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황제가 갑자기 이런 시가지 한복 판에 나타났다는 것은 나를 퍽 당혹 하게 했다. 내가 아는 그는 황궁 밖 을 별 볼일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도 아니었고, 서민의 음식을 파는 펍에 일부러 들를 리는 더더구나 없었으니까.
오늘 출정이 분명 이맘때 끝나기 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마력을 많 이 쓰는, 그놈의 던전 소탕이 끝났 으면 곧장 돌아가서 몸을 쉬고 계시 는 게 맞다. 남은 일정도 만만치 않 게 많은 분께서 부러 시간을 쪼개어 들를 곳은 아닌데.
눈알만 굴려 주위 상황을 살피자,
주요 출입구에는 경호 기사들이 이 미 달라붙어 있었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햇볕이 잘 들어오게 설계된 목 조 건물에 생화를 멋들어지게 배치 해 둔 것이 아주 세련되어 보였다. 그런데 황제와 기사들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자, 펍은 한순간에 몹시 초라해 보이는 꼴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황제는 날 끌어안은 채로 가만히 있 기만 했다. 평소엔 예를 차리는 것 도 귀찮아해서 생략시키기가 일쑤인 그의 긴 침묵 때문에, 세렉은 계속 해서 한쪽 무릎을 땅에 붙인 채로 쭈그려 앉아 예를 차리고만 있어야
했다.
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폐하.”
“뭐지?”
“나오지 않으셔도 제가 갈 터인데 요.”
“내가 직접 오지 않았으면 이런 재밌는 이야기에 끼지도 못할 것 아 닌가. 안 그런가?”
뒤늦게 황제가 손짓한 터라 일어 난 세렉의 낯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 다. 제가 지껄인 소리들이 그래도 기억나긴 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 다, 폐하.”
“아아, 이제 폐하라고 부르는 건 가? 아까 하던 대로 돈 많은 새끼 라고 불러도 괜찮은데 말이야. 실제 로 돈이 많거든.”
세렉은 여유 있는 웃음을 어떻게 든 유지해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 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황태후 라는 제 뒷배를 떠올렸는지 간신히 심호흡을 하곤 다시 웃는 얼굴로 돌 아오긴 했다.
“다른 분에 대해서 말한 건데, 잘 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폐하. 제가
어찌 폐하께 그런 말씀을 드렸겠습 니까.”
“아하, 그렇군. 그렇지, 내가 둘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었으니까 말이 야.”
“그렇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위임 한 것은 아니라 들었사옵니다만, 이 렇게 바깥에서 사적으로 찾으실 만 큼 가까우신 줄 알았으면 제가 괜히 셀레스티아를 불러낸 듯싶습니다.”
세렉은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는 팔뚝을 자꾸만 노려보더 니만 이제 헛소리까지 하기 시작했 다. 듣기 좋게 에둘러 말하는 것 같 지만 돌려서 비난하는 거다. 정식
군신 관계도 아닌데 이렇게 찾아 대 면 오해를 사기 쉽다고.
저걸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하지만 내가 화내기 전에 황제의 말소리가 먼저 나왔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지. 불러 내지 말게.”
그 말에는 엄격하게 선을 긋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고, 꽤 기분 나 쁜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감사했다. 보지 않아도 적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웃
듯이 입꼬리를 올리는 그 표정을 하 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이제 능히 짐 작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죽여 볼까 하고 먹잇감을 고르는 사자 같 은 그 얼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 다.
너무 직접적으로 받아친 말에 일 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는 듯 눈만 크게 뜬 세렉에게, 황제 가 다시 한번 말했다.
“황태후께는 재밌는 물건을 만들 어 놓은 것은 좋지만, 장난감은 살 살 굴리시라 전해 주게.”
“……네?”
“이용당하는 것도 모르는 도구와 길게 얘기를 섞어 봤자 내 입만 아 프지.”
“……절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 까?”
