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대피’라는 말이 퍽 거슬렸다. 마 치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과 같은 말이질 않나. 황제도 아 마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의 문과 불쾌함이 동시에 그의 얼굴을 스쳤다.
“대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으로 부터 대피하라는 거지?”
“어지간히 적이 많은 줄은 알았지 만 더하더군. 부르크 제국의 내정이 엉망이라는 것은 유명한 얘기가 아 니오? 굳이 기분 나빠할 것도 없을 텐데.”
“그래서?”
“그들 중 하나가 오늘 이곳을 습 격한다고 들었소.”
습격? 대체 무슨 소리지?
황제와 나는 일순 시선을 마주했 다. 예상되는 적이라면 수두룩했지 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있을까? 여기야말로 부르크 제국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귀족 자제들이 모인 공간이고, 가장 뛰어난 석학들이 다 니는 학문의 전당이다.
암묵적인 합의라는 게 있다. 아무 리 서로에게 타격을 주고, 피해를 입히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적 대 관계의 국가라고 해도, 신전과
아카데미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국내의 어떤 자가 아카데미의 연회 홀을 공격하려 한 다고?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해서 이득을 볼 사람이 도대체 어디 에 있겠는가?
“그딴 소릴 믿으라는 건가?”
“믿건 안 믿건 상관없지만, 그 여 자는 다른 곳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 소.”
황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재밌다 는 듯 웃던 그가 발을 치웠고, 엎드 려 있던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간신
히 상체를 일으켰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것도 정도 지……, 이 정도쯤 되면 죽여 달라 고 사정하는 거나 다름없지.”
황제는 손속에 사정을 두는 법이 없다. 죽이진 않더라도 그 비슷한 정도의 고통은 맛보게 해 줄지도 모 른다. 도대체 저 사내는 뭘 믿고 저 렇게 배짱을 부리는 거지?
황제의 손에서 단도가 한 바퀴 빙글 도는 그 순간, 나는 그자의 귀 에 걸린 비취 귀걸이를 문득 보았 다. 흰색 바탕에 불투명한 청색이 섞인 그 모양과 색은 틀림없이 극소 량만 생산된다는 물건이다. 귀족 손
님이 왔을 때, 일반적인 비취도 어 지간한 돈을 줘서는 손에 넣기 힘들 정도라며 르베르티티가 내게 알려 준 적이 있어 똑똑히 기억한다.
다른 특징적인 물건들이나 의복은 모두 감춘 상태에서 저런 귀걸이를 남기고 있다는 것은, 저게 그런 고 가의 물품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거 겠지.
어지간한 지위와 돈을 가진 자. 그리고 황제 본인이 아니면 일대일 로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법 실 력자.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 기가 있었다. 반 황제와 비슷할 정
도의 마법 재능을 가진 몇 안 되는 자. 이제 골디나 방면으로 국경을 맞대게 된 나라인 테포다 제국의 황 자 쿤에 대한 소문이었다.
남의 나라 황자가 이렇게 막 돌 아다니고 있을 리도 없지만…… 황 제의 직속 마법 부대가 저자를 놓쳤 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지간히 이름 을 날리는 마법사일 테다.
황제는 본인이 지고지순한 존재로 자라 와 저렇게 반말하는 것이 짜증 나기만 하는 것 같았지만,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저렇게까지 간덩어리 가 부은 존재라면 몇 생각나지 않았 다. 그쪽 방면이라면 분명 외견도
골디나인과 흡사할 테다.
내 생각에 일말의 확신이 들자, 나는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황제 반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잠깐만요!”
“뭐지?”
“저 남자, 처음부터 제게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보였어요.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 아요.”
황제가 씩 웃었다.
“이야기를 듣는 데에는 많은 방법 이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해쳤다간 국 제 분쟁이 될지도 모르니까……?
“ 음?”
“그 사람, 테포다 제국 황자 쿤인 것 같아요.”
황제 반이라면, 아마 이런 상황에 서도 표정을 감쪽같이 감추었을 거 다. 하지만 복면 사내는 그 정도의 능글맞은 정치인의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는지, 명백한 동요가 보 였다.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본인이 맞잖아. 대체 어쩌려
고 단신으로 남의 나라를 돌아다니 는 거야?
황제가 짜증 난다는 듯 쿤의 멱 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테포다 제국의 비린내 나는 어린 놈이 여긴 왜 기어들어 왔지?”
“말했을 텐데. 저 여자한테 볼일 이 있다고.”
“대체 무슨……?”
쿤은 도망칠 생각은 없는지 순순 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재밌는 것을 보듯 나를 보는 얼굴이 조금 황제랑 닮아 보였다.
“그쪽, 그러니까……,”
“셀레스티아예요.”
“어떻게 안 거지? 내가 누군지.”
“그런 게 중요해요, 지금?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지나 말해요. 또, 피하라는 건 대체 뭐죠?”
쿤은 태양이 어디쯤 있는지 가늠 하듯 창밖을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정체를 알고 나니 이제껏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손톱과 머리가 단정하게 다 듬어진 게 눈에 띄었다.
“뭐, 어쩔 수 없군. 그쪽 황태후 가 돌아 버려서 말이야.”
“황태후……?”
“자세한 사정은 다음에 설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 당장 습격을 해 올 텐데.”
“습격이라는 게 대체 뭐죠?”
“여길 밟아 놓고 반란군의 짓으로 뒤집어씌울 셈이다. 이번에 합병한 소국의 수가 꽤 되질 않나?”
