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황제 폐하께서는 의복을 입지 않 은 상태로 다른 이를 보는 것을 극 도로 꺼리시니 설령 시종이나 시녀 가 몸 시중을 드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 두시게.”
“ 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만 일 정을 조율하면 모든 식사 시간마다 외부 인사와 함께 식사하시게 되는 데, 너무 피로하시지 않게 가끔은 편하게 식사하실 수 있게 해 드리 게.”
“ 네.”
“황제의 곁을 모시게 되면 당연히
수없이 많은 청탁에 시달리게 되네. 하지만 그것이 자네가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부탁을 하고, 재물을 찔러 주는 게 아님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네. 한 번이라도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것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임을 명심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사람 면면을 외우는 것을 귀찮아 하실 때가 있어서, 연회에 참석하실 때 인사를 받고도 모른 척하실 때가 있으시다네. 그럴 때 곁에서 이름과 작위를 알려 드리면 좋네. 저번에 보니까 그런 건 내가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잘할 것 같아 안심이네 만……
저번에?
연회에 일손이 부족해서 도울 때 를 말하는 걸까?
나는 그때의 이력이 비서 일에 도움 된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여 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딱히 하는 일이 부끄럽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황태후가 이상한 소리를 해 댈 정도로 직위가 급상승하긴 했다. 정말로.
비서님은 그 뒤로도 몇 가지나 되는 사항을 신신당부하더니, 밭은
목에 침을 삼켰다. 기침을 연속해서 꽤 오래 하다가, 겨우 진정한 그는 또 한 번 시계를 확인하곤 몸을 일 으켰다.
의회에 참석할 시간이다.
난 괜히 긴장해서 그를 따라 몸 을 일으켰다.
지친 모습으로도 금세 옷매무새를 말끔하게 다듬는 모습이 한두 번 폐 하를 수행해 본 모습이 아니다. 나 는 그를 따라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 을 한번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그 는 가슴에 달린 배지를 떼어 내었 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 을 보곤 비서님은 빙긋이 웃었다.
“처음 의회에 들어가면 많이 시끄 러울 테지만 너무 놀라진 말게.”
무슨 뜻이지?
하지만 나는 긴장한 채로 되묻기 를 깜박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황제와 단둘이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뿐 아니라, 비서 대행으로 몇 번 그를 수행한 적도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황궁의 일들을 조금쯤
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 르겠다. 하지만 막상 의회니 뭐니 하는 것에 참석할 생각을 하니 눈앞 이 깜깜했다.
나는 밖에서만 본 적 있는 의회 의 거대한 홀에 들어서면서 크게 숨 을 들이마셨다. 붉은 주단이 여러 방향으로 깔려 있는 높은 천장의 홀 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입구에 굳어 서 있는 나를 보고 비서님이 어깨를 툭 때렸다.
“긴장 풀어. 여긴 다 어중이떠중 이들밖에 없으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장엄한 홀에 길쭉하고 거대한 테이블이 몇 개 놓 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둘러앉아 있는 자들이 고래고래 떠 드는 고함 소리들이 귀를 쟁쟁 울려 댔다. 왜 여기에 오면 시끄러울 거 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장 상석, 보라색과 금색으로 치 장된 자리는 황제의 자리임이 틀림 없었고, 그의 좌우로 나뉘어 있는 테이블에는 각자 다른 세력이 나뉘 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티아헤브 공작가의 사람도 보였고, 또 다른 테이블에는 황태후와 종종 함께 있 는 것을 보았던 공작이며 후작, 백
작들이 앉아 있었다.
확실히 책으로 익히는 것과 눈으 로 실제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 다.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부르크 제국에서는 황제와 의회의 대립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 게까지 의견이 난립하고 질서를 지 킬 줄 모르는 이들이 모인 회의장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뭐, 거의 시장 바닥이나 다름없다 싶을 정도였다.
“자자, 정숙해 주세요!”
사회를 돕는 듯한 시종이 몇 번 이고 고함을 질렀지만, 고함을 질러 가며 서로의 의견을 비난하고 테이
블을 두드려 대는 자들에게 그런 소 리가 들릴 리 없었다. 핏대를 세우 고 목청을 돋우고 난리도 아니었다.
시종은 포기한 듯 입을 꾹 다물 고 있다가 앞쪽 문이 열리자,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듭십니다!”
그 말에 마법처럼 소란이 가라앉 았다. 서로를 못마땅하게 노려본 채 인 것은 한결같았지만, 다들 간신히 의자에서 궁둥이를 떼고 일어났다.
모두를 천천히 돌아본 황제는 고 개를 끄덕여 착석해도 좋다는 신호 를 하고 가장 중앙에 있는 자리에
가 앉았다. 시종들이 부지런히 날라 준 안건들을 하나하나 휙휙 넘기던 그의 시선이 어느 종이에서 멎었다.
“그렇군. 오늘 새로운 인사 발령 이 있다.”
그렇게 말한 황제의 시선이, 잘 보이지 않는 별개의 테이블에 앉은 내 쪽을 향했고, 나는 등을 떠밀리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개하지. 내 새로운 비서다.”
황태후 진영 측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길게 묶은 장발이 인상적인, 미남
자인 고문관 부르탱은 황태후 최측 근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비서 후보 셀레스티아…… 출신 가문이 없는 것을 보니 평민인가?”
황제는 내 쪽을 바라봤다. 내가 대답하길 바라는 걸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 노예라는 소문이 있던 데……?”
부르탱의 말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지위가 높으 신 작자들도 말이 많은 건 어쩔 수 가 없다.
