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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49화 (49/103)

- 49화

우리는 입을 다물고 긴장감 속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보이 지 않지만, 앞으로 곧 5분 안에 화 염 마법 덩어리들이 여기로 떨어지 게 된다. 메테오만큼의 위력은 아니 지만 그것에 준하는 위력을 가진 것 들이 수십 수백 개가.

주변에 황제 휘하의 마법사들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들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황 제의 신변 보호를 가장 우선으로 하 고 있으리라.

황제는 가볍게 숨을 들이켜더니 양 손바닥을 위로 하여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열 개 손가락 끝에서 물방 울이 방울방울 샘솟아 나와, 허공에 열 개의 물방울이 둥둥 떴다. 영롱 한 그것들은 그가 손가락을 튕길 때 마다 두 개씩으로 분해돼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물방울이 그의 주위 허공에 둥둥 떠 있게 되었다.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나는 속으 로 경악할 듯이 감탄했다. 다룰 수 있고 지탱할 수 있는 물체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개수도 정말 계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저렇게 많 은 것을 한 사람이 원활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있을 수 없 는 일이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꽁꽁 묶이고 재갈이 물린 채로 바닥에 누워 있는 복면 사내도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져 있었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에서, 아주 작게 비 같은 것 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그것 하나하나가 고성능의 화염 폭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지금까지 황제는 이따금 그런 말 을 하곤 했다. 전력을 다한 적은 없 노라고. 나는 그 말의 절반쯤은 진 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농 담의 일환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

러나 지금은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믿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발화 물질들 하나하나에 일일이 대응하는 수천수 만 개의 물 덩어리가 하늘로 날아올 랐다. 그 물 덩어리는 접촉하는 순 간 폭발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마법 폭탄을 그대로 감싸 안았다. 와작, 와작! 폭탄들이 압축에 못 견뎌 쪼 그라드는 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황 제의 뜻에 따라 물 덩어리는 압축되 며 폭발을 외부로 노출되는 일 없이 감싸 안았다.

단 하나도 아카데미의 지붕에 닿 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컨트

롤이 었다.

애조에 이런 것을 계산하는 것이 인간의 머리로 가능한가?

너무 놀라 바라본 황제의 눈은 평소의 적색보다 훨씬 더 짙은 색으 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도 한순간에 너무 폭발적인 힘을 쓴 탓에 안구가 압력을 견디지 못해 핏줄이 터진 것 일 게다.

그때 허공에서 소멸하는 수천 개 의 덩어리 중 몇 개가 다시 위로 치솟는 게 보였다.

그것들은 폭탄을 발사한 자들이 있는, 탑의 지붕으로 곧장 쏘아지듯

날아갔다.

쿠콰콰광! 거대한 소음과 동시에 먼지 덩어리가 탑의 꼭대기를 자욱 하게 감싸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 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폭발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목을 빼는데, 황제가 내 쪽으로 몸을 돌 렸다.

아마 이렇게까지 거대한 힘을 사 용해 본 것은 그로서도 처음이 아닐 까? 붉은 눈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다 끝난 거예요?”

“그런 것 같아……, 저 애송이 자

식도 죽기는 싫을 테니 빼먹은 건 없겠지.”

쿤은 황제의 마법에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내내 심드렁하던 얼굴 에 이채가 돌았다.

“듣기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오, 부르크의 황제께서는. 혼 자 도망가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 을 텐데. 백성의 목숨을 그리 소중 히 여기시는 것은…… 솔직히 의외 요.”

“소중한 목숨이고 뭐고…… 남의 나라 꼬맹이도 알고 있는 황태후의 꿍꿍이를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 맞 았다가는 억울해서 잠도 안 오겠

지.”

농담을 하는 황제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난 얼른 그에게 다가 갔다.

그저 멍이 아니라 실제로 외부에 상처까지 생겼는지 그의 손등에 피 가 맺힌 게 슬쩍 보였다. 도대체 무 슨 술식을 어떤 식으로 조합해서 쓰 기에 이렇게까지 부효과가 강하게 온단 말인가?

“이거, 여러 번 할 일은 못 되는 것 같군.”

그가 내 얼굴에 어린 걱정을 읽 었는지 쓰게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

렸다.

안쓰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 을 뻗는데, 황제가 나를 안는 게 더 먼저였다.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 었다. 나는 그의 품에 인형처럼 안 겨서 가만히 서 있었다. 불덩어리가 나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꽤 오래 그러고 서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갇힌 채로 쿤이 달아나지나 않을까 그의 모습 을 눈으로 좇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풀려났다.

“이제 돌아가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 다. 다른 나라 황자 앞에서 더 이상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터인 황 제는 의연하게 몸을 돌렸다.

나는 그저 그의 곁을 수행할 뿐 이다. 쿤도 꽤 감명받은 바가 있는 지 의외로 별다른 말 없이 우리 일 행에 합류했다.

앞장서서 천천히 걸어가는 그를 뒤따르며 하인을 불러 마차를 대기 시킬 것, 경호 기사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줄 것을 전했다. 하인이 빠르게 뛰 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다시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하

나 흩어져 있던 일행이 합류하여 마 차에 이를 즈음에는 꽤 거대한 인원 수가 되어 있었다.

기사 중 한 명이 탑의 꼭대기에 있는 놈들 중 셋은 자결했고, 둘은 생포할 수 있었다는 보고를 전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장이 헐레벌떡 달려 와 뒤늦게 황제에게 감사 표시를 했 다.

“그럼 뒷일은 부탁하지.”

“네! 살펴 가십시오, 폐하.”

