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어떻게 하실래요?”
“ 음‘?”
“2층 복도에 있는 게 아래가 잘 보일 것 같은 구조인데, 올라가 있 을까요?”
“굳이 파티까지 와서 말인가?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리지 그래?”
사람들과 어울리라니. 안전에 대 한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아는 사람 을 찾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 는 저 멀리 테이블에 앉은 빈첸조를 쉽게 찾아내곤 속으로 한숨을 쉬었 다. 과연 사람들이 황제를 못 알아
볼 것인가 하는 고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시선이 쏠리는데.”
“그야 어쩔 수 없지요.”
“흐 애
더5구
황제의 눈이 나를 훑었다.
“하긴 붉은 머리칼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 정도 머리 길이라니. 아무리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한들 누군지 특정할 수 있 겠군.”
물론 나야 가려 봤자 소용없는 튀는 머리 색인 것은 사실이다. 하 지만 매일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는 사람을 누가 그렇게 빤히 보겠는가? 시선을 몰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황 제 본인이었다.
아직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햇 병아리 같은 남자애들에 비해서, 훤 칠한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 고 뿜어져 나오는 남성미라니 당연 히 시선이 가겠지. 게다가 가려 놓 아도 잘생긴 턱선이며 단단한 몸 선 은 또 어떻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난 황제의 외형은 누구의 시선이 든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히 황제를 칭찬해 주기 싫었던 나는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 쓱했다.
“하긴 제가 오늘 좀 아름답죠.”
황제는 나를 다시 빤히 바라보더 니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쳐 주는 사람 없이 허공에 던져진 농담은 그 대로 끝났다. 여기에는 당치도 않다 는 농담이 따라붙어야 되는데! 하여 간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는 남 다르다. 이래서 정치하는 놈들하곤 말싸움해서 이길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난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그래도 이렇게 평화로우니 다행 이네요. 그 습격자인지 뭔지 하는 분도 오늘은 그만두기로 하신 것 같 아요.”
“아니, 틀림없이 왔다.”
그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 로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내용을 착 각할 뻔했다.
“네……?”
“능력을 쓰지 않는 이상 누구인지 특정할 순 없겠지만, 여기에 있다는 것 정돈 느낄 수 있다. 틀림없이 그 때, 네 방에 들어왔던 그놈이다.”
“세상에……『
황궁 밖으로 황제를 끌고 나올 때부터 이미 나에겐 황제를 다시 잘 모셔다 놓아야 한다는 거대한 과제 가 부여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바짝 긴장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 는데, 옆에 선 아이들이 자리를 비 켜 주는 게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저렇게 회장을 휘젓고 다닐 만한 인 물은 그리 많지 않다.
난 저번에 내가 궁정 연회에서 입었던 것과 아주 흡사한 디자인의 붉은 드레스를 입은 비키를 보며 방 긋 웃어 주었다.
“비키, 안녕.”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 니, 내 옆에 선 파트너를 쏘아보기 까지 했다.
“주제에, 파트너는 구했네. 옷은 또 어디서 난 거야? 황궁 마차 타 고 다니더니, 황궁의 빈민 구제 계 획에 당첨이라도 됐나 보지?”
나는 내 옷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빈민 구제 계획이라고 하기엔 과한 데. 그녀도 안목이라는 게 있다면 내가 지금 착용하고 있는 귀걸이 한 쪽만 팔아도 꽤 거금이 되리라는 것 을 알 것이다.
“선물받았어.”
“그랬겠지. 선물…… 하. 이래서 천한 것들이 귀족과 섞이게 두면 안 되는 거야. 비열한 그것들이 살랑살 랑 꼬리를 쳐서 뭘 얻어 낼지 모르 거든.”
그 말에 나는 아무런 감상도 없 었는데, 황제는 좀 짜증이 난 것 같 았다. 하지만 황제가 입을 열면 일 이 커진다. 나는 그에게 제발 조용 히 있으라는 뜻으로 팔을 꽉 움켜쥐 었다.
비키가 황제의 신경을 그만 긁고 멀리멀리 떠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눈치도 없이 다시 입을 열었 다.