세렉의 일그러지는 얼굴에 황제의 웃는 듯한 기척이 등으로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네도 귀가 안 좋군. 내가 ‘돈 많은 새끼’ 란 말이 날 두고 한 것인 줄 알았 던 것처럼, 오해가 있는 모양이지.”
“ 폐하……,”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세렉 을 보니 통쾌하다 못해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평생을 말싸움하 며 살아온 - 더불어 무력행사까지 하며 살아온 — 정치인들과 언변으 로 싸울 생각을 한 그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황제는 몸을 돌리면서 간신히 내 어깨에서 손을 풀었다. 오늘따라 유 독 긴 소매 옷을 입은 그의 상처는 겉으로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 지만 닿았던 몸이 떨어지는 것만으 로 온도가 뚝 내려가는 것 같은 열 감을 가진 상태의 그다.
조급한 마음에 나도 세렉을 일별 하고 황제의 뒤를 쪼르르 따랐다.
10. 황제의 비서
펍의 주인장이 허리가 부러지도록 인사를 하는 걸로 부족한지 결국 바 닥에 엎드린 채로 황제와 나를 배웅 했다. 경호 기사들이 뒤로 따라붙는 사이, 비뉴스가 내 마차 쪽으로 향 했고, 나는 황제와 함께 그의 마차 에 올랐다.
패왕과 단둘이 같은 공간에 있다 는 것을 줄곧 부담스럽게 생각했지 만, 어떻게 생각하면 특권일지도 모 른다. 경호 기사들이 양옆으로 늘어
서 있는 사이를 걸어 마차에 오르다 가 돌아봤을 때, 몸을 잔뜩 낮춘 세 렉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이 자 기분이 조금쯤 나아졌다.
푹신하기 짝이 없는 황실 마차의 비단 의자에 앉는데, 황제가 맞은편 에 앉아 내가 앉은 쪽에 발을 툭 걸치곤 서류를 폈다.
외려 아까보다도 거리감 있는 태 도였다. 그러고 보면 우거진 동굴로 원정을 갔다가 돌아온 뒤로, 황제는 나와 둘만이 오른 마차 안에서 꼭 저렇게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좀 괜찮으세요?”
“그래.”
“왜 굳이 절 찾으러 오셨어요? 곧 돌아갈 건데.”
팔랑, 종이를 넘긴 그가 나를 슬 쩍 쳐다보곤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불만인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죄송 해서 그러죠.”
“어차피 돌아가던 중이었고, 해갈 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니 못 견디 겠더군.”
그는 항상 침착한 어조로 말해 오기 때문에 얼마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서류를 팔 랑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읊조리면 더더욱 농담인지 진 담인지 모르겠다.
이 자리에선 그의 등을 봐 줄 수 가 없는데, 왜 하필 앉아도 꼭 저렇 게 대각선 자리에 앉는단 말인가. 정말 고집불통에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우리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속 에서 대화 없이 각자의 생각과 일감 에 빠져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나는 현임 비서 님께 오늘 일정을 보고했다. 비서님 은 그간 황실에 있었던 대소사들 중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간략하게 정 리하여 주었는데, 그중에는 시종장 님의 사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임하셨다고요?”
“응. 전대 황제 폐하를 모시다가 지금까지 애쓰고 계셨던 몸이니 나 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셈이지. 그분 도 참 수고가 많으셨어.”
“……좋은 분이셨어요.”
“이제 집에서 쉬실 셈이겠지. 좋
0 시게어 ”
“하하……
“그리고 어디 보자, 한창 가지치 기를 할 계절이기 때문에 정원수들 을 돌볼 정원사들이……;
나는 별것 아닌 소식인 것처럼, 다른 소식들 사이에 끼어 내 귀로 들려온 시종장님의 소식에 심장이 쿵쾅거 렸다.
정말 조용히 집으로 쉬러 갔을 까?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이렇 게 갑작스러운 사임이다. 이렇게 시 의적절하게.
내가 증언한 한마디 때문이라고 자책하지는 않는다. 그가 틀림없다
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려선 안 될 사람에게 등을 돌렸으니까.