“자네만 믿고 그동안 아카데미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네. 앞 으로도 힘써 주게.”

아카데미장이 정수리가 보이도록 인사를 해 댔다.

내가 문을 열어 주자, 황제는 발 디딤대를 쓰지도 않고 훌쩍 마차 안 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 라 마차 안으로 들어서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둘만 남자, 황제의 상태가 좋지 않음이 한층 잘 느껴졌다.

“폐하, 등을 이쪽으로.”

그는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아니, 그자라면 이렇게까지 근거 리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는 감지할 수 있겠지. 그렇게까지 대놓고 약점 을 알릴 수는 없으니까 됐다.”

“하오나 폐하.”

“내가 그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순순히 포박당한 채로 말로 이송 되고 있는 테포다 제국의 황자 쿤은 여러 가지로 거슬리는 존재긴 했다. 죽여 버릴 수도 없고.

황제의 말이 맞긴 했지만, 평소보 다도 훨씬 안색이 좋지 않은 황제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시면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 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긴 하루였지.”

황제는 이번에는 순순히 응했다. 하지만 권하는 대로 큰 마차 안의 침상에 몸을 누이는 그가 영 불편해 보였다. 베개를 다시 받쳐 줄 요량 으로 그에게 몸을 굽히는데, 팔이 순간 닿았다.

그게 기폭제가 되었을까?

그가 나를 끌어당겼고, 내 몸의 중심이 무너진다는 생각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입술이 급하게 입에 닿 아 왔다. 숨이 뜨거웠다. 내 뒤통수

를 단단히 붙드는 그의 팔도, 내 등 을 꽉 쥐는 그의 손도 동시에 느껴 졌다. 무엇 하나 뜨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닿는 곳마다 델 것처 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너무 많은 힘을 쓴 그의 본능이 가장 빠른 냉각제를 찾은 거다. 술 식을 외지 않는 나를 탐해 보았자 그리 효율이 좋진 않겠지만,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까. 닿는 것만으로 어 느 정도 해갈은 되니까.

세렝게반도 이런 적이 있었다. 나 는 그때,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 다. 나는 이런 의미 없는 행동을 가 지고 괜한 의미를 부여할 만큼 덜 자라지 않았다.

저번에, 싫다고 말한다면 어느 상 황에서건 자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거라고 분명 그는 말했다. 하 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 고, 그를 밀어 내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농밀한 키스에 당 황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내 입 안의 공기를 모두 가 져갈 듯 나를 탐하다가, 천천히 눈 을 뜨고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정신

이 든 사람처럼 천천히 물러났다. 입술을 놓아주고 내게서 손과 팔을 물렸다.

뜻 모를 눈빛이 나를 응시했다.

뻔했다, 그가 할 말은. 나는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싶 지 않았다. 그 외의 어떤 말도.

나는 할 일을 한 비서의 모습으 로 보이고 싶을 뿐이었고, 고작 키 스 한두 번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 았다.

그래서 일부러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꺼냈다.

“폐하, 그러시다면 등은 황궁으로

돌아가서 돌봐 드려도 괜찮겠습니 까?”

그는 아주 느리게 몇 번인가 눈 을 깜박이더니, 그제야 내 말을 들 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황제는 언제부턴가 둘만 있을 때 가 되면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이 되곤 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 이었다.

하지만 난 그걸 알면서도 부러 시선을 피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없던 일이 될 것이다.

그도, 나도 이 일에 대해서 다시 말 을 꺼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 렇게 과한 능력을 쓰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니 말할 일도 없을 거다.

아카데미 테러범을 잡았다는 소문 이 순식간에 수도를 휩쓸며 여론은 흉흉해졌다. 황태후가 의도한 것이 이것이었다면 그녀는 목표의 반절은 이룩한 셈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테러를 했단 말인가? 이번에 제국으로 합병된 속 국 출신이? 대체 왜?

수도에는 본래 부르크 제국 주변 의 소국이나 주위 소부족 출신이 많 았다. 전대 황제가 무력 팽창을 계 속했을 때 병합된 국가도 있었지만, 현 황제가 취임한 뒤 스스로 항복하 여 병합을 선택한 국가와 부족이 많 았다.

부르크 제국은 거의 비슷한 규모 의 테포다 제국에 비해 아주 유순한 이민 정책을 펼쳤다. 그것이 현 황 제 대에 들어 국경이 확장된 주된 요인이었다.

항복하여 병합되는 국민들에게 현 재의 영토에 그대로 살게 해 주었 고, 영주를 바꾸지도 않았다. 더 개

선된 농작물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 고, 제국의 발전된 기술을 전파해 주었다. 세금도 과하게 징수하지 않 고, 팔려 들어오는 노예들로 시장이 형성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합 병국의 시민을 노예로 만들지도 않 았다.

합병되어 들어온 나라의 귀족들로 서는 지위를 유지하긴 해도 아무래 도 격이 떨어지게 되니 그리 탐탁지 는 않을 터. 하지만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농부들이나 서민들 입장에서는 왕이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는 것 으로 대우가 나아지니 오히려 두 손 을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별다른 소요가 일 지 않았던 것은, 이미 이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부르크 제국민들은 새롭게 영입되는 이민족들과 그리 반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렷하게 범인이 지목되어 있는 이번 테러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시민들과 귀 족들은 늦은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 루지 못하고 광장에 모였다.

이 모든 것을 미리 수사하고 아 카데미에 잠입하여 테러를 막아 준 황제 폐하밖에 믿을 분이 없다고 생 각한 것이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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