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부딪쳐서 죄송합니다.”
“왜? 다른 놈이랑 춤을 추고 싶 었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넋을 빼고 보는 걸 보니 말이야.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사 귀는 남자 한둘쯤 있었다고 해도 이 상한 일은 아니질 않나, 이렇게 아 름다운데. 왜 그렇게 발끈하지?”
황제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낯 뜨거운 소리를 잘만 한다. 입에 발 린 소리를 안 해도 되는 지위에 오 른 그가 하는 말이라서 더 간지럽 다.
“그딴 거 관심 없으니까 그만하세 요.”
“그딴 거라니. 왜 그렇게 말하 지?”
“폐하도 아시잖아요. 저는 이제 그런 거 관심 없어요.”
“그렇게까지 회의적일 필요가 있 나?”
나는 세렉의 일을 다 아는 그가 이런 식으로 짓궂게 말하는 게 마음 에 들지 않아 그를 쏘아보았다.
“그 정도로는 자랐으니까요. 현자건 바보건 국경을 넘는 노예 수레에 한 번이라도 갇혀 본다면
더 이상 그런 소모적이고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틜 겁니다.”
“하하,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러는 폐하께서는요?”
빙글빙글, 크게 두 바퀴를 도는 사이에 치맛자락이 넓게 퍼졌다가 모아졌고, 나는 다시 황제와 몸을 맞대고 느릿하게 박자를 탔다.
“그러는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 결혼을 탐탁하게 여기시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그렇게 보이나?”
“제가 참견할
아니지만……/
일은
비키가 나간 쪽 문을 흘끗 바라본 나는 말을 이었다.
“비키는 폐하를 많이 좋아해요.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종종 폐하를 흠모한다고 말하곤 했는걸요.”
“……그 얘길 왜 하는 거지?”
아, 이건 정말로 기분이 나쁜 거 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데다, 비 틀린 웃음마저 얼굴에서 가셔 있었 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 놓고 갑 자기 그만둘 수도 없었다. 나는 억
지로 말을 끝맺었다.
“어차피 결혼하실 거라면, 외척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정말로 아껴 주시라고요.”
한 템포 느리게 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있을 때는 하나도 거슬리지 않던 왈 츠가 이젠 소음처럼 느껴졌다. 싸늘 한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는 게 느껴 졌다.
“정말로 그대가 참견할 얘기가 아 니군. 그런 고민을 하라고 뽑아 놓 은 줄 아나? 선을 지켰으면 좋겠는 데.”
차갑게 떨어지는 말에 나도 모르 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음악 도중이고 뭐고 내 손 을 놓고 몸을 돌려 댄스 플로어에서 벗어났다.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 다가 나는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키가 아주 큰 그를 뒤쫓는 것은 그 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기분은 퍽 가라앉았다.
상냥한 편은 아니었지만 까탈스럽 거나 변덕스럽지도 않은 그였다. 게 다가 최근에는 서로 바빠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이렇게까지 대 놓고 기분 상한 티를 내는 걸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렇게까지 정
색할 일인가?
이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 건 분 명 황제잖아. 황제가 먼저 내 연예 가 어떻고 하면서 사생활의 금을 밟 은 거잖아.
하지만 비키는 분명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외척의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잘 대해 주라고 말한 것도, 비키와의 결혼에 대해 스트레 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 이 조언한 것도 선을 넘는 일이었을 까?
어쩌면 그가 고민하는 부분을 건 드린 건지도 몰랐다.
색할 일인가?
이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 건 분 명 황제잖아. 황제가 먼저 내 연예 가 어떻고 하면서 사생활의 금을 밟 은 거잖아.
하지만 비키는 분명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외척의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잘 대해 주라고 말한 것도, 비키와의 결혼에 대해 스트레 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 이 조언한 것도 선을 넘는 일이었을 까?
