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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52화 (52/103)

- 52화

솔직히 말해 이렇게 고통 없이 명징한 정신으로 지낸 건 아주 오랜 만이다. 그야, 황태자로 임명되기 전 부터 반은 그런 체질이었고, 누적된 부효과들은 오랜 시간 방치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식으로도 낫지 않았으 니까. 난다 긴다 하는 마법사들을 불러다 연구시켜 보기도 했지만 아 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셀레스티아에게 반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 거 다. 그도 모르게 어떤 반응을 했다 고 해도, 반이 대체 왜 그랬는지 알 아내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겠지.

그러니까 확신할 수 없는 거다. 다음에도 그러지 않을 거라고.

멍한 생각의 끝에, 시종이 부르러 간 지가 대체 언젠데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몸을 일으켜 설렁줄을 당기자, 당 황한 얼굴의 시종이 헐레벌떡 들어 왔다.

안 좋은 예감에 절로 미간이 찌 푸려졌다. 그의 아래에서 오래 일한 저치는 침착한 성정으로, 저렇게 쉽 게 낯빛이 안 좋아지는 이가 아니었 다.

“무슨 일이지?”

“ 폐하.”

“그래. 무슨 일이냐.”

“저…… 셀레스티아 님께서……

저렇게 주저하며 꺼내는 말이란, 대체로 좋은 내용은 아니기 마련이 다. 반이 인상을 더 팍 찌푸리자, 그는 주저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꺼 냈다.

“그러니까…… 어디 계신지 안 보 입니다.”

안 보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방에도 안 계시고, 어디 계신지

봤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혹…… 짐 작 가시는 곳은 없으십니까?”

아니, 도대체 이렇게 야심한 시간 에 어디 갈 데가 있다고 반이 짐작 가는 곳이 있겠는가.

이 황궁 내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등골이 오싹 하게 울리는 감각이 있었다. 황궁에 서 누군가 마법을 쓴 거다.

문득 낮에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떠올랐다.

‘폐하, 제가 한번 직접 범인과 이

야기를 나누어도 괜찮겠습니까?’

셀레스티아가 반에게 물었었다, 분명. 어차피 오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반은 그 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설마,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는 것을 알면서도 반은 떠오른 생각 을 애써 부정하며 방문을 박차고 나 섰다.

피곤한 기색으로 복도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반이 다시 지나가 는 것에 바짝 긴장해서 몸을 곧추세

우는 게 보였다.

반은 그중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지하 감옥에 오늘 가둔 죄수는 어떻게 됐지? 테포다 제국의 황자 말이다.”

“황태후 마마님께서 불러 가셨습 니다만, 그 뒤로는……,”

“불러 갔다고?”

“ 네.”

지하 감옥에 간신히 가둬 놨더니, 불러냈다고? 아니, 마법사가 어디 재갈만 물리고 구속구만 채우면 그 렇게 쉽게 모든 능력이 봉인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마법 잘 쓰는 미치광이를 황 궁 안에 풀어 놓은 셈이 아닌가.

머리가 아찔했다.

경비병들에게 수색을 명하고, 반 은 성큼성큼 걸어 황태후의 방 쪽으 로 향했다. 채 다 도착하기도 전에 경비병 중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부복하더니 외쳤다.

“셀레스티아 님을 복면 쓴 남자가 안고 날아가는 것을 봤다는 시녀의 증언이 있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셀레스티아 님을 복면 쓴 남자

같은 말을 한 번 더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반은 짜증으로 머 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 방향은?”

그래도 그 경비병은 아주 무능한 것은 아닌지, 시녀가 설명했던 방향 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설명해 주었다. 황궁 안에 하늘을 날아가는 마법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그는 제가 설명하면서도 그 증언이 미심쩍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반은 이미 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본 적이 있었다.

그는 황제인 그 앞에서도 제가 잡히 리라곤 생각지 않았다는 눈치였다. 단독으로 남의 나라에 기어들어 와 있을 리는 없을 테니, 협조자와 합 류하고 난 뒤라면 찾아내기가 더 어 려워지겠지. 순순히 잡힐 때 속셈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황태후가 이렇게 일찍 손을 쓸 줄은 몰랐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미친 짓을 하는군 싶어 절로 짜증이 났다.

“디펜더.”

항상 곁에 머물며 그의 소환에 응하는 마법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 냈다. 차례로 무릎을 꿇는 검은 망 토의 여자 둘과 남자 둘은 마치 유

령처럼 형상의 뒤로 배경이 비쳐 보 였다.

“쫓아라.”

반의 말에 넷의 모습이 즉각 흐 려지더니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 다. 그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황 태후가 기거하고 있는 별궁으로 향 했다.

황태후는 자고 있던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잠자리에 들었던 모양 으로 자기 편한 가벼운 옷에 가운을 두르고 나타났다.

그녀는 별궁의 응접실 자리를 반 에게 권했으나, 황제는 앉을 생각은 않고 그녀를 쏘아보기만 했다. 황태 후는 저만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황 제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례하게 방 문하셔서 말씀도 없으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몇 신지는 아시는 겁니까?”

황제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 방문 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한 그녀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재밌으십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하 감옥에 있던 이를 불러다 부러 놓아주셨습니까?”

황태후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돌아볼 만한 교태로운 미소를 지 으며 다리를 꼬았다.

“부러 놓아주다니, 남이 들으면 오해할 법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 하.”

