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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41화 (41/103)

- 41화

방 안을 훑던 그의 눈길이 내 손 에서 멈췄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 라 내 손을 바라보자, 무심코 만지 작거리고 있는 주머니에서 배지가 비죽이 튀어나온 게 보였다.

좀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얼른 그걸 등 뒤로 감추었다.

“졸업은 될 것 같나?”

“모르죠, 최선은 다했지만……,”

“네 최선이라면 그들도 만족하겠 지. 됐다, 그러면. 이번 여정은 함께 가지. 재밌는 구성이니 지루하진 않 을 거다.”

네?”

“그걸 바라서 지금 다 했다는 이 야기를 꺼낸 것 같은데, 내가 틀렸 나?”

맞다. 맞는데……으

심장이 콩콩 뛰었다. 이렇게 흔쾌 히 수락해 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 다. 비서 대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렇 게 긴 일정을 수행해도 괜찮은 걸 까. 아직 나는 제대로 된 졸업장 하 나 없는 몸인데.

황제는 내 얼굴을 보곤 팔짱을 풀고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 었다. 의외의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내일 아침에 과제를 제출하고 바 로 합류하겠습니다. 그것으로 괜찮 을지요?”

“그래.”

“이렇게 말 잘 듣는 사냥개같이 굴면, 두고 다닐 수가 있어야 말이 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개 에 자꾸 비교하시고.”

“그리고 돌아오면 곧장 그 파티인 가에 가야 하니까, 미리 옷을 맞춰 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옷?

그 말에 불길한 기분이 들어 문 바깥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내 몸만 한 박스가 방 앞에 배달되어 왔을 때의 당황스러운 기분을 잊지 않았 다.

“옷이라 하시면…… 저번에 하사 해 주신 것으로 괜찮습니다.”

“아니.”

“ 네‘?”

“내 부하의 옷차림이 나를 대변하 는 것 모르나?”

본인의 옷차림으로 본인을 대변하 시면 될 것 같은데. 황제는 무슨 옷 을 입어도 멋들어지게 잘 소화해 낼

수 있을 법한, 둘도 없는 조각 같은 몸매의 소유자였으니까. 게다가 아 름다운 여인들만 골라 결혼했을 게 뻔한 우수한 유전자 덕으로 빛나게 잘생긴 얼굴까지 있었고.

하지만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에 문 쪽에서 누군가 똑똑 두드리는 소 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박스 하나가 아니었다. 활짝 열린 문 앞에는 옷감이 보기 좋게 잔뜩 걸려 있는 행거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팔에 줄자와 레이스 견본들을 걸고 있는 남녀가 방긋 웃고 있었고, 장신구 일체를 파는 상인이 작은 가방을 둘

러메고 있었다.

난 그들의 앞에 있는 세레나를 한번 봤다가 그들을 차례대로 살폈 다. 비록 골디나와 부르크 제국의 물건들에는 어느 정도 지역 특성에 따른 차이는 있겠으나, 그것들이 얼 마나 고가의 물건인지를 알아보는 눈에는 자신이 있었다.

거창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었 다.

그러니까 과제를 하다 말고 지친 이 몸으로 사이즈를 재고 옷감을 고 르고 그런 일을 하라는 거지? 그것 도 저렇게까지 고가의 물건 중에서.

원망의 눈으로 황제를 쳐다봤지 만, 제 볼일을 다 본 황제에게 내 시선이 따가울 리도, 가려울 리도 없었다. 그는 유유자적 손수 문을 열어 주곤 옷감을 잔뜩 든 재봉사들 과 자리를 교대했을 뿐이었다.

황제는 항상 본인이 뭐든 다 결 정해 놓고 통보하는 식이다. 물론 직분이 황제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 서 뭐라고 할 순 없지만, 미리미리 말해 주면 좀 좋아? 아니, 내게도 조금쯤은 결정권을 줄 수도 있잖아.

난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얼른 다시 집어넣었다. 이제 이런 제멋대 로의 황제를 모시는 데에 적응해야

하니 까.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인 세레나 는 내 방 안 꼴을 보고 멈칫해서 날 엄한 눈길로 바라봤다.

