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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37화 (37/103)

- 37화

오늘도 한껏 단장한 비키는 꽤 고왔다. 마음 씀씀이만 좀 더 좋게 썼더라면 외모 버프로 친하게 지내 고 싶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만, 이 미 이 사이는 틀려먹었다.

사물함으로 가려고 그녀를 스쳐 지나려 했지만 비키가 내 앞을 다시 가로막아 섰다.

“조기 졸업 요건, 알아봤다는 얘 긴 들었어.”

“그래서?”

“왜 조기 졸업할 생각을 했어? 이 학교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잖 아, 넌.”

틀린 말은 아니다. 신분의 지위를 막론할 수 있는 것은 아카데미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만 이뤄지는 일이 지.

그런데 그게 뭐?

난 입을 비틀며 웃었다. 황제한테 배운 거라곤 이런 표정밖에 없어서.

“이 학교 안에서라도 넌, 날 평등 하게 대접해 주려고 한 적 없잖아, 비키? 지위로 깔아뭉갤 생각만 할 땐 언제고. 어차피 그렇다면 졸업이 라도 빨리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 이게……!”

“할 수 있으면 너도 하든가.”

애초에 과제 난이도를 넘어서서 그 어마어마한 분량을 생각해 보면, 비키는 그걸 다 써 내려가는 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것조차 이미 무리일 게 틀림없었다. 사람을 쉽게 얕보면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 는 데에 너무 맛 들어 버린 저런 귀족들은 한계가 명백하기 마련이 다.

성질이 뻗쳤는지 욱해서는 난리를 피우는 비키를 보다가, 난 문득 그 녀가 황태후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 을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약 올리고 나서 내가 조기 졸업을 못 하면 또 그런 망신

이 없겠지. 난 얼른 돌아가서 해야 할 산더미 같은 조기 졸업 과제를 떠올리고 속으로 오십 번째의 한숨 을 쉬었다.

황제 폐하의 곁을 수행하기 위해 비서가 되려면 이번에 한 방에 졸업 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조기 졸업 자체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도 했고, 내게도 더 이상의 여유 시간이 없었다. 내 전임, 그러니까 현직 비서님께서 곧 퇴임하실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까.

아카데미를 오가는 것 이외에 남 는 시간 모두를 졸업 과제에 쏟아부 었다. 나는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쪼개 가며 책과 과제 사이 에 파묻혀 있곤 했다. 다행히도 황 궁 도서관 중 일반 영역까지는 접근 권한이 주어졌고, 과제를 위한 자료 수집은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겨우 하나의 과제를, 그것도 개중 에 제일 만만한 마법 생물학 교수의 것을 모두 끝내고 날짜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사흘이 지나 있었다. 그 리고 또 다른 과제를 완수했을 땐 또 사흘이 지나 있었다. 물론 그 둘 은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통과할

확신이 있을 정도로 꼼꼼하게 썼다. 거기에는 확신이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가 무서웠다.

그리고 주말 동안은 식사 시간 이외에는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가 고 과제에 몰두했다. 얼마나 정신없 이 과제를 했는지 사이사이 루아나 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밥을 먹는 것 도 새까맣게 잊어버렸을 거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여덟 개의 과제 중 네 개를 완료하여 아카데미 로 안고 가 제출했다.

강사님들은 한결같이 같은 태도로 과제를 받아 들었다. 처음엔 의심하 고, 그다음에는 과제를 한번 죽 훑 어본 다음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 고. 그리고 내 퀭한 몰골을 보고 안 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는 거다.

마지막으로 꼭 이런 말을 덧붙이 곤 했다.

“황제께서 마차까지 태워 보내는 인재라는데, 내가 너무 혹독하게 구 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원래 아카 데미 졸업 요건이 쉽지 않아 그런 거니, 셀레스티아 양도 이해하게.”

황제 아래로 발탁된다고 해도 나

는 그저 그들의 제자에 불과한데,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황제의 마차를 타고 오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일까?

새삼 부담스러운 마음이 되어 하 교 시간까지 시간을 하릴없이 보냈 다.

제록스 강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카데미의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 다. 다른 강사님께 여쭈어봐도 장기 출장을 갔다는 말 뿐이었다.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말

뿐이었던걸까? 아니면 황제께서 어 떤 조처를 취하신 걸까?

상념에 잠겨 막 마차에 올라타려 는데, 기사님이 내게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아카데미 안에 계신 동안 도착한 전갈입니다. 별다른 마법적 조처는 되어 있지 않은 편지니 안심하고 개 봉하셔도 됩니다.”

“아, 네……『’

겉봉을 뒤집는데 보낸 사람 이름 을 적는 곳에 ‘세렉’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그도 참 폼이

라는 폼은 다 재는 주제에 엄청난 악필이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해서 저도 모르 게 편지를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가, 비뉴스의 의아한 듯한 눈길을 받으며 나는 그것을 머뭇머뭇 다시 주워 들었다.

내용을 읽지 않고 바로 버려 버 리거나 불태워 버리지 않은 것은, 세렉과 황태후가 연관되어 내 정보 가 둘 사이에 오가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정말 그 바퀴벌레 같은 놈은 내 인생에 끈질 기게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 다.

다시 만났을 때 그렇게 끈덕지게 굴었는데, 그 뒤로 다시 연락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리라곤 생각지 않 았다. 나는 침착하려 애쓰며 겉봉을 뜯었다.

겉봉의 글씨만큼이나 악필로 가득 차 있는 편지의 내용은 참으로도 간 단했다.

