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황궁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황제의 방으로 돌아가 보지도 못하고 황태 후를 맞닥뜨렸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인어를 연상시키는 팥죽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허리를 꼿꼿하 게 펴고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반은 피곤하다는 듯 대놓고 한숨 을 쉬었다.
“어쩐 일로 이런 곳에 계십니까?”
황태후는 염려 가득한 듯한 얼굴 을 지어 보이며 황제의 손을 꼭 붙 들었다. 황제가 진저리가 난다는 기 색으로 손을 털자, 그녀는 가만히
손을 거두었다.
“왜, 내가 죽지 않아서 아쉬우십 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폐 하. 전 심한 일을 당할 뻔하셨다 하 기에 이리 걱정되어 쫓아 나오지 않 았습니까. 제 아들과도 같은 분인 것을……-”
“그렇게 뻔뻔한 소리를 하면서 종 종 독약을 보내는 게 누군지 모르겠 습니다.”
황태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누가 들으면 오해합니 다.”
저렇게까지 연기를 잘하면 누군가 상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하 는 생각으로 골몰해 있는데, 황태후 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옮겨 왔다. 그 녀는 내가 입고 있는 자수 드레스를 유심히 훑어보더니, 장신구까지 꼼 꼼히 살폈다. 저렇게까지 노골적인 시선으로 보는 건, 저 차림새 좀 보 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시선을 주는데도 황제가 본 척도 않자, 황태후는 굳 이 입을 여는 수고까지 해야 했다.
“비서의 꼴이 참 독특하십니다.”
“황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그녀는 내 인사는 들은 척도 않 고 이어 말했다.
“저 드레스의 값어치는 어디 하잘 것없는 평민의 주머니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 각하십니까? 임명하겠다고 하실 때 부터 속내는 빤했습니다만.”
황제가 짜증 난다는 투로 끼어들 었다.
“오늘 일을 전해 들으셨으니 나와 계셨던 것 아닙니까. 아카데미를 음 해하려는 세력이 있어 살피러 간 것 뿐입니다. 파티장에 가는데 뭘 입혀 서 데려가야 속이 편하시겠습니까?”
‘음해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황 태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연히 말씀하시겠지. 비 로 들이기엔 천한 여자니 이렇게 가 까운 자리에 두고 이걸 입혔다 저걸 입혔다 하며 즐기시는 모양입니다.”
그런 소리를 지금껏 황태후가 해 온 게 얼만데. 새삼스레 화가 나지 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지금까지도 기껍 지 않은 기색이었던 황제의 분노의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추가한 모양 이었다. 별거 아닌 말임에도 그는 확 성질이 뻗치는지 황태후를 정면
으로 쏘아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기척이 짙은 황제의 적안은 아마 몹 시 위협적일 테다. 황태후는 그녀답 지 않게 순간적으로 겁을 먹은 듯 한 발자국 물러났다.
“황궁의 큰 어른 되시는 분께서 말을 조심히 해 주십시오.”
“……나를 겁박할 셈이오!”
나는 주제넘은 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황제의 등에 슬쩍 손을 올렸 다. 힘을 많이 쓴 뒤라 그런지 오늘 따라 그의 분위기가 불안정해 보였 던 까닭이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말리는 걸 알았는지 긴 호흡을 내뱉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여느 때와 같 아 보였다.
“지금 이렇게 언쟁할 기분이 아니 오. 난 피곤하여 쉬고 싶으니, 오늘 대거리는 여기까지 하지.”
황태후는 그제야 어떻게든 진정한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의회에서 폐하를 뵙고자 모두들 모여서 기다리는데, 어찌 그러십니 까.”
“이런 시간에?”
“그런 일이 났다는데, 그럼 어찌
다들 집에만 있겠소.”
황제는 비뚤게 웃었다. 제 머리 위로도 불덩이가 떨어질까 초조한 자들이 모여든 거겠지.