어쩌면 그가 고민하는 부분을 건 드린 건지도 몰랐다.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인 파를 헤치고 지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화가 난 것 같았 지만, 내가 구두를 신어서 그리 걸 음이 빠르지 못하다는 것을 배려해 줄 정도의 매너는 있는 모양인지 그 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돌아서 있었 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처 럼 팔을 다시 내밀어 왔다. 일단 파 트너로 연회에 와 있다는 정도의 자 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팔에 손을 얹자, 그는 황급히 걷느라 흐 트러진 내 옷매무새를 슬쩍 매만져
“이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군.”
“이 정도라니요……,”
“놀라는 건 상관없지만, 쓸데없는 연민은 이제 낭비라는 걸 알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아직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그의 덤덤한 얼 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노련한 육식 짐승처럼 보였다.
내가 놀란 것은 그가 누군가를 죽일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 니다. 아마 그런 계획 따위 그에게 는 수십 개는 있을 거다. 뿐만이겠 는가? 이 나라의 가장 밝은 곳에
선 그이지만 가장 더러운 것까지 모 두 그의 귀를 거쳐 간다. 게다가 항 시 목숨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그 가 아니던가. 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망설여 서는 안 되는 것이 그의 지위이고, 그의 현재 위치였다.
하지만 이전에는 이런 이야기, 내 게 한 적이 없었으니까. 항시 암살 에 시달린다는 것과, 황태후 세력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한다는 것 정도는 털어놓곤 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으니까.
완연히 황제의 사람이라는 거겠 지. 배지를 받은 순간부터.
나는 놀란 기색을 거두며 대답했 다.
“ 네.”
‘폐하’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나직이 중얼거렸 다.
“그보다 모처럼 여기까지 행차한 목표물이 이쪽에서 어정거리는 것 같은데.”
“목표물?”
“그래, 그 수상한 기운이 이쪽에
서 움직였는데
아
그냥 화가 나서 춤을 팽개치고 간 게 아니었나? 옆에 꼭 붙어 선 황제가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씩 웃곤 내가 손을 얹은 쪽의 팔을 내밀었다.
“이거 지나치게 효과가 좋은 것 같군.”
“제 손이요?”
“일단 붙어 있으면 그리 잘 감지 가 안 되는 것 같아. 아무래도 마법 을 무효화하는 게 이 정도로 작동하 는 것을 보면, 역시 안고 자는 게 제일일 것 같은데.”
농담인 걸까? 눈으로는 2층 난간
쪽을 훑으면서도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대던 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 다. 그러다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장 식된 천장 쪽에서 그의 시선이 딱 멎었다.
순식간이었다. 그가 “잠깐 다녀오 지.”하고 중얼거린 것과, 내 손을 정 중하게 떨어뜨려 놓은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진 것은. 나 는 종적을 놓쳐선 안 되는 그의 모 습이 사라진 것에 당황해서 그가 바 라보던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딴 따따, 딴따따, 느긋한 춤곡의 음악이 들려오는 가운데 당황해서 치맛자락 만 쥐고 있는데, 아주 조금 뒤 어디
선가 쿵!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아카데미 학생들과 손님들은 어디 선가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잠깐 들 었지만, 이내 제 앞에 있는 파트너 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신 경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갑자기 사 라진 황제가 있는 곳에서 난 소리가 틀림 없었다.
나는 치마를 꼭 쥐고 홀을 가득 메운 인파를 비집고 지나갔다. 어찌 나 사람이 많은지 반대쪽에 도달할 때는 이미 지쳐 있었다.
어디쯤이지?
소리가 난 방향을 짐작해 보려 애쓰며 홀의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갈 때쯤, 다시 한번 뭔가가 격 돌하는 소리가 음악 사이로 들려왔 다. 2층 복도에 붙은 방 중 하나였 다. 구두를 신고 뛰는 것은 쉽지 않 았지만, 혹여 폐하의 몸에 무슨 일 이라도 있을까 마음이 조급했다.
달칵.