“제가 불러올린 것은 맞습니다만, 그저 격에 맞게 대우해야 하는 타국 황자님이라기에 좀 더 나은 대접을 해 두려고 한 것뿐입니다. 황제 폐 하께서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을 제가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셨습니까?”

“시종장의 아내 랑그샤가 잡혀 있 다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랑그 샤를 잡아 둔 무리와 같은 자들인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묻지 않으면, 황 상께서는 절대로 물어 주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이미 내친 자의 부인 이니.”

“시종장을 퍽 알뜰살뜰하게 챙기 십니다.”

“그러는 황상께서도 비서를 그리 알뜰살뜰 챙기질 않으십니까.”

반은 고함을 지르지 않으려 애쓰

며 쏘아붙였다.

“죄인을 처박아 두겠다고 제가 결 정했으면 그냥 그리 아셨어야지요.”

“그러나 아카데미에서 그 난리가 나고 나서 들어온 분이니, 이야기도 좀 들어 두고 싶었고요.”

“죄수와 담소 나누는 것을 평소에 도 즐기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저 사건 이 일어나기 전부터 황상과 함께 있 었다는 것을 듣고 보니 별로 위험한 자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황상 께서 마치 민심을 얻으려고 짜고 친 범죄같이 들리질 않습니까? 그래서

정황을 알고 싶었지요.”

웃기고 있네.

반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폈 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손에서 삐 져나오려는 화공 계열 마법을 다시 잘 갈무리했다. 아주 어릴 때를 빼 면 감정의 기복 때문에 옷을 태워 먹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 를 상대하고 있자니 이성을 유지하 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똑똑한 척하려 들면, 제 손에 있는 패를 보여 주게 되기 마련이다.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실례지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함께 있 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습니 다만.”

언제까지고 잘만 떠들 기세였던 황태후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본인에게 들으셨습니까? 짧은 사 이에 퍽 친해지신 것 같은데…… 혹 그 이전에도 연락한 적이 있으십니 까‘?”

“황상, 무슨 말씀을 그렇게……-”

“쿤이라는 자가 이미 다 말했습니 다.”

황태후의 낯이 조금 질렸지만, 그 녀의 의연한 태도는 무너지지 않았 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테포다의 황자가 무어라 모함했는지는 모르 나……-”

“모르신다? 그러시다면 알게 해 드리겠습니다. 지루하실 터이나 조 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영 마 법이든 뭐든, 황태후가 포섭한 범인 들에게 자백하게 하는 것은 가능할

터. 이 일을 계기로 황태후의 실각 을 노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이 것 또한 기회라고 여길 수 있을 텐 데.

그는 묘하게 진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다그쳤다.

“그래서, 어딨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방금 황태후께서 부러 놓아주신 중죄인 쿤이 납치한 제 비서 말이 오.”

“제가 알 게 뭡니까? 전 모르는 일이라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 무례하게 굴지 말고 이만 물 러 가십시오.”

“앞뒤 정황이 이렇게까지 명백한 데 발뺌하시겠단 말인가?”

황태후가 더 이상 이야기할 의사 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시녀 가 달려와 커다란 쟁반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그녀는 따뜻하게 데워진 차가 든 주전자를 티 코지에서 꺼내 꽃무늬가 가득한 다기에 따랐다. 반 은 그녀의 그 손짓을 쏘아보다가 손 을 탁 퉁겼다.

파삭.

찻잔이, 그려진 꽃문양대로 깨져

나갔다. 찻잔을 들어 올리던 황태후 의 손안에는 손잡이만 남았고, 찻잔 받침 위에는 찻잔 모양으로 반구 형 태의 찻물이 둥둥 떠 있다가 뒤늦게 천천히 흘러내려 찻주전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황태후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찻 잔 위에 올려져 있는 예쁜 컵 조각 들을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반은 그녀가 했듯이 맞은편 자리에 다리 를 꼬고 앉아 손을 깍지 끼곤 느긋 하게 대꾸했다.

“왜 그러십니까?”

“황궁에서 마법을 쓰다니…… 아 니, 이렇게 무력으로 저를 겁박하는 게 황제 되신 도리로 하실 일입니 까!”

황제가 그것참 이상한 일이라는 듯 눈썹을 밀어 올렸다.

“저런, 조심하지 그러셨습니까. 손 아귀 힘이 보기보다 세신 모양입니 다.”

“황상!”

“그걸 내가 했단 말입니까?”

“그럼 누가 했겠습니까!”

“제가 알 게 뭡니까? 전 모르는

일입니다.”

반의 귀찮다는 듯한 대꾸에 황태 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말하 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녀가 하지 않았다고 발뺌한다고 해서 물 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반도 그녀가 그 정도로 술술 불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는지 테이블 위 깨진 찻잔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 다.

“그거 아십니까? 황태후.”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이 자리를 계속해서 지키는 것은, 황태후께서 이리 구신 탓이

아주 크다는 것 말입니다.”

“하! 어이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처음엔 솔직히 이깟 황좌, 그리 갖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황태후께 서는 판단을 잘못하신 겁니다. 처음 부터 저를 그냥 두셨다면,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 뻔하다고 해도 이깟 황좌며 황제의 관 따위 내어 드렸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황제가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태후는 제가 그리도 갖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필요 없다는 듯 말 하는 황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 필요 없으시면 내어 주지 그러셨습니까?”

황제가 깨진 찻잔 조각 중 하나 를 손으로 톡 건드렸다. 그것은 원 래 설탕 뭉치였던 것처럼 파사삭 흩 어져 가루가 되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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