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고개를 돌리자, 광장의 시민들이 우르르 몰려 한곳을 바라보고 서 있 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가 리키고 있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빼 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거기에는 허 공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마법사가 한 명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 게 이가 갈렸다.
“세렉……
시가지에서 마법을 쓰면 안 된다 는 규정 같은 건 씹어 드셨나? 아 무리 황태후와 황제 직속 마법부는 예외라고는 하나, 그것도 비상시에
만 해야 하는 행동 아냐? 황태후의 비호를 받으니 세상일이 다 만만해 보이나?
내가 이를 갈건 말건 사람들은 그저 반투명해 보이는 마법 날개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세렉이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 다니는 모습을 선망 어린 눈으로 올 려다보았다. 흰색과 붉은색을 화려 하게 쓴 옷은 황태후 직속 제복의 양식 이 었다.
제비처럼 생긴 얄쌍한 얼굴이 내 쪽을 바라봤다.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를 보는 순간, 익숙한 잿빛 머리칼에
녹색 눈의 얼굴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대체 왜?
작게 보이던 그가 순식간에 다가 오는 것을 보는 동안에 생각은 빠르 게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내가 아는 세렝게반의 능력으로는 절대 저 정도로 능숙하게 하늘을 날 수 없었다. 원소 중 어떤 것이든 자 신에게 더 잘 맞는 것을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였지 만, 세렉은 물론 재능이야 있지만 한계가 명확한 축이었다.
그와 내가 모르고 지낸 시간이
있기야 하지. 내가 노예로 팔려 온 뒤의 그 시간 동안 세렉에게도 발전 이라는 게 있었겠지. 하지만 저렇게 까지 급한 성장을 이룩했다고?
당황한 내가 멍하니 멈춰 서 있 는 사이에 그는 허공에서 땅으로 착 지했다. 그러더니 저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인파들을 향해 으스대듯 웃 어 보였다. 그러곤 인파를 가르고 펍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셀레스티아.”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청했다. 나는 그의 손바닥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쏘아붙였다.
“무슨, 잘나신 귀족 나리라도 된 것 같네.”
세렉은 이제 와서 왜 그러냐는 투로 가만히 있는 내 손을 억지로 당겨 갔다. 손을 빼어내려고 힘을 주기도 전에 그는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몸이 바짝 굳었다.
손등에 더러운 것이 묻은 것 같 은 기분은 차치하고, 그 순간, 마치 황제의 몸을 만졌을 때와 같은 가벼 운 열감이 느껴졌다.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게 어떤 감각이지?
처음 겪는 느낌이었지만 아주 순 식간에 스쳐 지나간 감각이라 무엇 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갑자기 향상된 것과 어 떤 연관이 있으리라는 불길한 예감 이 들었다.
“보고 싶었어, 셀레스티아.”
내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당치도 않은 말을 속닥거리는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올려 치지 않는 데 심력을 다 소모해야 했다.
“왜 보자고 했어?”
그는 내게 의자를 빼 주더니 내 가 거기 앉자, 바로 옆의 의자에 앉
았다. 난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 커다란 나무 탁자를 돌아가 건너 편에 앉았다.
세렉은 제 잿빛 머리카락을 흐트 러뜨리며 작게 웃었다. 쌍꺼풀이 진 한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히는 것 도,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도 하나같 이 눈에 거슬렸다. 전부 다 내가 좋 아했던 것들이라서. 그것들을 보면 서 그를 사랑스럽다고 여긴 적이 있 었기에. 그가 계산적으로 그런 행동 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더욱.
내가 한껏 얼굴을 찌푸리는 게 보이긴 하는지 그는 날 달랠 때 으 레 하곤 했던 표정으로 말을 꺼냈
다.
“셀레스티아, 이제 기분 좀 풀었 어‘?”
“……기분을 풀었냐고 물었어?”
내 앞에 물이라도 조금 남아 있 었다면 연회 때처럼 쏟아부어 주기 라도 했을 텐데. 정말 아쉽게도 그 럴 수조차 없었다.
애꿎은 주먹만 꽉 움켜쥐는데, 세 렉은 심지어 내 주먹을 제 손으로 감싸 쥐기까지 했다. 내가 더럽다는 듯 떨쳐 내는데도 놓지 않으려고 하 자, 비뉴스가 칼 손잡이를 쥘지 말 지 갈등하는 게 보였다.
정말 이 개새끼는 어쩜 이렇게 꾸준히 개새끼일까.
나는 그의 손을 힘을 주어 떨쳐 내고 팔짱을 꼈다.
“더럽게 굴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해. 나 바빠.”
세렉은 짜증 나게 여유 있는 사 람처럼 서글서글하게 웃더니 눈썹을 추켜세웠다.
“뭐, 미리 말해 두고 싶은 게 있 어서.”
“뭔데?”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거라는
거? 네가 정말로 황성에서 일할 생 각이라면 말이지만. 그리고…… 황 성에서 널 받아준다면 말이야.”
말하는 투가 아주 웃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은 황성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것 좀 보라지. 제국에 온 것은 내가 훨씬 먼저였다. 그것도 저 새끼 때 문에 아주 불미스러운 이유로. 황궁 에 들어와서 일을 한 것도 내가 먼 저다. 그런데 그걸 그런 식으로 말 한다고?
열불 터지는 것은 둘째치고 내용 이 퍽 이상했다. 황태후 아래에서 일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황태후
아래로 마법 육성을 목적으로 마법 부대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그것 때문에 저번 연회에도 세렉이 동석했던 거니까.
그런데 앞으로도 종종 마주친다 고?
“내가 황태후 마마 휘하에 새로 설립된 마법 양성부의 수석 마법 장 교거든. 너도 짐작했겠지만.”
“네가……?”
