈 없겠다 여겼겠 지.

하지만 특별 장치가 되어 있는 지하 감옥을 나온 쿤은 구속력을 잃 은 거나 다름없었다. 일부러 놓아주 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나 양 팔과 다리에 구속구를 매단 채로 나 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눈에서 먹 잇감을 발견한 짐승 같은 안도감을

보았다.

도망칠 새도 없었다. 다음 순간, 나는 그의 손에 들려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무리 버둥거려 봐도 소용 없었다.

“절 데려다가 뭐 하시게요!”

“그건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되겠 지. 그걸 알려 주고 말고 하는 것까 지는 내 일이 아니니까.”

대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백 히 밝힌 그 때문에 우리는 침묵 속 에서 수도의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어둑한 골목으로 내려섰고, 짐짝처럼 들려

있던 나는 바닥에 간신히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화륵, 홰에 불붙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순식간에 주위가 밝아졌다. 아무도 없는 공터라고 생각했던 곳 에는 주위를 에워싸고 많은 사람들 이 서 있었다. 횃불에 비친 무표정 한 면면들은 모두 제국 출신의 사람 들이 아니었다.

쿤과 단둘이 있을 때도 이미 일 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 제 정말로 큰일이라도 나겠구나 싶 은 마음이 들었다.

바짝 긴장해서 굳어 서 있는데 복면 사내가 그들 중 가장 뒤에 서

있는 백색 두건을 쓴 여자 앞까지 내 멱살을 쥐고 질질 끌듯이 데리고 다가가 나를 던지듯이 밀쳤다.

“데려왔다.”

나는 헛발을 디디다가 겨우 중심 을 잡았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짐짝으로 취급 하다니.

흰 두건을 쓴 여자가 나를 빤히 살폈다. 그녀의 등 뒤에 선 사내들 의 손에 있는 횃불 때문에 나는 그 녀의 얼굴이 그림자 지게 보여 잘 살필 수가 없었다.

누구지……?

두건 사이로 보이는 가는 입술이 웃음을 머금은 듯 보였다.

“확인했습니다. 틀림없군요. 수고 하셨습니 다.”

“예정대로 목숨을 붙여 데려왔다. 본국으로의 이송은 부탁하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쿤은 그 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쩍 자리 에서 사라졌다.

타닥, 타닥.

횃불이 기름을 잔뜩 먹인 천을 태우는 소리, 붉은 불꽃이 일렁이며 어두운 골목을 어지럽게 수놓는 모 습 같은 사소한 것들이 오감을 간지

럽힐 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 다.

나는 흉흉한 칼날을 든 자들을 똑바로 쏘아봤다. 황제에게 인정받 아 그의 비서로 일한 지 고작 2주 가 된 참이다. 내가 그간 얼마나 많 은 고생을 하고, 더럽고 치사하게 사람을 신분 가지고 차별하는 자들 의 흰 눈을 견뎌 가면서 일했는데. 이런 식으로 납치당해서 그 일을 끝 낼 수는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입술을 깨문 나는 최대한 의연하 게 들리길 바라며 말을 꺼냈다.

“이렇게 사람을 무례하게 초청했 으면 무슨 말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눈앞의 흰 후드를 쓴 여자가 그 말에 입술을 당겨 웃었다.

“많이 컸구나.”

뭐지? 이 목소리는. 분명 들은 기 억이 있었다. 게다가 하얀 후드와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 지만, 어쩐지 친숙한 기척이 느껴졌 다. 나는 그녀의 체형과 후드 사이 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그리고 손등 을 덮고 있는 옷 사이로 보이는 문 신을 살폈다.

잘 손질된 긴 손톱, 손등까지 뒤 덮는 기하학적 도형의 문신, 그리고

녹색 머리카락.

“르베르티티……?”

말하면서도 스스로 믿기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내 말에 모자와 함께 후드를 벗으며 환히 웃어 보이는 이 는 정말로 르베르티티가 맞았다. 곱 슬거리는 녹색 머리칼 사이로 해맑 게 웃는 그 얼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셀레스티아.”

샐쭉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데, 반 가움보다 황당함이 더 먼저였다. 난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골디나에 있 어야 할 그녀가 날 납치하라고 사주

한 사람이라니.

“아니, 여긴 대체 어떻게……오 아 니, 그보다도 나를 불러낸…… 납치 하라고 시킨 사람이 너야? 아니지?”

“일단 지하로 내려가서 얘기하자. 여긴 너무 눈에 띄니까.”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보니, 그녀가 떳떳하거나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겠다.

나는 그녀 옆에서 천천히 걸음을 떼며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누가 봐도 흉흉하기 짝이 없는 무리 였다. 도대체 이들과 뭘 하고 있는 거지, 르베르티티는?

그들은 쩌렁쩌렁 고함을 질러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지 하 수로에 도착해서야 나를 놓아주 었다.

르베르티티는 팔짱을 끼며 작게 웃었다.

“그리웠다는 인사는 안 해 주는 거야? 이렇게 열심히 찾았는데.”

“반가워. 반가운데…… 상황 정리 좀 해 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 말로 모르겠거든.”

“간단해. 골디나의

길드 ‘몰리’를

내가 꿰찼어. 전임 수장이던 또라이 새끼를 최근에 간신히 죽였거든.”

길드 몰리를? 그것은 내가 지내 던 뒷골목을 주름잡는 소매치기 길 드와 그리고 꽤 커다란 정보 길드를 통합해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런 거 대한 단체의 우두머리가 됐다고? 대 체 어떻게……?

“하지만 넌 그냥 전당포 하는 거 아니었어?”

르베르티티가 내게 턱짓했다.

“자기는 아직도 순진하네. 그렇게 쉬운 동네에서 자라진 않았잖아.”

문신을 지워도 지워도 계속 새기 길래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 고 보니 이제 와서 생각하니 계속해

서 다른 인물로 변장을 해야 하는, 수사하기 쉬운 특징을 지니면 안 되 는 범죄자나 하는 짓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도적 소굴의 수장이 되었다니.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