“너 조기 졸업 한다는 거 정말이 야‘?”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얄미웠는지 비키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돈을 쓴 게 틀림없어. 너 같은 게 어떻게 조기 졸업을 해?”
“나 같은 게 어떤 건데?”
“알면서 묻긴 뭘 물어?”
“모르니까 묻는 거 아냐. 방금은 내가 출신이 천하고 돈이 없어서 적 선을 받는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 는 조기 졸업을 돈으로 했다고 하니
까 그러지. 앞뒤가 맞아야 맞장구라 도 쳐 주지, 이래서야 내가 뭐라고 하겠어?”
“ 이게……!”
“돈으로 되는 거면 너도 하든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비키는 제 일행이 지켜보는 데서 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논리로 밀린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 반 을 가린 화려한 가면 아래로 비치는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주위 아이들이 절 지켜보 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간신히 심호 흡을 했다. 가면 사이로 비키의 눈
동자가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너, 서둘러 졸업한 걸 아쉬워하 게 될 거야.”
“ 내가?”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아카데미 밖 사회에서는 우리는 전혀 다른 신 분이라고. 황제와 결혼할 나한테 감 히 비벼 보지도 못할 거라고 한 말 기억해? 그러고 나면 너 같은 건 내 발을 핥게 해 달라고 빌게 될걸. 황궁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아아, 간신히 지금까지 가만히 참 게 했는데. 황제의 이름을 왜 들먹 인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개탄을
금치 못했다.
예상대로 그 말에는 더 이상 참 을 수 없었던지, 내 옆에 선 황제가 몸을 낮췄다. 비키는 저와 시선을 맞추는 그를 대체 뭐냐는 듯 쏘아보 다가 입을 딱 벌리고 굳었다. 같은 눈높이에서 그 적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목소리를 듣고도 황제임을 모 를 수는 없었다.
난 어쩐지 비키가 가엾게 느껴져 서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그대와 결혼하는 건,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닐 텐데.”
“폐, 폐하
하
비키의, 본래도 흰 피부가 창백하 게 질렸다. 황제는 벌어지는 그녀의 입 위에 손을 올리곤 다그쳤다.
“쉿. 여기에 내가 온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니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거라.”
비키는 황급히 고개가 끄덕였다.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벽에 칠하는 잿가루처럼 회색빛이 된 그녀는 뭐라고 인사하는지도 모 르게 중얼거리더니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인파 사이를 헤치며 후다닥 사라지는 그 뒷모습이 어쩐지 가엾 게 느껴졌다. 제가 사모하는 남자 앞에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보이고 싶었을 리 없을 터이리라.
그러게 평소에 마음을 좀 곱게 쓰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평소 아 카데미에 올 때마다 내게 들러붙던 애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눈에 보였다.
저들이 또 내게 들러붙었다간 쓸 데없는 데 시간을 쓰기 싫어하는 황 제 폐하께서 또 정체를 밝혀 댈 게 뻔한 일이다. 나는 얼른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 폐하.”
“ 음‘?”
“2층으로 가거나, 아무튼 자리를 좀 피하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요. 좀 걸어요, 폐하.”
“뭐지?”
“하하, 황실 마차를 타고 다닌 후 로 갑자기 인기가 폭발해서요. 춤 신청이라도 받으면 거절하기도 귀찮 고.”
춤 이야기에 그의 입꼬리가 재밌 다는 듯 말려 올라갔다.
“저번에 보니까 춤 잘 추던데.”
그때가 처음으로 ‘부르크 제국의 교양 있는 귀족의 춤’을 춘 거였다. 그게 어떻게 춤을 잘 춘 거냐고. 황
제가 휘두르는 대로 움직인 거였지. 나름대로 재밌긴 했지만, 얼렁뚱땅 모두의 앞에서 춘 춤은 조금쯤 부끄 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을 놀리는 그가 어이없어 슬쩍 노려보 았지만, 그는 내 기분을 신경도 쓰 지 않으며 댄스 플로어 쪽으로 시선 을 돌리고 있었다.
