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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42화 (42/103)

— 42화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좀 더 빼 보는데 덜컹거리며 마차 문이 열렸 다.

“고개를 내밀지 말라고 분명히 말 했을 텐데. 말이라곤 안 듣는 예비 비서.”

황제가 들어옴과 동시에 비뉴스가 바깥으로 나갔고, 문이 닫혔다.

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 개새끼를 찾는 건가?”

여기서 황제가 개새끼라고 칭할 만한 사람은 세렉뿐이다.

이 원정을 나온 뒤로 꽤 계속 다 른 전장을 향하던 두 무리는 오늘 합류하여 같은 곳에서 싸웠다.

세렉은 좀 이상했다. 내가 아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놀라 운 고차원의 마법을 써서 싸워 대기 도 했지만,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한 번은 그가 쓴 얼음 마법이 아군의 지휘관 한 명을 그대로 얼려 버릴 뻔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황태 후가 육성했다는 ‘마법 육성부’의 힘이 다 그딴 식이었다.

워낙 통제력이 형편없어서 칭찬보 단 욕을 먹곤 했지만, 그래도 넓은 범위에 유효한 마법을 써서 일순에 언데드를 몰살하는 걸 보고 있노라 면 찬사가 흘러나오긴 했다. 그들에 대한 평판이 좋든 나쁘든 모두가 마 법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 자체가 수직 상승한 것은 틀림없었다. 다만 황태후가 하사한 힘이라는 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실 력이 급상승할 수 있는 건 어떤 까 닭일까?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볼을 작게 부풀렸다.

“제가 왜 그딴 놈을 찾습니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폐하. 제가 그 새끼…… 아니, 그 사람을 꼴도 보 기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 시면서.”

그는 전투 중에 쓰고 있던 먼지 막이용 후드를 벗어 던지며 입가를 비틀었다.

“그런 것치곤 저번에 단둘이 만나 서 석별의 정을 곱씹고 있던데.”

“ 폐하!”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황제는 뭐가 재밌는지 웃어 버렸다.

“화를 내는 표정이 좀 더 낫군. 이거 봐, 전쟁터의 냄새라는 건 역

시 맡기 좋은 냄새는 아니지?”

내가 울적한 표정이라도 하고 있 었나? 나는 내 얼굴을 더듬어 만졌 다. 그를 걱정했던 것뿐이다. 다른 것을 숙주로 삼아 살아가는, 인간도 아닌 것의 죽음에까지 보일 만한 남 는 동정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더 화를 낼 수가 없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황제 가 손등에 손을 겹쳐 오는 것을 내 버려 두었다. 델 듯한 뜨거운 열감 이 확 끼쳐 들었다.

“폐하, 오늘은 이렇게 사람이 많 은데…… 왜 그렇게 무리하셨습니 까.”

“자꾸 무리라고 하는데 말이야. 나로서는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거든. 그리고 조금만 참으면 네가 어떻게 해 줄 것 아닌가.”

“……장기가 상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도 어떻게 해 다오.”

황제는 내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겹친 손을 떼었다. 전장에 있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그는 내게 함부로 군 적이 없는 데도, 특히 다른 부분보다 신체 접 촉에 있어서는 예민하게 굴었다. 연 인에게 허락된 부분과, 부하에게 허

락된 부분을 예민하게 다르게 구분 한다는 것은 상관으로서는 좋은 자 세이긴 하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치 고는 묘하게 지나치게 정신이 똑바 로 박힌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의 아비가 여자에게 절제 없이 손을 댄 결과, 지금의 황실 꼴이 그 렇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차 안에 마련된 간이침대 위에 푹 엎드리는 그의 옆으로 다가 가 앉았다.

그의 등을 매만지는 동안, 황제는 점점 편안해지는지 고르게 숨을 쉬 었다.

“그래도 이게 낫습니다.”

