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아무리 자주 상처를 돌본다고 해 도, 요즘같이 이렇게 자주 원정을 가서야 치유 속도가 못 따라간다. 황제도 제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 겠으니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물러나는 기척을 느꼈는지 황제가 엎드린 채로 몸을 반쯤 돌려 턱을 괴고 날 바라봤다.
“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하군.”
또, 이런다.
지위가 명백히 차이 난다고는 하 지만, 이렇게까지 대답을 안 할 필 요가 있나? 질문과는 상관없이 저
하고 싶은 말로 대답해서야 대화다 운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내가 못 들은 척하고 몸을 일으 키려 하자, 황제가 제 앞 침대를 톡 톡 두들겼다. 앉아 보란 뜻이다.
오늘 세렉 앞에서는 거의 껴안다 시피 했고, 복도에서도 안고 다니질 않았나? 남들 앞에선 스킨십도 쉽게 하면서 묘하게 둘만 있을 땐 예의를 지키는 사람처럼 구는 게 묘하다면 묘했다. 하지만 그런 섬세한 면모가 싫진 않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리하곤 침대 끄트머리에 다리를 내리고 걸터앉았 다.
“왜 그러십니까?”
“조기 졸업, 반드시 해내겠다고 하더니 잘되어 가나?”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그 몰골이라면 졸업하기 전에 죽 어 버릴 것 같군.”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궁금한 게 그게 다였냐는 듯 쳐 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파티는?”
“ 네?”
“시험 뒤에 있질 않나?”
“아, 연말 파티 말씀하시는 겁니 까‘?”
“그래. 같이 가자고 한 놈도 있다 질 않았나?”
분명, 내가 흘리듯 빈첸조에게 청 을 받았던 것을 말했나 보다. 그도 별걸 다 기억하고 있다, 정말.
아무리 황제의 귀에 들어오기 전 에 정보가 걸러진다곤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그다. 제국이 돌아 가는 상황을 알기 위해 매일 눈알이 빠져라 일하다가 심지어는 실제로 던전에서 튀어나오는 언데드까지 처 리하곤 하는 그다. 그런 격무의 와
중에 사소한 아카데미 파티 일정 같 은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게다가 그 파티 파트너 이야기까지.
대체 얼마나 머리가 좋은 걸까.
경탄과 징그러움을 느끼며 난 고 개를 저었다.
“안 가기로 했습니다.”
“왜지?”
“제 방에 침입해 들어온 자가 제 록스 강사님과 동일인이 아닌 이상, 절 노리는 사람이 다수라고 생각하 고 앞으론 조심하려고요. 외부인이 출입 가능한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감수할 필요 없는 모험이질
않습니까.”
황제는 생각에 잠겼는지 잠깐 대 답이 없었다.
“이제 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손가락 으로 제 볼을 톡톡 두드리며 좀 더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이내 뭔가 재밌는 게 생각났다는 얼굴이 되어 서 말을 꺼냈다.
“정식으로 비서로 임명되고 나면 이제 자고 일어나는 시간 이외의 모 든 시간을 내게 할애해야 할 텐데.”
왜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건지 마음이 불안했다. 고개를 느리게 끄
덕이는 나를 보며 황제는 얼른 말을 이었다.
“마지막 추억이 될 텐데 그냥 참 석하지.”
“……네? 아뇨, 정말로 괜찮습니 다.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잖아 요.”
“아니, 아닐 거야. 겸양은 됐네.”
정말로 괜찮은데. 아카데미에 대 한 환상도 다 깨졌고. 물론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건 재밌었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있을 곳이 황제의 곁이 라고 느껴진다.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내가 더 이상 거 절할 틈도 주지 않았다.
“가는 걸로 하지. 아카데미에 가 고 싶다고 말했을 때, 네가 원했던 것은 이렇게 후다닥 도망치듯 졸업 하는 게 아니었을 것 아닌가. 평생 을 앞으로 내게 바칠 자에게 이 정 도도 해 주지 않으면 미안하니까.”