나는 숨겨 들고 온 작은 단도를 소매 안에 안 보이게 쥐고 문을 살 며시 열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 온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방 안은 조 용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여덟 명의 남녀가
슬쩍 보였는데, 그들의 목깃에 비죽 이 드러난 황금색 독수리 장식만 보 아도 그들이 황제의 호위단 디펜더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내 쪽을 의식하 고 문을 더 열자, 황제의 모습도 보 였다. 어느샌가 가면을 벗어 던진 황제는 들어오라는 듯 턱짓을 해 보 였다.
“……괜찮으세요?”
“이 정도 사태로.”
그의 목소리는 퍽 안정되어 있었 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자 그의 발아래에 깔려 있는 사내가 보였다.
난 황제의 손짓대로 문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가면이 떨어진 내 얼굴 을 지나 손목에 닿았다. 급히 숨겼 다고 생각했는데, 내 손에 들린 단 도를 본 걸까? 그는 우스운 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 입꼬리를 당겼 다.
“그런 걸 가지고 온 줄은 몰랐는 데. 어디에 숨겨 뒀지?”
“알아서 어쩌시게요.”
“그걸로 뭘 어쩔 셈이었지?”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요.”
“앞으론 그런 무모한 시도는 그만 둬. 그런 어설픈 칼에 당할 만한 멍
청이라면 애초에 신경 쓸 필요도 없 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그 칼은 네 목숨만 위협할 뿐이니까.”
옳은 말이었다.
난 깨끗하게 인정하고 단도 위아 래를 바꿔 쥐곤 황제에게 넘겨 주었 다. 그는 그것으로 자연스럽게 발아 래에 있는 자의 등을 한차례 그었 다.
잘 벼려진 칼도 아닌데 그 간단 한 손짓으로 옷이 종이 썰듯 잘려 나갔다. 화염 덩어리를 만드는 것 같은 직관적인 기술보다 검의 절삭 력을 높인다든가 하는 응용 마법이 더 어렵고 계산이 많이 필요하기 마
련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숨 쉬 듯이 해내는 황제의 재능에 나도 모 르게 넋을 뺐다.
그렇게 대단한 자이기 때문에, 어 릴 때부터 출중한 마법 재능을 인정 받은 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마법을 남들 앞에서 선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됐겠지. 본인에겐 저주받은 재능일 지라도 실로 대단하긴 했다.
옷이 대번에 뜯겨 나간 남자의 얼굴은 눈에 익었다. 저번에 봤던 골디나 출신의 그 사람이었다. 내 방에 침입해 들어와서 ‘금기’ 어쩌 고 운운했던 그 사람.
황제는 그자를 밟고 있는 발에
꾹 힘을 주었다.
“기절한 척해도 소용없다.”
황제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 었지만, 볼이 짓이겨진 채로 바닥에 엎드린 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굳이 이렇게까지 숨어 들어와서 셀레스티아를 노리는 이유가 뭐지? 처음부터 이상하게 공을 들이더군.”
묵묵부답에 단도가 황제의 손안에 서 빙글 돌았다. 한 박자 느리게 작 은 한숨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대 답이 튀어나왔다.
“제국의 황제가 여기까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일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군.”
“그래서?”
“추궁한다고 술술 불 거라고 생각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 짧군.”
황제가 어딜 어떻게 밟았는지, 아 니면 마력을 운용했는지는 잘 모르 겠다. 바닥에 엎드린 사내의 입에서 차마 참지 못해 토하는 듯한 억눌린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커헉!”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오늘은…… 데려갈 셈은 아니었
소.”
그렇게까지 당하고도 계속해서 반 말이라니. 외모 때문에 마냥 골디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지도 모른다.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반말을 지껄이는 것은 그저 담이 크 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황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발 아래의 사내를 이리저리 발로 굴려 보다가 다시 한번 걷어찼다.
“알아듣게 말해.”
“대피시킬 생각……이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