“뭐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 른 채, 황궁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엉망이 된 꼴로 시 가지에서 승전 행진을 하고 돌아온 폐하를 뵙는 것보다는 이게 낫습니 다. 전장의 참혹함을 좀 본들 어떻 습니까. 제 주군이 계신 곳에……-”

난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직 나는 그를 그렇게 부를 권 리가 없었다. 정식으로 작위를 위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 실수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 황제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작게 웃었다.

“듣기 좋군, 주군이라는 소리. 곧 내 사람으로 삼으면 매일같이 하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이 사람은, 제 아랫사람으로 하여 금 저를 진심으로 섬기게 하는 재주 가 있었다. 나는 이제 그의 사람으 로 불리고 싶어 안달이 난다.

“기대하겠습니다, 폐하.”

나는 진심을 섞어 답했다.

방으로 돌아가자, 나를 맞이하는 것은 세레나였다. 일행이 성문을 통 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 내 방 에 와 있었던 모양이다.

“세레나 님!”

“어머, 원정대가 도착했다는 이야 기는 들었는데 일찍 왔네요. 잘 다 녀왔어요?”

“ 네.”

그녀의 옆으로는 이번 수행 여정 을 떠나기 전에 봤던 재봉사가 초췌 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가봉 드레스가 나왔습니다. 한번 입어 보시겠습니까?”

난 입을 가렸다. 이렇게까지 빠르 게 만들었다고? 기성품을 수선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드레스를 만드 는 데는 한 달도 부족한 법이다. 고 작 내 드레스에 몇 명이나 달라붙었 던 걸까?

“ 벌써요?”

눈이 휘둥그레진 내가 되묻자, 재 봉사는 허허 웃으며 하인들에게 손 짓했다. 그들은 좁은 내 방 안에 들 일 수 없어 밖에 내놓았던 듯한 옷 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드레스는 저번 것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은 고가의 물건이었

다. 나는 감히 그것을 만질 생각도 못 하고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했 다.

저번 것이 내 눈과 같은 갈색빛 으로 이목을 끄는 드레스였다면, 이 번 것은 눈에 띄는 색은 하나도 쓰 지 않았는데도 숨이 막히게 청초한 아이보리색 드레스였다. 리본 장식 이 없는 대신 레이스와 자수를 한껏 사용하여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였 다.

드레스뿐만이 아니었다. 남부 플 레뵈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거대 진 주들이 알알이 꿰인 목걸이와, 같은 진주로 만들어진 은세공이 화려한

귀걸이.

내가 황제에게 유일무이한 존재라 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 게까지 과한 하사품을 받는 것은 곤 란했다. 뒷말이 돈다.

난처한 얼굴로 드레스의 가장 겉 감을 장식하고 있는 흰 망사 천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세레나가 빙긋 웃었다.

“왜, 부담스러워서 그래?”

“네……;

“셀레스티아 양도 모르지 않잖아. 우리 황제 폐하만큼 논공행상에 철 저한 분도 없다는 거.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주신 게 아니겠어?”

그럴 만한 이유?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에 의아 하여 세레나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붉은 인장이 박힌 편지를 내밀었다. 아카데미로부터 온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가봉한 드레스를 입어 본 뒤 재봉사를 돌려보내고 나서야 떨 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셀레스티아 양에게.

조기 졸업 요건 심사 결과를 통 보할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

다. 여덟 명의 강사의 심사 결과, 전원 일치로 셀레스티아 양의 조기 졸업을 확정하였습니다. 아카데미의 다섯 번째 조기 졸업자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졸업장을 받으 러 방문하기 바랍니다. 우수한 학생 을 일찍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기쁨 이 교차합니다. 다시 한번 축하합니 다.

— 제록스 보냄 —」

“합격이래? 합격이래?”

세레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 네.”

“정말 잘됐잖아! 네가 똑똑한 것 은 내가 정말 진즉에 알아봤다니 까!”

세레나가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 다. 나도 마음이 벅차서 그녀를 마 주 끌어안았다. 긴 시간 노력 끝에 뭔가를 손에 쥐었다는 성취감이 얼 마나 큰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 을 정도였다.

“고마워요, 세레나 님.”

“내가 뭘……-”

“처음부터 지금까지요. 전부 다.”