“기왕 기다렸으니, 좀 더 기다리 라 하십시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황제는 몸 을 돌렸다. 나도 그를 따라 발걸음 을 뗐고, 그의 호위 기사와 비뉴스 도 우리를 따랐다. 난 그들이 잘 따 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척하며 뒤 를 돌아보았다.
황태후는 황제의 뒷모습을 슬며시 살피듯 쳐다보고 있었다. 드러난 피
부에 어떤 표식이라도 있는지, 황제 가 어디 안 좋아 보이진 않는지 살 피는 게 퍽 의도가 빤했다.
오늘 과량의 마력을 쓴 황제가 어딘가 좋지 않은 곳은 없는지를 살 피는 거다. 시종장님이 밀고했던 것 을 아직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 만, 그래도 무심코 살피게 되는 모 양이 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황제가 의연하게 서 있는 자세를 흘끗 바라 봤다.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 고, 평소와 다른 점을 쉽게 관찰하 기 어려웠다. 아마 그리 심한 고통 을 겪고 있지는 않을 거다. 급했다
면 마차에서 잠깐이라도 등을 봐 달 라고 했을 그였다. 별다른 청은 없 었다. 그리고 그…… 접촉에 불과했 던 키스도 아마 도움이 되었겠지.
황태후도 그렇게 느낀 모양이다. 우리가 모서리를 꺾어 돌아갈 때쯤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 다.
그의 방에 도착하기까지, 재상과 추밀원 의장과도 마주쳐야 했다. 그 들도 집에서 쉴 시간인데 이렇게 헐 레벌떡 입궁하여 뵙기를 청하며 기
다리는 것을 보면 큰일은 큰일이었 던 모양이다.
나는 그들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 려서 달려온 것을 보고서야 서서히, 아주 늦은 실감을 했다.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거기에 있었던 것은, 내 방의 침입자에 대해서 알아내고자 하는 황제의 뜻 때문이긴 했다. 그 러나 내가 끝내 말리지 못했던 탓이 기도 했다. 뭔가 일이 틀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간신히 황제의 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짜증스레 오버코트인 코타르디 를 벗어 던졌다. 나는 파티복을 벗 어 던지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복 장을 집어 드는 그의 곁으로 냉큼 다가가 옷을 뺏어 들었다. 그는 황 당한 눈으로 날 쳐다봤지만 난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돌려세웠다.
“이게 대체…… 이런 꼴로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그나마 조처를 좀 해 두어서 괜 찮으리라 여겼는데, 그것은 오산이 었다. 등은 피범벅이었다. 새로운 상 처가 마치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심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부효과가 강하다니, 이런 건 처음 본다. 도대
체 얼마나 마구잡이로 힘을 써 댄 건가?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 다. 내가 다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 어서.
상처 위에 가만히 손을 얹자, 그 가 작게 신음을 흘리는 게 들렸다.
“이렇게 심하셨으면, 미리 말씀하 시지 그러셨습니까.”
“지금 화내는 건가?”
“제가 어찌 감히 폐하께 화를 내 겠습니까! 그냥 미리 말씀해 달라는 거 아닙니까!”
“아니, 지금 화내는데.”
“제가 어떻게……?
나를 꾸짖을 생각이었는지 뒤돌아 봤던 그는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 다. 다행이었다. 그의 시선은 사람의 정신을 빼놓으니까 계산하는 데 방 해가 된다. 앞을 보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
듣도 보도 못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물 원소계의 마법을 거꾸로 읊 으며 양손을 그의 등 위에 놓았다. 레이스 재질의 옷을 입었더니 내 몸 위에서 마법진이 희미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상처가 빠
르게 아무는 것은, 틀림없이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닐 거다. 희미하게 신음을 흘리던 황제는 내가 잠시 행 동을 멈추자, 앞을 본 채로 중얼거 렸다.
“내가 울리는 건가?”
그 말에 맞춰 내 눈에서 방울진 것이 뚝, 하고 흘러내렸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리자 흐려졌던 시야가 간신히 조금쯤 돌아왔다.
