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기사는 내 머리 색이 마음에 걸 린다는 듯 한 번 더 흘끗 보았다. 골디나인임이 명백한 머리 색 때문 이겠지.
“언제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 도 좋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뽑은 사람을 함부로 말하라는 뜻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이 와중에 황제의 말에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이는 기사를 보니 어 이가 없었다. 외척이 그토록 억압하 고 있음에도 이렇게 쉽게 추종자를 늘려 가는 것 좀 보라지. 핏줄의 계
승 그 자체는 믿을 게 못 된다고들 하지만, 이자는 누가 봐도 태어나길 황제로 태어났다.
어서 말하라는 듯 황제가 턱짓하 자, 기사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시종장의 아내를 억압하고 있다 고 합니다. 자신들을 놓아주면 그분 을 풀어 주겠다고.”
시종장의 아내?
나는 깜짝 놀라서 황제를 바라봤 지만, 그는 그리 놀란 기색도 아니 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티아헤브 공작가의 장남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황제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어림없는 소리. 민간인을, 그것도 어린애들을 습격한 미치광이들과 협 상할 생각은 없다. 2차 습격이 있는 지, 본거지가 어딘지 그것만 알아내 라.”
“명을 받듭니다.”
부복한 기사는 급하게 물러났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발걸음에서 느껴졌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그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비정하게 느껴지나 보지.”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지?”
“시종장님께서 부인을 살려 달라 고 황태후님께 청했던 것이 어떤 일 인지…… 막연하게 생각만 했었는 데…… 이런 일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티아헤브 공작으로부터 들 은 것도 별거 없다. 군자금일 게 뻔 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종장의 아 내를 납치하고 협박한 자들의 협박 문이었다. 정확한 단체를 특정할 수 도, 위치를 특정할 수도 없었다.”
“돈을 주면 시종장님의 아내를 풀 어 준다는 건가요?”
황제가 픽 웃었다.
“주지 않은 내가, 못됐나?”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시종장은 제 부인을 가둔 자에게 황제의 비밀을 고하러 간 셈이 된 다. 황태후의 악랄함이라면 익히 알 고 있었지만…… 시종장이 그런 수 작에 넘어간 것이 분했다.
“그렇다면 왜 시종장님께서는 그 것을 황태후님께 부탁했는지 모르겠
습니다.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는 것 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소 폐 하에 대한 정보를 풀어 가면서까 지…… 그런 정보를 말했다는 것을 알면 어차피 본인의 목이 날아갈 텐 데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은 나를 잘 알아서 그래.”
그 말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되묻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 자, 황제는 제 검은 머리를 흩뜨리 더니 다시 가운을 벗고 침대에 푹 엎드렸다. 난 침상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의 등에 손을 대려는 순간, 대 답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 다.
“폐하께서는 결코, 다수의 백성을 희생시키려 하는 집단과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종장님께서 알고 계셨던 거군요.”
“그래.”
비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시 종장이 잘 아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잘 알았다. 그는 한번 봐주고 협상 하기 시작하면 그런 납치와 협박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아는 거다.
“저는 폐하를 믿고 지지합니다.
제가 납치되어도 그리해 주셔야 합 니다.”
황제가 웃었다. 그 재밌다는 듯한 웃음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것을 그는 알까.
“나를 탓하지 않는군.”
“어찌 제가 그리하겠습니까.”
“좋다, 내 기꺼이 그리하마.”
그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황제가 우연찮게 아카데미에 가 있었던 것을, ‘황제가 무장 투쟁 단
체의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고 판단한 귀족들은 왜 그런 것을 자기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냐고 투덜거리며 그를 괴롭혀 댔다. 그리 고 반대로 시민들은 황제가 그것을 막아 낸 것을 칭송하면서도, 그가 추가로 조처를 취해 안심시켜 주길 바랐다.
쿤의 말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황태후가 그 배후에 있다 는 것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닌 모양 이었다. 어딜 가도 황태후와 그 세 력이 우릴 따라다니며 어깃장을 놓 아 대려 했다.
그래도 피해자가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황제는 배후에 대해 아직 속단할 수 없으며, 무리하게 속단하여 어떤 세력이나 집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말이 좋아서 호소지, 명령이었지만.
그의 말은 꽤 잘 먹혀 들었고, 긴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회의는 잘 마 무리되 었다.
황제로부터 침입자에게 면회를 가 도 좋다는 허락은 진즉에 받아 두었 지만, 좀처럼 짬이 나지 않았다. 겨 우 시간 여유가 생긴 게, 새벽이 되 어서 였다.
12. 납치
셀레스티아를 비서로 올린 지 2 주 남짓이 흘렀다. 고작 그 짧은 시 간이 지나는 사이에 황제 반은 퍽 빠르게도 그녀에게 적응했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 리는 아는 법이라지만, 지금껏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 온 전임 비서가 사라진 불편함도 거의 느껴지지 않 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가 적응한 것이 아니라, 눈치 빠르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그녀가 그에게 적응한 거겠지. 반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전임 비서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듣고 배운 것인지는 몰라도, 셀레스 티아는 반이 원하는 것을 그때마다 척척 대령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생전 본 적도 없는 듯한 외국 귀빈 의 이름과 성격 및 특징을 잘도 안 내해 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알아줄 만한 것이어서, 만나는 이들의 습관 이나 식성까지 모조리 외우고 있으 니 편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같이 갑작스러운 비상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서도 이렇게 능숙하게 대처하리라곤 생각지도 못
했다. 그녀는 의회, 황궁 앞 광장을 비롯하여 아카데미와 기타 귀족들의 문의가 반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착착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들 에게 안내를 내보냈다.