“그런 짓을……-”
이곳을 공격하고 반란군의 소행으 로 만들면, 황제와 합병국 신민 간 의 사이는 급격하게 악화된다. 아마 기존 부르크 제국민들과 합병되어 영입된 신민 사이에도 어마어마한
불화가 생기겠지.
아주 거대한 소요가 일게 될 거 다.
너무 어이가 없고 경악스러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 대 신 황제가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소.”
황제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게 정말이라면 황태후는, 얼마 나 미쳐 버린 건가.”
쿤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술술 불 생각은 아니
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겠지. 대신 이 여자를 내가 빌 려 가도 되겠소?”
“남의 나라에 기어들어 온 주제에 젖비린내 나는 놈이 바라는 것도 많 군.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지. 그 래서, 그 습격이라는 게 언제지?”
“해가 오른 어깨에 닿는 시각.”
“젠장, 곧이군.”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황 제도 내 의견에 수긍했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저 말을 한번 믿어 보자 는 뜻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자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거다. 그리고 믿어서 손해 볼 게 없는 경 고니까.
“그런 소리를 해 봐야 이득 볼 것 도 없으니 믿어 주지. 대신, 대피할 생각은 없다.”
“ 뭐요?”
“황태후의 농간인지 뭔지 따위에 놀아나 줄 생각도 없고……소 그리고 테포다의 애송이는 관심 없겠지만, 내게 이 아카데미 놈들은 그나마 써 먹을 만한 몇 안 되는 국민들이라서 말이다.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쿤은 눈을 감았다.
“미안하지만, 이미 막을 수는 없 을 거다.”
“하……/
황제는 그 사내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그 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황태후는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 왔 던 것이고……/
“안내나 하지, 애송이. 제대로 설 명해.”
“뭘 말이오?”
“아무래도 넌 셀레스티아에게 볼
일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도망치 지 않는다. 살릴 생각이면 그 테러 인지 뭔지의 규모와 일시, 방법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
“그러면 뭐가 달라지오?”
“막는 건 내가 한다.”
“그딴 게……,”
……가능하다고? 라는 뒷말은 상 처를 밟는 황제의 무자비한 발길질 에 삼켜졌다.
“애송이 주제에 말이 많군. 뭐, 10 황자쯤 되나?”
“8 황자요.”
“그래, 아무튼 자식 하나는 많더 군. 테포다의 늙은 할아범 얼굴을 봐서 당장 죽이지 않는 걸로 알아 라. 안내해.”
쿤은 못내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내 얼굴을 흘끗 보곤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저 여자 하나 데려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군. 이런 막무가내인 황제 를 만날 줄이야.”
사실 그 정도라면 어딜 가서도 잡힐 만한 마법 실력은 아니었다. 호위 하나 없이 남의 나라를 돌아다 닐 정도로 자신감 있는 그가 저렇게
한탄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황제 반이야말로 정말 어이없을 정도의 실력자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대체 내게 무슨 볼 일이지?
황제와 열 명의 호위 마법사, 그 리고 쿤이 문 바깥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질문을 미뤄 두었다. 곧 물어볼 기회가 오겠지.
2층 계단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 러낸 황제를 본 모두는 일순 당황해 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그
자리에 있던 강사 중 한 명의 신호 로 음악이 뚝 멎었고, 이어서 홀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 에 무릎을 대고 황제에 대한 경의의 예를 표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 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몸을 일 으켰다. 황제는 홀에 있는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곤 그나마 개중 통솔 력이 있어 보이는 강사를 골라 말했 다.
“오늘 이 건물에 대한 습격 예고
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당장 여기 에 있는 전원을 대피시켜라.”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 넷!”
황제의 말이라는 것만으로 그 말 은 어떤 힘을 가진다. 어떤 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고,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 명제가 되는 거다.
안타깝게도 쿤의 말은 농담이 아 니었던 모양이다. 흰옷의 마법사들
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돌아왔을 때, 그들은 쿤이 말한 장 소에 이미 거대한 마법진이 이 건물 을 겨냥하고 있다고 제각기 보고했 다.
“분리형 메테오 마법입니다.”
“아카데미의 방어막으로는 막아 낼 수 없을 것 같나?”
“아카데미를 감싼 방어막은 하나 의 강한 충격은 쉽게 막아 내지만, 여러 개의 충격에는 취약하다는 단 점이 있습니다. 그것까지 간파하여 개량한 것 같습니다.”
“귀찮기 짝이 없군.”
시간 여유만 더 있었다면 마법진 을 해체하는 쪽이 빨랐겠지만, 지금 은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 었다.
때맞춰 공격을 알아낼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대피할 수 있는 시간 은 짧았고 대피해야 하는 인원은 많 았다. 그리고 이 건물만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주변에 미치는 피해도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너 무 촉박했다. 아마 2천 명 중 절반 도 대피하지 못할 거다.
우리는 모두와 반대 방향으로 달 려 옥상 위로 올라왔다. 쿤은 저 혼 자라도 달아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황제가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 았다.
황제는 모든 보고를 받은 뒤 나 를 바라봤다.
“혹시 모르니 건물 밖으로 나가 있어라.”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폐하를 가장 먼 저 대피시키고 싶습니다만…… 제 말은 안 들어주실 것 아닙니까.”
황제는 초조한 듯 빠르게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네 일이 아 닌가?”
“어차피 폐하께서 지켜 주실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곁에 있겠습니 다.”
“정말 넌 내가 사들인 것 중에서 제일 고집이 세다니까.”
“ 영광입니다.”
작게 웃은 황제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날 설득하는 데 시간을 낭 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