오늘 시간이 나면 사미디온과 함 께 식사나 하자는 거였다.

개새끼, 어디서 내 동생 이름을 적을 용기가 났어? 분명 저번에 만 났을 때 그러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 데.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당장

편지를 갈가리 찢어발길 수는 없었 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갑자기 연락 한 거지? 황태후와 연관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만나자는 꿍꿍이가 의심스러웠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세렉은 내 능력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가 함부로 말을 흘리고 다니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아 두고 싶었다.

결국 만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은, 그를 본다고 해도 마음이 조 금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 는 까닭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다행

이었다. 그런 개새끼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한 톨의 흔들림도 없 으리라는 것을 맹세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 내 종적을 미리 말 하지 못한 것 하나가 마음에 걸렸 다. 방과 후에 하는 교내 활동은 물 론이고 사소한 약속도 웬만해서는 모조리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 에 말하지 못한 일이 이렇게 갑자기 생긴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패왕은 늘 그렇듯 숨 돌릴 틈도 없이 일정이 바쁜 분이라, 수도 안 에 머물러 있는 날만큼은 합병과 마 물 처리에 신경을 기울이느라 줄장 이 잦았다. 오늘도 그 출장을 나간

날 중 하나였다.

언제고 찾으실 땐 곁에 있으라고 말했는데.

듣기에 따라서 낯뜨거울 수 있겠 지만, 실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닌 대사를 입 속으로 웅얼거려 보다가 결국 후다닥 다녀오기로 마음먹었 다.

황제의 종적에 대해서 내가 모조 리 알아야 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기에 는 황제는 너무 바쁜 몸이었으니까. 그냥 빨리 돌아가면 되겠지, 황성으 로.

“저, 비뉴스.”

비뉴스는 창밖을 경계하듯 노려보 고 있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이 편지를 전달한 쪽으로 다시 답신을 보낼 수 있나요?”

“ 네.”

“그렇다면 잠깐만 기다려 주세 요.”

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친구 사 이에나 하는 방식대로 세렉이 보낸 편지의 겉봉에다 답신을 휘리릭 갈 겨 편지를 뒤집어 봉했다. 중앙 광

장에 있는 분수 근처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나마 사람이 많으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이걸 돌려보내 주시고, 저희는 중앙 광장으로 가요.”

“ 네.”

나는 약속 시각까지 남는 시간 동안 미리 중앙 광장에 있는 공원에 서 과제를 좀 들여다볼 셈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뿐만 아니라 수도 시민들이 산책하거나 앉아서 책을 읽곤 하는 중앙 공원은 퍽 아름다운 조형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

난 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차를 멀찍이 세워 두고 걸어왔 음에도 황실 문장이 새겨진 망토를 두른 비뉴스가 내 곁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온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게다가 비뉴스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에 신경이 곤두선 탓인지 사람들을 눈빛으로 죽여 버릴 것처 럼 쏘아봤기 때문에 나는 더 많은 주목을 사야 했다.

“비뉴스, 좀 경계를 풀 순 없어 요?”

“사방이 탁 트이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있는 곳에서 도보로 이동하

는 중에 말입니까? 어렵습니다.”

정말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책장 을 넘겨 보겠다는 계획을 재빨리 포 기하고, 광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근 처의 펍으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세 렉이 나타난다면 불러들일 수 있는 위치였고, 낮의 펍은 사람이 적었으 니까 주목을 덜 사도 된다.

비뉴스도 천장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오자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 았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다섯 번째의 과제 서적을 뒤적거렸다. 정

말 졸업이 뭐라고 이렇게 과제를 하 나같이 변태처럼 어렵게 만들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졸업까지 익혀야 하는 지식들을 모조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하여 만든 과제라 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잡학들을 하나의 주제에 다 넣 으려다 보니까 정말 괴랄한 주제문 이 만들어지는 거다.

조기 졸업 신청자마다 다른 주제 문을 준다고 들었는데, 매번 ‘딸기 독초를 삼킨 날개 쌍둥이 돼지의 해 독법과, 동일한 돼지를 조리하여 먹 은 인간의 해독법을 각각 서술하시 오. 그리고 그 제조법과 재료의 원

산지 및 특성에 대하여 항목별로 정 리하시오.’ 같은 괴상한 주제문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 내는 걸까?

날개 쌍둥이 돼지의 창자가 그려 진 생물학책을 한참 읽어 내리고 있 자니, 나름대로 재밌긴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공부가 적성에 맞 긴 한 것 같았다.

책을 읽느라 시간이 흐르는 걸 까맣게 잊고 있는 와중, 순간 등골 이 오싹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번 쩍 들었다. 대체 뭐지? 예사롭지 않 은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내게 마법적인 어떤 능력은 없었 다. 다만, 마법을 감지하거나 그것의

색, 냄새, 모양, 느낌을 감각하고 분 석하는 것만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 를 몇 번이고 둘러보았다. 누군가, 나나 혹은 다른 사람을 상대로 공격 마법을 쓰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 자신이 대단치 않다는 이유로 공 격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팔 자 좋은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내 가 이유가 아니라 내가 모시는 분 때문에라도 나는 언제든 누구로부터 위협받을 수 있는 거다.

내가 갑작스레 주변을 살피자, 비 뉴스도 태세가 일변하여 창 바깥을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선가 마법의 기척이 느껴지 는 것 같아서요.”

비뉴스는 내 말에도 놀라지 않았 다. 주위를 관찰하는 능력에 있어서 는 나보다 몇 배는 더 탁월한 그는 광장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자 때문인 것 같습니 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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