“ 폐하……-”
황제는 이상한 데에서는 고집스럽 지만, 또 이렇게 한 번씩 사람을 녹 일 정도로 배려해 줄 때가 있다. 노 예였던 내게 신발을 가져다주라고 명했을 때도, 아카데미 수석으로서
연회에 참석할 때 입을 것이 없는 내게 드레스를 마련해 주었을 때도 그랬다.
감동스러웠지만, 내가 연말 파티 에 갈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 었다.
“하오나 저를 노리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저로서도 괜히 참 석했다가 폐하께 폐를 끼치는 일이 되어선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리고 빈첸조도 괜히 같이 있다가 위험한 일에 휩쓸릴지도 모르고……-”
“그 학생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내가 해결해 주지.”
“……네?”
“외부인도 파트너로 참석할 수 있 는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가면을 쓰는 무도회라고 하질 않 았나?”
“그렇습니다만……
“내가 가지.”
“ 네?”
“내가 간다고.”
“ 폐하……?”
황제가 간다고? 어딜? 아카데미
파티를?
난 그의 저 명료한 시선을 잘 안 다.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심이다. 그리고 제 의견에 이의 제기를 받을 생각도 없는 거 다.
그의 붉은 눈이 빙그레 웃었다.
“나 이상의 호위는 없을 테니까 걱정 없지.”
“하지만 폐하……-”
내가 뭐라고 할지 짐작이 되는 모양인지 황제는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그가 월등한 우위에 선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얼
굴을 할 때마다 뭐라 반박할 말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는 호전적으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내 황궁까지 기어 들어왔다가 목 을 그대로 달고 달아난 그 자식을 내 손으로 잡지 않고서는 두 발 뻗 고 잘 수 없으니까.”
“ 폐하.”
“나도 목숨이 매일 간당간당한데 내 비서까지 매일 살인 위협에 시달 리면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질 않 나.”
황송하다고 해야 할지, 황제의 부
족해질 업무 시간과 일탈을 감당해 야 할 호위 기사님들을 걱정해야 할 지 모를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난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방에서 두문불출한 지도 벌써 일 주일 째. 방에 틀어박힌 나는 매일 같이 과제를 작성하는 데 매달렸다. 이제 마지막 과제인 제록스 강사님 의 것만 남았다.
애초에 보고서를 ‘제책’해서 가져
오라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어찌나 요구되는 사항이 많은지, 나 는 조사한 자료에 파묻혀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꾸역꾸역 글을 써 내 려갔다. 조사한 것들을 정리하는 것 도 일이었지만, 그것들을 수렴하여 써야 하는 양의 분량이 어마어마해 서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깜박 잠들었다 일어난 난 침대에 드러누웠던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 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지도 며칠째 인지 가늠이 제대로 되지 않을 지경 이었다. 회복 마법이라도 들으면 이 럴 때 오죽 좋을까.
“죽겠다, 정말.”
나는 아예 졸업 과제를 끝낼 때 까지 남은 시간 동안 아카데미에 출 석하는 것조차 포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제록스 강사님께서 사정을 봐주셨다. 게다가 어차피 조 기 졸업하는 게 가능하다면, 굳이 출석 일수를 꽉꽉 채울 필요도 없었 다.
이제 정말로 물러날 구석이라곤 없었으니까. 이제 와서 죄송하게 되 었지만 조기 졸업할 수 없게 되었다 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이미 나를 비서 후보로 소개할 생각이고, 노예 출신인 주제에 아카데미라는
최소한의 요건도 충족할 수 없는 자 를 황제 폐하의 입으로 소개하게 만 들 수는 없었다.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른 채 과제에 매달리면서도, 제록스 강사 님이 도대체 그때 내게 왜 그런 약 을 먹였던 것인지 간간이 의문이 떠 올랐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다가도, 또 그 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가도.
이제 이 과제를 다 하고 나면 정 말로 제록스 강사의 뒤를 캘 수도 있겠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대 체 내게는 왜 그랬는지.
복잡한 머리로도 펜은 쉴 새 없 이 움직였다. 과제를 쓰다가 잠들었 다가 다시 깨어나서 쓰고, 또 쓰다 가 루아나가 가져다준 식사를 하는 식 이 었다.