이제 황태후 진영 쪽 사람들뿐만 아니라 황제 아래의 사람들의 시선 도 그리 썩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궁내부 장관, 의상부장 등은 이미 얼굴이 익은 사이였다. 그래서 그들 은 노예로 들어온 내가 황제의 비서 가 된다는 것이 어안이 벙벙한 눈치 긴 했지만 반대하는 얼굴은 아니었 다. 하지만 황제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위치인 고문관과 재상 및 장관들은 내 얼굴을 보고 아카데미 의 수석으로 연회장에서 본 적이 있 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처음엔 고개 를 끄덕였지만, 내 출신을 들은 뒤 로는 이내 표정이 굳었다. 내가 황
제의 약점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걸 까.
나는 쓰게 웃었다. 황제가 여전히 여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하나가 위안이 될 뿐이었다.
천천히 심호흡하고 대답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군. 어느 나라에서 왔지?”
“골디나입니다.”
외견으로 보아 뻔히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질문하는 태도가 뻔했다.
“어느 아카데미를 수료했지?”
아마 수료하지 못했다는 대답이나
타국 출신의 아카데미를 수료했다는 대답을 기대한 모양이었다. 난 부르 탱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똑바로 마 주 보아 주며 대답했다.
“부르크 제국 중앙 아카데미의 조 기 졸업을 오늘부로 승인받았습니 다.”
부르탱은 거기까지 조사해 둘 여 력은 없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주 위의 시선이 조금 호의적으로 돌변 하는 게 느껴졌다.
하나 워낙 ‘노예 출신’이라는 것 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의회 안의 분위기는 그리 밝진 못했다.
그때, 점점 더 크게 술렁이는 목 소리들을 뚫고 익숙하고 또렷한 목 소리가 나를 불렀다.
“가까이 오라.”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 허리를 폈다. 황제 는 매일 있는 일이라는 듯, 수십 개 의 눈동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고 의자에 비딱 하게 기대앉아 내게 손짓하고 있었 다.
나는 두 개의 거대한 테이블 사 이를 가로지르는 긴 길을 천천히 걸 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황제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황제가 하사할 배지 를 꺼내어 달아 주고 있다고 여길 테지만, 실은 내가 이미 보관하고 있던 배지를 건네준 것이다.
품속에 항상 품어만 왔던 배지다. 직위도 신분도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던 내게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었 던, 내가 있을 곳을 알려 주었던 배 지다. 이게 아니었다면 내가 그토록 노력할 수 있었을까? 조기 졸업이라 는 것을 하겠다고 그토록 애를 쓰고 달려올 수 있었을까?
손바닥 위에서 은빛 사자 모양의 배지를 뒤집자, 절반은 노랑, 나머지
는 보라색으로 칠해진 쪽이 드러났 다. 그가 손수 그것을 달아 주었다. 배지가 내 가슴에서 반짝 빛났다. 떠받든 손 모양은 비서를 뜻하는 것.
드디어, 정식으로 그를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를 섬기겠느냐?”
나를 보며 웃는 그의 적안은 재 밌는 것을 보듯 빛나고 있었다.
난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려 본 대로 오른손을 심장에 가져다 대 며 맹세의 말을 읊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며 폐하를 모시겠습니 다.”
“ 좋다.”
그저 절차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 었다.
이곳의 그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내 게 내어 준 것만큼, 나도 그에게 성 실할 것이다. 앞으로 누구의 입에서 도 불평이 나오지 않을 만큼 제대로 해낼 것이다. 그에게 누가 되지 않 도록.
11- 아카데미 연회
지위 상승을 빌미로 황제는 냉큼 염원을 이루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방을 옮기게 되었다는 통보 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번만은 나도 거절할 만한 그럴듯 한 명분이 없기도 했다. 시녀들과 방을 나란히 써서야 황제의 위신에 누가 된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었 으니까. 그리고 그가 그저 편의만을 위해 내 방을 옮기려고 하는 게 아 니라, 내 방에 침입하는 자가 다시
나타날 것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전에 쓰던 방으로 돌아가 옮길 물건들을 가지 고 오려고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있었다. 본디 쓰던 방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그 리 아끼던 새 이불과 침대는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난 서둘러 새로 배정받은 방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 마주친, 키가 작은 하 녀 한 명이 몸을 숙이며 작게 웃었 다. 빨래터에서 함께 일한 적 있는 하녀 였다.
“셀레스티아 님, 이쪽입니다.”
“너무 말씀 높이지 마세요.”
“이제 비서님이신걸요.”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참.”
“그리고 바로 옆방이시잖아요. 언 제 어떻게 더 높은 분이 되실지 모 르는 것 아니에요? 루아나도 항상 그렇게 말하던걸요.”
그녀가 안내해 준 방의 입구에 선 나는 손을 얼른 내저었다.
“그런 오해는 접어 두시라니까요. 지금이야 폐하께서 혼인하지 않으셨 으니 괜찮지만, 나중엔 큰일 난다고
요.”
혀를 쏙 빼고 웃은 하녀가 총총 사라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황제가 항상 농담처럼 제 옆방으 로 옮기라고 했지만, 정말로 옆방에 사람을 갖다 놓을 줄은 몰랐다. 전 임 비서님이 쓰던 방도 이것보다는 더 떨어져 있었다. 아니, 지금도 이 상한 소문이 돌다 못해 황태후 마마 까지 오해를 하시는 마당에 이래서 야……오
속으로 불만을 한참 꿍얼거리며 문을 연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문의 정면에 사람 키만 한 창문 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충분 한 볕과 환기가 잘되는 것을 염두에 둔 방인 게 틀림없었다. 연노란색의 두 겹 커튼이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 었고, 황실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진한 파란색 벽지와 천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벽지 무늬를 살피기도 어려울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찬 서 가가 인상적이었다.
손이 닿지도 않을 높이의 서가들 을 보는데 입에서 경탄이 절로 흘렀 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