지하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있을지 도 모르고, 자택에 있다고 해도 감 시가 붙어 있겠지. 제록스 강사와의 연결 고리를 발견했다든가, 쓸 만한 소득이 있었다면 황제가 내게 말해 주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던 것 을 생각해 보면…… 살아는 있는 걸 까?
“……듣고 있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서님 이 입을 일자로 다물고 날 쏘아보고 계셨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아뇨, 듣고 있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지?”
이럴 때는 머리가 좋은 게 다행 이다. 나는 잡생각을 하면서도 한 귀로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 다.
“정원사들을 대거 기용하여 정원 을 정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정원 행사 일정이 있다면 미리 조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후, 좋아. 내가 오해를 한 모양
이군. 이제 가 봐도 좋아.”
“ 네.”
“그리고……
“ 네?”
“아마 나는 정말로 앞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무릎도 그렇고, 허리고 그렇고…… 나이가 드니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군.”
“비서님……
“조기 졸업인지 뭔지, 잘 부탁함 세.”
난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하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해내야만 하는 이유가 늘어만 갔다.
비서님과 인사를 한 뒤, 방에 들 러 간만에 제대로 몸을 담그고 목욕 을 한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황제의 방으로 갔다. 그는 상의를 벗고 침 대에 엎드려 서류를 읽고 있었다. 황제도 긴 여행 끝에 씻고 나왔는지 먼지를 덮어쓰고 있던 머리칼이 말 끔하게 촉촉해져 있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짬을 내어 저렇게 최종 결재를 득해야 하는 서
류를 읽어 대야 하다니, 황제도 참 극한 직업이다.
난 엎드려 서류를 읽는 그에게 다가가 익숙하게 침대 위에 걸터앉 아 등 위를 천천히 매만졌다. 방금 막 씻고 나온 터라 피부는 보들보들 했지만, 눈 뜨고 보기에 끔찍한 꼴 이었다.
처음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멍처럼 보이는 상처들뿐이었던 그의 등 위는 이제 점점 더 또렷한 형체 를 가진 상처로 뒤덮이고 있었다. 치료되지 않은 채로 오래 곪은 상처 보다는 아예 피가 나는 새로운 상처 쪽이 훨씬 더 건강한 상처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보기에는 영 좋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부효과가 생긴다고 해도 얻어맞은 듯한 멍이 모양대로 들거나 하는 정도지, 날카롭게 베인 듯한 상처가 생기는 일은 잘 없는 데…… 얼마나 거대한 힘을 빌려 쓰 기에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점점 상처가 심해지는 것은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안심한 탓일까? 아니면 이제는 지속적인 고통에서는 조금이 나마 해방된 탓일까? 그는 점점 더 강력한 마법을 속성을 가리지 않고 써 댔다.
묻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입을
꾹 다물고 손을 놀렸다. 그는 황제 한 사람에게 한 나라의 국민이 의지 하고 있는 그런 멍청한 상황에서 힘 을 내고 온 거다. 탓하는 것처럼 들 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손에 닿는 가장 바깥쪽부터 쌓아 올려진 마법 술식들을 한 겹 한 겹 꼬인 실을 풀듯 거꾸로 읊어 내려가 면서 속으로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 었다. 이렇게까지 술식이 복잡한 마 법이 있다니.
살이 파인 듯 새겨진 검푸른 삼 각형 문양에 손이 닿자, 황제는 서 류를 읽다 말고 짧게 숨을 들이켰 다. 그러곤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황제의 까만 머리통 아래의 목에 서부터 단단한 등으로, 그리고 어깨 로 이어지는 근육을 따라 손을 덧그 리며 남은 상처를 마저 돌보는 사이 에 시간이 훌쩍 흘렀다. 어둠이 내 려앉은 시간이 되어서야 그의 등은 좀 봐 줄 만한 꼴이 되어 있었다.
난 속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 쓰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도 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조처를 해 둔 것이고, 더 이상은 무리였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