억울했다. 딱히 울 생각은 없었는 데, 눈물을 자꾸 보여야 하는 것이. 이건 그저 내 공감 능력이 좋은 탓 이다. 타인의 고통이 이렇게까지 여 실히 눈앞에 전시되어 있으니까. 나
도 모르게 내가 다 아파서.
손등 위로 점점이 눈물이 떨어지 는 게 보였다. 목을 가다듬고 대답 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나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가서 혼 나는 신하도, 나 때문에 목이 날아 간 신하도 있다만 내가 울린 신하는 그리 많지 않은데.”
한숨을 쉰 그는 대답이 없자 몸 을 돌렸다. 그러곤 흐려진 내 눈가 를 손으로 훔쳤다. 나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 애썼다.
“그만두십시오.”
“왜?”
“이런 건 그냥 두면 마릅니다.”
“내 등도 그냥 두면 낫긴 한다 만.”
“ 폐하!”
“지금 나한테 화내지 않는 게 맞 나? 인수인계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를 완력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무리였다. 고집불통인 황제가 우는 내 얼굴을 구경하겠답시고 제 상처 를 돌보는 것도 포기하고 날 보고 서 있는 바람에, 난 결국 눈물이 멎 을 때까지 그러고 멍청하니 서 있어 야 했다.
“이제 괜찮아졌군.”
“그러면 이제, 등을 마저 내어 주 십 시오.”
황제는 손을 가볍게 저어 보였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보 아하니 기다리는 자가 꽤 많은 것 같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중
에……
“그래.”
난 문으로 향하는 황제의 등에다 대고 문득 생각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폐하, 테포다 제국의 쿤
황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와도 괜찮 겠습니까?”
어쩐지 그가 내게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 다. 내게 볼일이 있어서겠지. 도대체 그 볼일이 무엇인지 그는 내내 숨겨 왔다. 제록스 강사까지 얽혀 있는 일이었다. 한 번이라도 만나서 이야 기를 좀 나눠 보고 싶었다.
그는 마뜩잖다는 표정이었지만 고 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오늘 있었던 사건에 참여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사건을 알고도 방치한 자 다. 그런 자를 만나서 어쩔 셈이
지?”
“자꾸 저를 찾는 이유를 알고 싶 어서요. 그냥 몇 마디 질문만 할 생 각입니다. 폐하의 시간을 뺏을 순 없으니 저 혼자 다녀와도 괜찮을 것 같아서 요.”
“글쎄……/
황제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몸을 홱 돌렸다. 얼결에 얼굴이 가 까워졌다. 코앞에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내 이마에서 미간, 미간에서 코, 코에서 볼, 볼에 서 입으로 천천히 옮겨 오는 게 느 껴졌다.
눈이 퍽 가늘어진 그는 쏘아붙이 듯 대꾸했다.
“알아서 해.”
이렇게 수월하게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 담?
“알겠습니다.”
신난 김에 냉큼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지만 할 일이 많은 나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응접실에 한 무더기의 시종과 기사가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차례 로 세운 뒤, 가장 급해 보이는 기사 를 황제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탑에 있던 미치광이들을 심문한 결과를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어떻게 됐지?”
기사는 그렇게 급하게 굴던 것치 고는 떨떠름한 어조로 느리게 말을 꺼냈다.
“좀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이상한 소리?”
“정의 구현을 위한 무력 투쟁이라 느니.”
“힘도 없는 민간인들을 몰살시킬 생각을 하면서 정의 구현이라. 재밌 는 발상이군.”
“어떻게 할까요?”
“어디까지 말했지?”
“순순히 불고 있습니다만, 아무래 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말해 봐.”
“본거지의 위치와 다음 계획에 대
해서는 입을 떼지 않을 셈인 것 같 습니다. 하지만 행색과 말투를 보아 서 예카투 놈과 바쟌, 골디나 놈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알아내.”
“ 네.”
황제의 명을 들은 기사는 대답을 하곤 뭔가 말을 덧붙이려다가 내 눈 치를 봤다. 황제가 귀찮다는 듯 고 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좋다. 믿을 만한 자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