“네가 자랑스러워, 셀레스티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황궁에는 이렇게 나를 걱정하고 염려해 주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이들이 있다. 나는 징그러워하는 세레나의 뺨에 키스를 남기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황제는 언제든 면회를 청해도 좋 다고 했지만, 위급한 것도 아니고 이런 일로 면회를 청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민만 반복하는 사이에 그가 보낸 시종이 나를 찾으러 왔다.

편지를 읽어 내린 그는 내가 이 뤄 낸 성과가 퍽 기분 좋은지 입술 을 당겨 길게 웃었다. 그게 다였다. 잘했다는 말도 한마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는 백 마디의 말을 들은 것보다 더 신이 났다.

자꾸만 내 가치를 다른 사람의 칭찬과 호의로 판단하려고 드는 것 은 천성일까. 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렝게반 곁에 있을 때와 지금은 다르니까. 그때는 내 능력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 아 니니까. 그때는 사랑이라는 이름하

에 모든 것을 다 해 주어야만 하는 줄 알았던 멍청한 사람이었지만, 지 금은 아니니까.

나의 구원자이자 나의 주군. 이 사람과 나는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었고, 우리는 합당한 거래를 한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 사람 에게 인정받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 서부터 우러나 기쁜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기뻤다.

“오늘 임명식을 해야겠군.”

“오늘 당장이요?”

“그래.”

“알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심 장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난 이 기쁜 소식을 황제 다음으 로 비서님에게 알리기로 다짐했다. 지금까지 간간이 남는 시간을 내어 나를 지도해 주셨던 비서님께서는 나를 볼 때마다 도대체 언제 직위를 물려받을 생각인지 재촉해 대곤 했 던 거다.

비서실은 황제의 방에서 그리 멀 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련되어 있 었다. 황궁의 다른 모든 문들이 그

렇듯 내 키의 몇 배는 되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류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고 있던 비서님이 고개를 들 었다.

난 손에 든 편지를 붕붕 흔들어 보였다.

“저 조기 졸업 합격했어요, 비서 님!”

“뭐라고? 정말인가?!”

“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오늘 당장 직위를……/

직위를 내가 물려받는다는 말은 곧 비서님께서 일을 그만두게 된다 는 말이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을 즐거운 기색으로 해도 되는가 싶어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비서님께서는 내가 굳이 다 하지 않은 뒷말을 알아서 유추해 낸 모양이었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내게도 쉬 는 날이 오는군. 콜록콜록. 이렇게 폐하를 수행하다가, 콜록, 쉬지 못하 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 니…… 콜록.”

다행히도 비서님은 반색하며 기뻐 했다.

때문에 마음은 한결 편했지만 뵐 때마다 혈색이 점점 어두워지다 못

해 기침도 심해지고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그가 기뻐하는 게 아주 조금 두렵기도 했다. 업무가 얼마나 과중했으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걸 저리 기뻐하는가 싶어서.

비서님은 열쇠를 꺼내 커다란 서 랍을 열더니, 거기에 들어 있는 서 류 뭉치들을 한꺼번에 꺼내 내 앞에 쌓아 두었다. 모두 황제의 인맥이나 회의 등에 관련된 제반 업무의 가이 드들과 연락처 및 지금까지 쌓아 온 기록들이었다.

그 서류 더미들이 어디에 필요한 것들인지 하나하나 꼼꼼히 알려 준 비서님은 시계를 한번 들여다봤다.

“직위를 위임받는 게 오늘이라고 하니, 의회에 참석해야 할 테지.”

“ 네?”

“일정 이상의 직위는 모두 참관하 에 위임식이 진행되네.”

“아…… 네. 그렇지 않아도 이따 가 참석하라고 분부하셨어요.”

“그대가 직위를 위임받는 것까지 는 봐야 내 임무를 다한 것 같을 테니, 오늘은 내가 안내를 해 줌세.”

그러곤 의회가 열리는 시간까지 여유를 확인하더니, 항상 내게 당부 하고 알려 주던 것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 줬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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