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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45화 (45/103)

- 45화

그의 말을 듣는 내내 뱀이 피부 위를 기어가는 듯한 기분 나쁜 기색 이 느껴졌다. 허나 직급과 신분이 깡패인 사회라 내가 할 수 있는 것 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 영광입니다.”

도서관 입구를 지나서도 계속 책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는 내게 책 추 천을 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난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책 취향이 잘 맞는 것 때문이 아 니었다. 노예 출신 비서라는 것으로 하루 종일 곱지 못한 시선을 받고 다니던 내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

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밌 어서. 그리고 그게 다른 사람도 아 닌 황태후의 아들이라는 게 퍽 묘하 게 느껴져서이다.

다른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고작 내게 허튼수작 을 하려고 도서관까지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기꺼이 재미있게 탐독했던 책들 중 몇 권을 추천해 주었다. 막 시는 독서를 주제로 대화하기에는 꽤 괜찮은 상대였다. 아는 책도 많 았고, 관심사의 폭도 넓었다.

“정말 읽은 책이 많군.”

“그러는 막시님께서도 견식이 넓 으십니다. 개중 몇 개는 제국의 서 적도 아닌데요.”

“그러는 자네야말로 제국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들었는데, 제국의 책을 빠삭하게 아는군.”

꽤 오래 대화하는 사이에, 경계를 풀지는 않았지만 조금쯤 막시를 이 해해 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도서관 입구에서 헤어졌 다.

“다음에 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

“아, 네. 저도요.”

“또 봐, 셀레스티아.”

“네, 황자님.”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 했다.

뭐가 이상하다고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이상했다.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 안 되는데…… 황제는 황 태후를 그렇게 증오하는 것에 비해 막시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고 해서 사람을 덜컥 믿기도 좀 그

렇고……소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근 거는 한없이 미약했다. 소문은 일단 좋은 축에 속했다. 평민들 사이의 평판도 좋았고. 그리고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묘한 편 견이 있기도 하고.

하지만 황태후가 황제를 죽이려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 판이 아닌 가.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에 앉히 려는 게 바로 막시, 그인 거다.

난 괜한 생각을 접고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펼쳤다. 제국의 국경 이 넓다 보니 맞닿아 있는 나라의 수도 지나치게 많았고, 익혀야 하는

외국어도 많았다. 아니, 내가 비서지 통역관이냐고.

이 정도면 요구되는 업무량이 진 짜 너무한 거다.

나는 속으로 불평불만을 쏟아 내 다 말고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꾸 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책을 읽고 자야 하는데. 조금만 더.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침대에 누 워 있었다. 캐노피를 올려다보며 몽 롱한 정신으로 어떻게 침대까지 왔 는지 더듬어 상기해 보려고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 각해도 걸어온 기억이 없는데?

잠결의 일이라서 기억이 나지 않 는 게 틀림없었다. 머리 좋은 것 하 나를 유일한 무기로 삼고 있는데 이 렇게까지 정신을 빼놓고 있어서야 큰일이다.

찬물로 세수를 하며 잠깐 반성에 잠겨 있던 나는 오늘의 일정표를 보 고 정신이 들었다. 오늘이 바로 그 아카데미의 연말 파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황제를 황궁 밖으로 몰래 빼돌려야 하는 중대한 일정이 있는 날이니만큼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 놓고 일단 얼굴부터 치장했다. 크림 을 바른 다음 분을 가볍게 올리고, 입술에는 붉은 나비 가루를 발랐다.

완성된 연말 파티 드레스는 어제 도착했다. 그것이 담긴 박스를 열자, 아이보리색 드레스가 수많은 종이꽃 들 사이에 구겨지지 않도록 살포시 놓여 있었다.

다시 경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조금 많이 파인 것 같고 허리가 너무 딱 붙는 것 같았지만, 등과 팔뚝은 제대로 가리고 있어서 내 몸에 새겨진 문신들이 밖으로 내

비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등에 얼기설기 엮인 끈을 혼자 묶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이건 루아나에게 도와 달라고 해야 겠다 싶던 차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옷 입는 걸 도와 달라고 미리 얘기해 두었으니 곧 도착할 때가 됐 다.