그 실력으로?
“그러니까 아마 황제 폐하께서 앞 으로 ‘사냥’ 나가실 일이 있다면 당 연히 우리 부서도 동행하게 되겠지.
우린 괜찮은 전력이니까. 그런 식으 로 자꾸 마주칠 텐데, 우리가 괜히 불편한 사이일 필요는 없잖아? 기분 풀라고.”
“내가 단순히 기분이 상한 게 아 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더 말해 봐. 네가 어떻게 수석이야? 너보다 잘난 사람이 없으면 제국도 망해야 돼.”
제 잘난 맛에 사는 세렉은 내 말 이 아주 우스운 농담이라는 것처럼 작게 웃더니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해? 넌 항 상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칭찬했잖아? 내 빛나는 재능을 가장 잘 알아봐 준 게 너였잖아.”
웃기고 자빠졌네. 내가 더 칭찬한 건, 응원한 거였다. 그 잘난 재능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소박한 두뇌를 가진 네가 끙끙대는 게 가엾어서, 더 열심히 해 보라고 응원한 거였다 고.
좋아해서. 네가 더 잘돼서 사미디 온과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항상 말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다 행히도 악몽 같은 과거는 떠오르자 마자 잊혔다. 과거의 내가 어리석었 던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새끼가
비열했던 게 중요한 거지.
“맞아. 내가 그렇게 말했지. 하지 만 넌 거기까지 갈 만한 놈은 못 돼. 내 눈이 정확할 텐데.”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세멕.”
“내겐 황태후께서 선사해 주신 특 별한 능력마저 있으니까.”
황태후께서 선사해 주신 특별한 능력? 세렉은 흘리듯 말했지만, 나 는 그 말에서 수상한 냄새를 맡았 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앞으로도 종종 마주칠 사인데, 다시 잘해 보 고 싶다면 언제든지 내 너른 품으로 돌아와도 좋단 뜻으로 보자고 한 거 니까.”
난 세렉을 쏘아봤다. 유들유들한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황태후가 준 능력’에 대해서 그가 쉽게 입을 뗄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둘의 결속이 아주 단단하다는 것 만 확인한 셈이다.
나는 세렉에게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해 말하지 말아 달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그 정도로 단단한 결속 관계라면 괜한 말해 봤자 의심만 산 다.
그딴 의미 없는 볼일이었다니 이 자리에 나온 보람도 없을 정도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고 하자, 세렉이 얼른 입을 열었다.
“황제는 알아?”
“네 능력 말이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던 주제를 세렉이 먼저 꺼내자, 속이 덜컹했다.
무어라 대꾸해야 좋을지 순간적으
로 고민하느라 입을 다문 사이, 세 렉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 돈 많은 새끼는 아마 모를 거 야.”
난 그를 쏘아봤다.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마. 너도 이제 제국민이라면.”
“알겠어, 알겠어. 아무튼 그게 네 능력 중에서 제일 대단한 부분이잖 아. 잘나신 폐하께서는 네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백날 옆에 있어 봐야……/
“그러는 넌? 너도 돈이라면 지금 부족하지 않잖아. 그 능력이 아직도
필요한 건 아니잖아?”
속내를 숨길 줄도 모르는 개새끼. 내가 아직까지 골디나의 뒷골목에서 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다면, 내 능력만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 먹 고 달콤한 소리나 가끔 중얼대 주며 날 이용했을 거다.
“그자는 널 이용하는 거야.”
이용이 라.
정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나는 입술을 비틀며 조소했다.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해한다 는 거지. 하지만 처음부터 돈 많았 던 새끼가 네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나 하겠어? 나와 그 자 식은 시작한 바닥이 다르잖아.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새끼들이 네 몸을 보기라도 해 봐. 그 마법진을 봤다간 무섭다고 도망이나 갈걸? 얼 마나 흉해. 안 그래? 걱정 마, 소문 은 안 낼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나 꽁꽁 싸매고 있을 수는 없을 거 아냐?”
흉하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그 렇게……오
너무 기가 막히면 말문이 막히기 도 하는 법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 는 걸 내가 비참해한다고 생각한 걸 까? 그는 여봐란듯이 가슴을 펴고
웃으며 말을 더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하 지만 나는 이해해. 다 이해한다고. 심지어 그걸 사랑하기까지 하지. 네 가 나 아닌 다른 사람 곁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제 정신이 조금이라도 박혀 있는 놈이 라면 절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당장 내가 이놈을 죽여 버려도 난 틀림없이 무죄일 거다.
“이 여자를 보고 내가 도망을 간
다고? 어이가 없군.”
그때 바로 내 등 뒤에서 난데없 이 익숙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이 자리에 없어야 하는, 익은 목소 리에 깜짝 놀란 내가 급하게 벌떡 일어나다 넘어질 뻔하자, 등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날 안듯이 붙들어 세 워 주었다. 내 팔뚝 위로 전해져 오 는 커다란 손바닥의 온도가 델 듯이 뜨거 웠다.
“폐하!”
세렉은 내가 놀라는 사이에 몸을 굽혀 예를 차렸다. 황제는 턱을 끄 덕이곤 내 뒤에 서서 내 어깨를 감 싸 안듯이 했다. 등과 어깨에 닿아
오는 가슴과 손의 뜨거운 감촉에 심 장이 쿵쿵 뛰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돌봐 주고 싶을 정도의 열감이 었다.
도대체 마력을 얼마나 퍼붓고 온 거지?
황제가 나를 그저 냉각제로 쓰고 있다는 사정을 모르는 세렉은 황제 앞에서 차마 앉을 수는 없었는지 어 정쩡하게 멍하니 선 채로 나를 쳐다 봤다.
난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 려 했지만, 꽉 안겨 있는 상태에서 그마저도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