“하하, 안녕하세요……스 세레나 님.”

“숙녀의 방 안이……, 내가 황궁 에서 일하는 자는 정숙하고 말끔한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 록 그렇게 말했는데, 이게 다 뭔가 요?”

“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정리할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좋았 을 것을.

황제는 세레나의 잔소리를 들으며 점점 작아지고 있는 나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곤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오랜 잔소리를 들은 끝에 간신히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그것은 퍽 고된 일이었다.

안감이 어떻고 겉감이 어떻고, 솔 기가 어떻고, 또 부위마다 대는 천 과 장식과 리본이 어떻고 하는 이야 기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하지만 며칠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과 제를 한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가 없었다. 되풀이되어 물어 오는 “둘 중에 어떤 게 더 나아요?”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곤란해하자,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묻지도 않았 다.

나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들이 시키는 대로 팔을 들었다 내렸다, 머리 장식을 썼다 벗었다 하다가 어 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 다 혀 차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아침에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는 다행히도 침대였다. 기억은 없었지 만 습관적으로 침대까지 기어오긴 한 모양이었다.

방 안의 책과 종이들은 엉망진창 인 그대로였다. 틀림없이 세레나 성 격에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게 참기 힘들었을 텐데, 내가 워낙 진이 다 빠져 쓰러져 자니까 참고 넘긴 게 틀림없었다.

내가 이 궁에 처음 도착했을 때 부터 무던히도 신세를 진 대상이 바 로 세레나였다. 그런 그녀에게 궁에 서 일하는 자부심도 모르는 형편없 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 았다. 게다가 노예로 들어와 아카데 미니 뭐니 갖은 폐하의 혜택을 다 누리고 있는 주제에.

나는 다음에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리라 결심하며, 과제를 황급히 챙겨 들고 마차로 내려갔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것은 아직 조 회가 시작하기도 한참 전인 이른 시 간이었다. 강사실을 돌며 과제를 제 줄하고 나서 제대로 공치사를 들을 겨를도 없이 다시 마차를 타러 나와 야 했다. 과연, 출장을 가 있다던 제록스 강사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 았다.

나 하나 때문에 오십 기에 달하 는 마법사님과 기사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헐레벌떡 마차로 돌 아가는데, 누가 손을 흔드는 게 보 여서 발을 멈췄다. 파랑 머리에 상 큼한 미소가 인상적인 빈첸조였다.

“빈첸조? 언제나 일찍 등교하네.”

“셀레스티아?”

빈첸조는 후다닥 내 앞으로 달려 와서 섰다.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있나?

“셀레스티아, 갑자기 전갈만 보내 고 학교를 안 오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했어.”

저번에 연말 파티에 모처럼 청해 줬는데 함께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는 전갈만 보내고 줄곧 내 방에 틀 어박혀 있었으니까 걱정한 모양이었 다.

“아아, 급하게…… 이런저런 일 좀 하느라.”

“조기 졸업 과제 때문에 그런 거 지?”

그도 해내지 못한 것인데, 그것에 매진하느라 학교까지 결석했다고 말 하기가 어쩐지 쑥스러웠다. 내가 살 짝 고개를 끄덕이자 빈첸조는 빙그 레 웃었다.

“너라면 잘할 거야.”

“고마워.”

“연말 파티 못 간다고 해서, 한두 주는 더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아…… 그거. 연말 파티에 못 가 는 게 아니라……-”

같이 갈 수 없는 건데. 파트너가 달라져서.

내가 우물쭈물 말을 망설이는데 비뉴스가 옆으로 다가왔다. 절도 있 게 우리 둘을 향해 작은 인사를 한 그는, 내게 몸을 구부리고 속삭였다. 빈첸조가 듣지 못할 만큼의 목소리 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만, 셀레스티아 님. 폐

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빈첸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고, 난 내 붉은 머리칼을 슬 쩍 헝클었다.

“미안해, 빈첸조. 다음에 다시 얘 기하자.”

