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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44화 (44/103)

- 44화

원래 이 방이 서가인데, 내게 쓰 라고 준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놀라 지는 않았을 거다. 이 방이 본디 텅 텅 비어 있는 응접실이라는 것을 알 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숨이 막 히게 감동스러운 거다.

가죽 장정의 책등을 손으로 가만 히 쓸어 보았다. 음각으로 새겨진 책 제목을 손으로 만지는 감촉이 기 분 좋았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 리면 금세 종이 냄새로 가득 찰 것 같을 정도로 많은 책이었다.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 만큼 많은 양의 책이다.

정치, 경제, 문화, 역사에 관련된 것부터 부르크 제국의 민담이나 설 화, 소설 같은 책들도 있었고, 한쪽 끝에는 골디나의 마법 서적과 이야 기책들도 꽂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것들 중 하나를 빼서 손에 쥐었다. 골디나의 뒷골목 에서 읽었던 눈에 익은 책이었다. 돈을 내고 책을 산다는 것은 생각지 도 못할 만큼 뼈 빠지게 가난한 시 절을 살아온 나는, 항상 헌책방에서 책을 급하게 삼키듯 읽곤 했다. 이 런 것을 내 방에 두게 될 줄은 몰 랐다.

“마음에 드나?”

“으악!”

무심코 펼쳐 든 책을 나도 모르 게 읽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질겁한 내가 떨어트린 책을 바로 뒤에서 불 쑥 튀어나온 손이 낚아챘다. 긴 손 가락이 참으로 보기 좋은 큼지막한 손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나는 서 가에 다시 책을 꽂아 넣는 황제의 등이 뒤통수에 닿아 오는 것을 느끼 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깜짝 놀랐잖아요.”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뒤 로 물러나 섰고, 나는 몸을 돌려 그

를 마주 보았다.

“난 분명히 노크했는데.”

“들리게 하셔야죠.”

“노크를 하면 들어야 말이지.”

아니, 내가 그렇게 넋을 놓고 있 었나?

난 조금 창피해져서 입을 비쭉 내밀었지만, 시야에 가득한 책등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 져서 그만 볼을 감쌌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군.”

“그거야.

까. 하지만

누가 싫어하겠습니 너무 과분합니다.”

내 얼굴을 본 그가 픽 웃었다.

“너 좋으라고 갖다 놓은 줄 아는 건 아니겠지?”

“ 네‘?”

“내가 뭐든 시키면 냉큼 조사해 오라고 갖다 놓은 거다. 난 무능한 부하를 두는 취미는 없거든.”

그래. 그냥 나 좋으라고 서가를 꾸며 준 건 아닐 거다. 하지만 과분 한 건 사실이다. 비서라는 직종, 꽤 좋은 것 같다.

난 평생직장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기쁜 표정을 최대한 감추려 애쓰 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폐하?”

“연말 파티 의상은 어떻게 돼 가 나 해서.”

“아카데미 연말 파티, 정말 직접 가셔도 괜찮으세요?”

“내가 가는 게 마뜩잖나 보군.”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정말이지, 그렇게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안전하게 처신하라고 당부했던 자가 맞는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안전 의 위협을 받는 당사자가 이렇게 뻔 뻔하게 아카데미 파티 같은 곳에 참 석하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가면무도회에 경호원을 어떻게 들이시려고요?”

“내 사람들은 기척을 내지도, 눈 에 보이지도 않으니 염려 없다.”

“아카데미는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는 거 아시잖아요.”

황제는 실소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 마법은 누가 걸었다고 생각하 는 거지?”

그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서다 말고 난 입을 가렸다.

“설마……?

“그래. 내가 보살피는 아카데미라

는 말이 그냥 수식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군요.”

“그러면 이제 불만 없겠지?”

“하오나, 폐하.”

그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의회에 다녀온 날은 반대라는 반 대로 귀청이 터질 지경이라서 말이 다. 내 비서에게까지 ‘하오나’ 같은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하오나……,”

나는 나도 모르게 대꾸하다가 입 을 꾹 다물었다.