그녀가 막고 있는 뒤로 얼마나 많은 일이 산재해 있는지 그의 눈에 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의 일 정은 말끔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 었다.
그러나 일 처리가 제대로 되고 있고, 일을 순서대로 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반이 처리해야 하는 민원의 양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아랫사람에게 시키고 내버려 두었다
간 황태후가 또 언제 분탕질을 할지 모르니 반이 일일이 나서야 하는 게 정말 피곤한 점이었다.
패닉에 빠진 시민들을 돌보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 행히도 첫 번째 공격을 막아 냈다는 공적이 반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수도인 만큼, 이곳 에는 마법 방어 시스템 하나만큼은 잘 설치되어 있었다. 항시 방어막을 가동해 둘 수는 없지만, 미리 발생 시점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비상시 를 대비하여 잠깐 가동하는 것은 가 능하다.
그것을 빌미로 귀족들과 시민들을
달래 놓고 나니 새벽 2시가 다 되 어 있었다.
피곤한 하루의 끝에, 방으로 돌아 가는 길이 문득 허전하게 느껴졌다. 반은 목덜미를 주무르며 슬쩍 뒤돌 아봤다. 허전함의 정체는 쉽게 알아 낼 수 있었다. 등 뒤를 지키고 있어 야 할 붉은 머리의 가녀린 그림자가 없었다. 언제나 반이 그녀를 찾으려 고 할 때면 한발 빠르게 거기에 있 어서, 2주 내내 그림자인 줄 알았 다. 이래서 잠은 제대로 자나 싶을 정도로.
그런 그녀가 자리에 없다는 게 묘하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오늘은 기묘 하게 바쁜 날이었으니까, 다른 볼일 이 있을 법도 했다. 누구에게 무슨 안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는 방으로 들어가며 옆에 선 시종에게 말했다.
“셀레스티아 불러와.”
“네, 폐하.”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워 잠깐 천장을 쳐다봤다. 이 제야 비로소 시간 여유가 생긴 셈이 다.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하루 종일 제대로 시간이 안 났다.
생각에 잠길 시간.
시간이 났다고 해서, 시간을 내어 생각한다고 해서 꼬였던 일이 제대 로 풀리는 일은 대개 없지만, 그래 도 머릿속을 정리해 두고 싶었다.
수많은 사건이, 인물이, 장소가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황제라 는 반상에 앉아 있는 이상, 잘되는 일도 많을 테지만 그만큼 실패하고 잘되지 않는 일도 많을 테다. 반은 이 자리에 오른 그 당일부터 그것을 느꼈고 지금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반은 거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반성 은 하되, 후회는 하지 않으려고 애 썼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렇게 하지 않
았더라면 좋았을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오늘.
어떻게 생각하면 딱히 불편할 일 도, 후회할 일도 아닐지 모른다. 반 이 여자를 대하는 것을 남들보다 지 나치게 무겁게 받아들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멋대로 여자를 안고 다 니던 아버지를 보고, 그렇게 흥청망 청 여자를 안다가 복상사할 지경에 이르렀던 아버지를 보고 반이 어떻 게 자랐겠는가. 말년에 아버지는 판 단력이 흐려져 제 품에 안기 좋은 아름다운 여자의 말이라면 간이든 쓸개든 재산이든 나라든 내어 줄 것
처럼 굴었다. 죽은 본처의 자식인 반이 황제 위를 이은 건, 틀림없이 아버지가 설득당하기 전에 돌아가셨 던 이유다.
그래서 그런지, 가볍게 시녀를 건 드리고 귀족의 여식을 건드리는 놈 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럴 마 음도 들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성욕이라는 게 있고, 여인을 보면 아름답다는 마음 또한 있다. 하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로서 가벼이 굴어서 많은 것을 망치고 싶지는 않 았다.
그래서 지금껏 그런 일이 없었던 거다.
그는 짜증스레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게 충동을 조절하지 못한 키스 같은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오명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것이 다른 키스와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셀 레스티아도 이미 그의 상태를 짐작 한 눈치였다. ‘우거진 동굴’을 방문 했을 때도 그게 효율적이라면, 그리 고 반이 필요하다면 포옹이나 키스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었 다.
하지만 그게 그런 게 아니다. 그 런 것은 업무의 일환으로 치부될 것 이 아니다. 인간이질 않은가. 남들이
알약을 먹듯이, 급할 때 비서를 희 롱할 수는 없었다.
사과하는 것쯤은 문제가 안 된다. 사과하고 앞으로 안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닐 것이 다.
하지만 정말 큰 문제는 그거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앞으로 같은 상황에 처 했을 때, 바로 옆에 셀레스티아가 있다면 반은 또 그러지 않을 수 있 을까?
그 순간에 반은 분명 또렷이 의 식이 있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
데, 순간 지나치게 달아 보였고, 목 이 타들어 갈 듯 그녀를 갈구하게 되었다. 눈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했 을 때, 그녀가 반에게 손을 뻗었고, 다음 순간에는 그녀가 그를 거부하 는 말을 하기만을 바랐다. 그것만이 반이 제정신을 차릴 방법이었으니 까.
그는 누운 채로 손을 들어 제 손 바닥을 바라봤다.
마차에서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으로 손바닥이 조 금 파여 있긴 했지만, 이것은 부효 과는 아니니 마법을 쓰면 금세 아물 터였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 손등과 팔을 매만져 보았다. 상처 없이 매끈한 상태였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