루아나가 간간이 들러 식사를 살 펴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요즈음은 밥을 먹고 나면 이상하게 피로가 싹 씻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게, 누가 보면 약이라도 달여 먹은 것 같았 다. 이게 다 친구와 잠깐이라도 이 야기를 나누는 게 스트레스를 풀리 게 해 줘서 그런 거겠지만.
아픈 손가락으로 꾸역꾸역 손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내 왼쪽에는 수 북한 과제물이 쌓여 있었고, 나는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장을 작성하 고 있었다.
‘……그리하여, 2()1개의 마법이 금지 마법으로 제정되었다.’
마침표를 찍고 나서 감회가 새로 워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정독하고 나서야 나는 잉크병의 뚜껑을 덮었 다. 내가 하고도 어떻게 해냈는지 모를 정도의 거대한 과제의 산이 옆 에 쌓아 올려져 있었다.
이제 종이에 구멍을 내어 묶기만 하면 되지만…… 그것은 조금만 미 뤄야겠다.
“다 했다!”
개운한 기분으로 이불에 풀썩 드 러누우니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 었다. 해냈다는 기분으로 속이 썩 뿌듯했다.
어떻게 될진 모르겠다, 졸업이라 는 게. 요건이 까다로운 만큼 해낸 사람의 수도 워낙 적었으니까.
난 누운 채로 황제가 내게 주었 던 배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 것 덕분이다. 이렇게 힘을 낼 수 있
었던 것은.
또또또 -기—기-기.
노크 소리?
언제나처럼 루아나겠거니 싶어서 난 누운 채로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벌컥 문이 열리고 황제가 척척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난 놀 라서 벌떡 일어났다. 방 꼴이 지금 말이 아닌데. 이게 방인지 책 무더 기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인데…… 하 필 이런 꼴일 때 오실 건 또 뭔가.
방 꼴을 어떻게 할 생각은커녕 내 꼴을 수습할 엄두도 안 나서, 난
기력 없는 몸으로 간신히 인사나마 해 보였다.
황제는 제가 늘 앉곤 했던 내 방 의 유일한 의자가 책으로 뒤덮여 있 는 것을 슬쩍 보곤 선 채로 팔짱을 꼈다.
“요즘 바빠 보인다 싶더니, 팔자 좋게 누워 있군.”
“이제 겨우 누운 거라고요.”
“내일부터 닷새 정도, 남부로 떠 난다.”
외출할 때 말해 달라고 한 뒤로 그는 이렇게 꼬박꼬박 말해 주곤 했 다.
사람을 보내도 되는데 이런 걸로 온 건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로……?”
“합병 건은 대충 마무리된 것 같 으니, 던전을 한꺼번에 돌고 올 셈 이다.”
아무리 잦다 잦다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요즘 던전이 열리는 속도가 빠르다.
아직 민간의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이번에도 언데드들을 정리하고 돌 아온다면 또 엉망이 된 꼴로 오겠 지.
잘 다녀오라는 인사말을 해야 할 텐데, 난 나도 모르게 몸을 내밀고 쌓인 과제의 산더미를 가리켰다.
“과제는 다 했어요, 폐하.”
“음?”
“조기 졸업 과제는 모두 마쳤습니 다.”
그의 적안이 또르르 굴러가 더럽 기 짝이 없는 내 방 안에서 그나마 간신히 정리되어 있는 과제 더미를 발견했다.
“엄청난 양이군. 과연, 요건이 그 리도 까다롭다더니만.”
겸양의 말을 해야 하는 줄은 알 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과제를 하는 동안 내 눈알은 빠 질 것 같았고, 손가락은 아직도 저 리고 아파서 물건을 제대로 집을 수 도 없을 지경이니까.
글자를 너무 많이 읽어서 뇌 속 에 단어가 동동 떠다니는 기분까지 들었다.
“정말 엄청났어요. 이건 사람이 하라고 낸 과제가 아닌 수준이라고 요.”
황제가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다 했으니까요.”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