“정말 말을 안 듣는군.”

“송구합니 다.”

소파에 늘어지게 몸을 묻은 황제 가 제 몸에 작은 소파가 못마땅한지 몸을 뒤척였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 는 것 같은데, 왜 방으로 안 돌아가 고 저러고 있지? 오늘 일정은 이걸 로 끝 아닌가? 등이 불편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의 시선이 내 얼굴을 지나 내가 입 고 있는 옷과 배지를 슬쩍 훑었다.

“저번에 맞췄던 드레스는 잘 만들 어지고 있나? 연말 파티, 참석하려 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네. 세레나 님께서-… 레나가 도와주고 있어요.”

아니, 세

“그것 말고 다른 것들은, 잘 맞 나?”

다른 거라니, 무슨 말이지?

“……네?”

“옷장은 아직 확인해 보지 않은 모양이군.”

서가에 넋이 팔려서 옆에 딸린 별실은 확인해 보지 않았던 나는 그 의 말을 듣고서야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전에 쓰던 방에서 옮 겨 온 게 분명한, 고풍스럽고 거대 한 캐노피가 달린 침대는 이제 격이

맞는 다른 가구들과 잘 어울렸다.

아름다운 무늬가 조각된 서랍장들이 놓여 있었고, 큼직한 옷장이 서 있었다.

화장대와

한쪽에는

양팔을 가로로 벌려도 다 닿지 않을 만큼 거대한 옷장을 열자, 풀 을 먹여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과 일 상복으로 입기 좋은 가벼운 바지와 드레스들이 주르륵 걸려 있었다.

“아……,”

나는 그제야 연말 파티 의복을 하나 맞추는 데 왜 세레나까지 나섰 는지, 의문의 답을 찾아낼 수 있었 다. 비서로 일할 때 필요한 제복과, 그를 수행하는 동안 입을 다른 의복

들이 필요할 테니까.

바로 옆에서 황제를 수행하는 게 일인 이상, 그의 말대로 내 의복이 그를 표상하기도 한다. 이전에 가지 고 있는 옷들로는 턱도 없을 테니 까.

나는 정말 황제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는 실감을 하며 황실 제복을 만져 보았다.

매일 보던 비서님의 의복과 꼭 같은 그것으로 환복한 뒤, 다시 배 지를 잘 달았다. 거울에 비친 나는 어쩐지 낯설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 것까지 포함해서 이 상황이 뿌듯하 게 기분 좋았다.

밖으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복도 잘 어울리는군.”

“그래요?”

“입 찢어지겠는데.”

내가 그렇게까지 웃었나? 손가락 으로 꾹 눌러 입꼬리를 내리는데, 그가 따라오라는 듯 내게 턱짓했다.

“그럼 오늘 일과를 소화해 볼까?”

“아, 오늘 일과는 이것으로 모두 끝난 게 아닌가요?”

“이제 시작이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종종 뜯어

말려야 할 때가 있다고 했던 전임 비서님의 말이 귓가에서 쟁쟁 울렸 다.

황제가 항상 침상에서 느긋하게 있는 모습만 봐 왔던 나는 그가 얼 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 절반도 몰 랐던 거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의 의견을 설득하고 명령하고, 조사 자료를 보고받고, 국경의 근황 을 확인하는 것으로 남은 하루가 모 두 지났다.

매일 황제의 뒤를 수행하던 비서 가 바뀐 것은 빠르게 소문이 돌았는 지, 어디를 가도 주목을 사야 했다.

나는 황제파와 황태후파 어느 쪽 진 영에게도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한 채 로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날을 마 무리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채로 일주일이 지났다. 비서로서 내가 제대로 일을 해내고 있다는 확신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황제는 과중한 업무를 놓을 생각이 없었고, 나는 아카데미에서 요구받는 것과 전혀 다른 요구들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 지쳐 가고 있 었다.