시계를 흘끗 보는데 때를 맞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루아나는 시간 약속은 칼같이 지킨 다니까.

또또또

―I ―1 ―1 으

“아, 네. 나가요!”

서둘러 문을 열자, 정면에 얼굴이 아니라 가슴팍이 보였다. 루아나가 아닌 것에 놀랐지만 이제는 이런 상 황도 퍽 익숙했다. 뒤로 한 발짝 물 러선 나는 덜 여민 옷 때문에 혹시 라도 옷이 벌어질까 봐 가슴을 손으 로 누르며 다소곳이 예를 차렸다.

고개를 들고 본 그는 퍽 멋들어 진 차림을 하고 있었다. 허리가 잘 록하게 들어간 검은색 슈트는 어깨 가 넓은 체형인 그에게 썩 잘 어울 렸다. 게다가 금색과 흰색 자수가 몸 선을 따라 들어가서 몸매를 한결 날렵하게 보이게 했다. 손에 들고 있는 가면까지 정말 완벽했다.

늘 잘난 옷차림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들이 빠진, 비교적 평범한 착장인 게 재 밌었다. 남들과 비슷한 옷을 입으니 그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게 더 돋보 여 보인다는 게 우스운 점이다.

“에스코트하러 오신 것은 감사합 니다만, 제가 찾아가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닫 고 들어온 황제는 나를 물끄러미 바 라보기만 했다. 그 기묘한 침묵의 끝에, 그는 내 머리 위를 턱짓했다.

“수건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

인가?”

“아, 이건……?

“뒤돌아 봐.”

“ 네?”

그가 손가락을 빙그르르 돌리는 모양에 따라서 나는 별도리 없이 뒤 돌아섰다. 그가 내 수건을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창문도 닫혀 있는데 커튼이 일렁였 다. 시원한 감각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고, 이내 머리가 가뿐해 졌다.

깜짝 놀라 내 머리를 만지자, 축 축해야 할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

로 사르르 흘러내렸다.

“세상에……

“이걸로 생긴 부작용은 기꺼이 치 료해 주겠지.”

“ 폐하……,”

내가 기막혀하는 소리가 재밌는지 그가 작게 웃었다.

“기왕 하신 김에 등 쪽 끈도 좀 묶어 주세요.”

“음…… 이제 비서가 황제를 시켜 먹는 시대가 온 건가.”

“싫으면 다른 파트너와 함께 갈

거예요.”

“어이가 없군.”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내 드 레스에 달린 끈을 쥐었다.

“ 됐나?”

뭔가 얼기설기 움직이는 느낌이 들더니 그가 중얼거리며 물러섰다. 엉성한 느낌은 나지만 그래도 적당 히 묶인 것 같아서 나는 드레스를 움켜쥐고 있는 손을 슬쩍 놓았다.

“ 으악.”

다행히도 가슴 절반이 드러난 시 점에서 나는 옷을 붙들 수 있었다. 하마터면 옷이 아래로 흘러내릴 뻔 하지 않았나.

황제 폐하는 여자라면 이미 진력 이 날 만큼 만났을 얼굴을 하고 있 으면서도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묶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남들은 절대 하 지 못할 머리카락 말리기 기술은 있 으면서, 왜 이런 건 못하는지 모를 일이다. 신은 아무래도 조금쯤 공평 한가 보다.

내가 몸을 홱 돌려 그를 쏘아보 자,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에 쥐었던 끈을 놓곤 나를 마주했다.

“별 대수롭지 않은 것 가지고 난 리군.”

“대수롭지 않다뇨?”

“애초에 재주가 없는 사람을 부려 먹으려 한 쪽 잘못이 아닌가.”

“하……;

때마침 루아나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침부터 또 한바탕할 참이 었다.