아니, 그래서 지금 춤을 추자고? 습격자를 찾아내겠다는 목적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그저 늘 생각인 거 아냐, 이 황제? 처음부터 여기에 습격자가 나타난다는 것부터 가정에 불과한 거였다- 실제로 나타난 게 이상한 거지. 놀 생각만으로 처음부
터 온 게 틀림없다.
아카데미 학생으로 구성된 연주단 은 흥겨운 왈츠를 연이어 연주하고 있었다. 황궁 연회의 웅장한 관현악 기 연주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일지 몰라도, 아카데미의 자랑인 현악 사 중주는 썩 듣기 좋았다.
그의 말을 무시하려 애쓰는 사이 에 왁자지껄한 춤곡은 느린 왈츠로 바뀌 었다.
황제는 제 머리 색과 아주 잘 어 울리는 검은 가면을 슬쩍 고쳐 쓰더 니, 몸을 돌려 한 발자국 떨어져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싱글벙글 웃는 웃음이 묘하게 기 분 나빠서 손을 바로 잡는 대신 불 평부터 했다.
“위험한 사람도 여기 와 있다면서 요?”
“어차피 그쪽에서 행동하기 전엔 상대를 특정할 수 없는 거고. 모처 럼 여기까지 왔는데, 내 비서가 노 는 걸 전폭 지원해 줘야 하지 않겠 나.”
아니, 누가 봐도 본인이 놀 생각 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8 반에 있을 때 나를 무시했던 무리부
터 시작해서, 아직 아카데미를 한참 은 더 다녀야 하는 애들이 우르르 내 가까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람을 신분으로 무시하고 천대하다 가 이제 와서 잘 보이려고 하는 애 들을 상대하느니, 귀찮아도 춤을 추 고 말지.
결국 아카데미 파티에서 황제의 손을 쥐고 플로어로 나간다는 기상 천외한 경험을 하게 된 셈이다.
댄스 플로어는 황궁에서 겪었던 그것과는 썩 분위기가 달랐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아 카데미 학생들은 저마다 평소에 보 이지 못했던 모습으로 서서 제 짝을
찾고 있었다. 평소에 호감이 있던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장이기 마련인 파티장이라, 부드럽게 바뀐 선율에 맞춰서 느린 줌을 추는 이들 의 시선에선 꿀이 떨어졌다.
우리는 남들이 하는 것처럼 서로 에게서 물러서서 격의 있는 인사를 하고 다시 다가서서 몸을 맞대고 섰 다. 그는 정중하게 내 등 위에 손을 올렸고, 부드러운 현악 사중주에 맞 춰 춤이 시작되었다.
“오, 이제 외운 모양이군.”
“누구 덕분에요.”
나는 황제의 발을 밟고서야 간신
히 움직였던 그 치욕스러운 과거를 딛고 일어난 당당한 부하 직원이다. 이제는 춤 정도로 당황한 모습을 보 이지 않는다.
춤의 흐름을 외워서 황제의 동작 에 맞춰 가볍게 움직일 수 있게 되 고 나자, 그가 얼마나 물 흐르듯 부 드럽게 사람을 리드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긴 어릴 때부터 사교춤이 라면 얼마나 많이 춰 봤겠어.
그와 빙글빙글 돌며 플로어를 누 비는 와중에, 자꾸 바뀌는 시야에 빈첸조가 비쳤다 사라졌다. 그는 명 백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황제 를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본 적이 있기도 하고. 파 트너로 청했을 때 거절한 걸 생각하 면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황제 폐하와 함께 있는 걸 보면 이해해 주겠지.
다른 곳에 정신을 팔다가 언뜻 박자를 놓쳤을까?
황제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을 뻔 한 나는 그가 몸을 잡아 준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어딜 자꾸 보는 거지?”
“네……?”
한 발자국 물러서서 올려다본 황 제는 잘생긴 얼굴에 조소를 매달고
있었다. 재밌다는 듯한 얼굴로 보이 기도 했고, 짜증 난 것처럼 보이기 도 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