새로운 외국어를 추가로 익히느라 밤잠을 줄여야 했고, 황제의 몸을 간혹 돌보아 주기도 했으며, 필요한 자료를 찾아 주기도 했고, 주위 귀 족들에게 대신 인사를 전하기도 했 다.

일과를 겨우겨우 마치고 경호 기 사님들께 인사하고 황제의 방에서 나왔다. 절로 하품이 났다. 이러다간 복도를 걷다가 꾸벅꾸벅 졸 판이었 다.

“……너무 피곤해.”

내 방에 없는 몇 가지 책을 가지 러 도서관을 향해 가다가 나는 그만

깜박 눈을 느리게 떴던지 앞에 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쳐다보니 황태후의 측 근인 고문관 부르탱이었다.

“뭐야,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죄송합니다.”

내가 재차 사과했지만, 그것은 그 의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가 욕이라도 쏟아 내려는 듯 나를 신경질적으로 쏘아보는데 부르탱과 나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적당히 하지, 고문관.”

“막시님……,”

난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사 내는 과연, 막시였다. 황태후의 아 들. 황제의 배다른 동생 막시.

저번에는 아주 잠깐 봤을 뿐이라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 대외적 으로는 황태후 마마와는 달리 아주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연회 때 보았을 때는 비 교적 차가운 느낌이었기 때문에 나 를 감싸 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사이에 막시가 말을 이었다.

“오죽 피곤하면 그러겠나, 자네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하지만 노예 출신 주제에……,”

“그런 말 하지 말게. 아카데미에 서 다섯 번째로 조기 졸업을 했다질 않아? 그러는 자네는 유반에라도 들 어 본 적 있어? 0칸에서 벗어난 적 도 없는 자네가 자격 논란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막시님!”

부르탱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창피한지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순식간에 인간 의 안색이 변할 수 있는 줄은 몰랐

다.

황태후파의 인물이라서 막시에게 는 지고 들어가는 건지, 그는 더 이 상 반박하지 않고 원래 가던 길을 바삐 가 버렸다.

“감사합니다, 막시님.”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보다 도 서관 가는 길인 것 같은데 맞나?”

“ 네.”

“나도 같이 가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독서 친구가 없어 심심했는 데.”

그렇지 않아도, 라니.

좋든 싫든 황족이 같이 걸을 것 을 권유하는데 내게 선택권이 있을 리 없었다. 그와 나란히 걷는 동안 그는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늘 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체 무 슨 의도인가를 생각하느라 바빴지 만,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자꾸만 내게 어떤 책을 읽 었냐고 물어보았다. 집요한 질문에 나는 아주 흥미롭게 읽은 책에 대해 몇 마디를 거들었다. 그러자 그는 또 다른 책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또 그것을 재밌게 읽었다고 말했다.

“셀레스티아라고 했나?”

“ 네.”

“형님의 비서라고?”

“네.”

“경계하는 건 그만두지. 내가 자 네를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뭔가 유쾌한 일이라도 있는 지 제 허벅지를 두드려 대며 웃었 다. 그러곤 어쩐지 뱀 같은 시선으 로 사람을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솔직한 인재라니, 과 연 형님이 가까이 두실 만큼 재미가 있군.”

“절 재미로 가까이 두시는 것은 아닙 니 다.”

“글쎄. 아무튼 나는 형님보다 미 력한 존재니까 말이야. 굳이 경계해 봤자 피차 손해라네. 그리고 난 형 님을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존경하 지.”

난 막시의 은은한 미소 너머에 어떤 생각이 숨겨져 있는지 넘겨짚 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황족들의 표정이란 죄다 가식적인 가면처럼 굳어 있기 마련이라 짐작할 빌미조 차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난 형님의 것이라면 모두

좋아 보이네.”

“……네?”

“그러니 자네에게도 관심이 아주 많아. 종종 책 얘기를 해 주면 좋겠 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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