루아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끔한 차림이 된 나는 평소에 아카데미를 갈 때 타는 마차에 올라탔다.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푹신 한 의자에 앉아 있자, 기분이 이상

했다. 비서가 되었다는 것도, 이런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파티의 파트너가 황제라는 것도 모 두. 물론 위장에 지나지 않았지 만……스

마차가 덜컹거리며 꽤 오래 달려, 드넓은 황궁 정원을 반쯤 빠져나갈 때쯤엔 황제가 어떻게 합류하겠다는 걸까, 뒤늦은 의문이 들었다. 몰래 합류하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대 체 어떻게?

똑똑.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머 리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바닥에서 나는 소리를 잘못 들었 나 싶었지만, 그다음엔 착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고개를 들고 마차 천장을 살펴봤 더니, 귀부인들이 바람을 쐴 때 쓰 는 천장 구멍이 보였다. 난 한참 헤 매며 그 작은 문의 손잡이를 찾았 다. 이런 고급 마차를 밖에서 구경 할 줄이나 알았지, 직접 타보는 일 에는 익숙하지 않은 터였다.

문을 열자 황제가 거기에 있었다. 장난스러운 얼굴이 잠깐 비치고, 물 러서라는 듯 그의 손이 흔들흔들 움 직였다.

“ 폐하!”

마차 천장 위에서 합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체통이라곤 없는 그의 행보에 할 말이 많아졌지만 입을 꾹 닫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황제는 마차 안으로 훌쩍 뛰어내 렸다. 그의 맞춤으로 제작된 마차인 데도 워낙 장신인 그는 불편한 듯 몸을 굽히며 내 옆으로 다가와 털썩 앉았다.

“다시 봐도 예쁘군.”

아니, 지금 칭찬할 때냐고.

기가 막혀서 그를 흘겨보곤 옆자 리에 앉았다.

남의 눈에 안 띄게 합류하겠다고 는 했지만, 허공을 날아서 마차 지 붕으로 들어올 줄이야.

“이게 어디가 몰래 합류하는 거예 요?”

“뭐 어때.”

“황성 내에서 마법을 쓰는 건 불 법 아니에요?”

황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황성 내에서 마법을 못 쓰는 것 은 아무튼 황제를 제약하기 위한 것 은 아니기 때문이니 괜찮지 않겠 나.”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왜, 오늘 황궁을 비운다고 홍보를 하지 그러셨나. 진짜, 제국의 황제쯤 되면 행동에 거침이 없을 법도 하긴 하지만 이분은 이따금 정도가 심하 다.

난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 다.

마차에서 내리자 아카데미로 들어 서는 입구에서부터 쫙 깔린 경비원 들이 눈에 띄었다. 평소보다 다섯 배는 많아 보이는 경비원들은 짝을

지어 순찰을 돌기도 했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손님들을 관찰하기도 했 다.

생각보다 훨씬 더 삼엄한 분위기 에 놀라면서도 조금쯤 마음이 놓였 다.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아카데 미의 외부 개방일인 만큼 경비에도 특별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제국 귀족의 과반수 이상의 자제들이 아 카데미에 다닌다. 그러니 특히 더 많은 치안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있 었겠지.

나는 긴 줄을 보고 당연히 다른 길을 찾는 황제를 가만히 붙들고 서

있느라 애를 먹었다. 태어나서 지금 까지 단 한 번도 ‘순서를 기다려’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었을 그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게 미안하긴 했지 만, 그러게 누가 파티에 따라오랬냐 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 고 나를 쳐다보는 황제에게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 주기를 몇 번째 반복하던 중, 간신히 우리 의 입장 차례가 돌아왔다.

“입장권을 보여 주십시오.”

“여기요.”

평화롭기를 바라긴 했지만 계속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긴장 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막상 정말 경쾌한 음악으로 들썩이는 연말 파 티 현장에 도착하자, 긴장해 있던 어깨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내 어 깨를 가볍게 감싸고 있던 황제는 그 것을 느꼈는지 작게 웃었다.

별다른 안내도 없이 입장하는 것 이 색다른지 ‘다른 사람들의 뒤를 이어’ 입장하는 것을 체험하는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장내를 둘러보았 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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