그는 아쉬운지 내 손을 쥐고 손 등에 키스했다. 평범한 귀족 간의 인사인데도 어쩐지 친한 사이에 이 런 인사는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너랑 약속을 잡으려고 하면 번번 이 황제 폐하가 끼어드는 느낌이야. 그냥 느낌이겠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릴 하

는 거야.”

“하하. 얼른 가 봐.”

으으 아 흐.

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 는 눈치였지만, 난 일단 급히 몸을 돌렸다. 비뉴스도 마음이 급했는지 날 거의 안아 올리다시피 마차에 태 워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날듯이 달려 황궁 앞에 대기한 병력 사이로 끼어들었다.

난 그래도 출정 경험이 전혀 없 을 때보다는 좀 더 안정된 기분으로 잘 정렬된 대형을 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옷을 입은 두 무

리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

황제 폐하가 이번 원정에 재밌는 요소가 있다고 말할 때 그 말을 홀 려듣는 게 아니었다.

왼쪽 무리의 선두에는 눈에 익은 별무반 대장님이 계셨고, 그리고 오 른쪽 무리의 선두에는 세렉이 있었 다. 희고 붉은 옷을 입고 백마 위에 올라 있는 그는 누구보다도 의기양 양해 보였다. 세렉도 마차 안에 타 고 있는 날 알아봤는지 내 쪽을 돌 아보았다.

잘 정리된 잿빛 머리 아래 — 한 때 내가 좋아했던 - 지금은 증오스 럽기 짝이 없는 세렉의 얼굴이 시원 하게 웃고 있었다.

“저 사람이 여기에 왜 있죠?”

비뉴스는 내 말을 듣고 창밖을 흘끗 보았다. 그의 미간이 작게 찌 푸려지는 게 보였다. 지난 세렉과의 만남에서 우리 사이를 대충 짐작했 는지 그도 세렉을 마뜩잖게 여기는 것 같았다.

“최근 합병 건으로 제국 국경이 더욱 넓어진 것 때문에, 황태후께서 편성한 마법 지원 부대와 황제 폐하

께서 직접 이끄는 부대가 함께 활동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라니……/

“각기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고 함께 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하아……-”

내 인생에서 어떻게 좀 사라져 주면 안 될까, 정말. 더 이상 안 보 려고 안 보려고 애를 쓰고 또 써 봐도 저 개새끼는 시야에서 어떻게 사라지는 법이 없냐.

길게 한숨을 쉬는 사이, 부대 전 체가 기합이 들어가서 다시 정렬하 는 것이 보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

에서 흑마 한 마리가 조용히 전체 부대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 적안 이 모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당 연히 그를 우러러보게 만드는 위엄 이 절로 풍겼다. 왕관이 없어도, 보 랏빛 왕좌와 왕홀이 없어도, 그 누 가 보아도 정진정명 이 제국의 군주 인 것이 틀림없는 자였다.

“가자!”

황제의 한마디를 신호로, 두 개의 부대가 일제히 그를 뒤따라 움직였 다.

닷새간의 여정은 살육으로 빼곡히 메워져 있었다. 가는 던전마다 곧 방호막을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증 식해 있는 언데드들이 우리를 맞았 다. 언데드도 굴에 따라 다른 식으 로 성장하는 건지, 젤리와 같은 이 동 속도가 느리고 형체가 징그러운 것들에서부터 사족 보행을 하는 이 동 속도가 지독히 빠른 녀석들까지 고루고루 튀어나왔다.

온 숲에 마물 태우는 누린내가 진동했고, 죽음을 맞이하는 생물만 이 낼 수 있는 지독하고 끔찍한 비 명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채웠다. 며칠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광경들

이었다. 전투원이 아닌 내게도 그것 들은 선명하게 남았다.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일방적인 살육이 마무리되었 다. 나는 간신히 귀를 틀어막지 않 고 버티는 게 전부였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참혹함만이 남은, 재로 변해 버린 숲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쓰러진 기 사 둘이 들것에 실려 가는 것이 보 였다. 여느 때와 같은 일방적인 학 살이었지만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포 함하여 꽤 많은 이들이 회복 마법 덕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괜찮으신 가? 염려에 가득 차 이리저리 고개 를 돌려 보아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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