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새 문을 방금 단 게 틀림없는 반 짝반짝한 경첩을 손으로 쓸어 보았 다.
이런 것도 전부, 시종장님의 배려 로 이뤄지는 일들인데.
시종장님이 황태후에게 밀고한 사 람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그를 온 전히 믿고 따를 수 없는 게 사실이 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인간적인 호 감을 한순간에 떨칠 수는 없었다.
따뜻한 물로 씻고 폭신하고 따뜻 한 이불 사이에 드러눕는 사이에 그 복잡한 생각들은 하나씩 정리되었 다. 약에 취해 잠든 시간이 그리 길
지 않았기 때문인지, 긴 하루 동안 계속 마음고생에 몸 고생을 했기 때 문인지 잠은 쉽게 몰려왔다.
하지만 어렴풋이 잠들기 직전에 웃음이 자꾸 나서 완전히 잠에 빠져 들 수가 없었다.
쿠키 꾸러미를 정말 황태후가 주 웠다니.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 다가 온 사방에서 쿠키 꾸러미가 나 와서 당황했을 황태후의 얼굴을 상 상하니 잠이 들려다가도 웃음이 흘 렀다.
긴 생각 끝에 황제의 얼굴이 떠 올랐다. 잘했다고 칭찬하던 목소리 와 아주 조금 휘어지던 눈매. 그리
고 제록스 강사님을 내가 직접 떠봐 도 된다고 허락해 준 것.
아주 어렵게 얻어 낸 신뢰였다. 그의 말대로 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니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이 기 회를 어떻게든 잘 활용해야만 했다.
아카데미에 가서 제록스 강사님의 얼굴을 보고 뭐라고 해야 할지를 떠 올리다가, 나는 까무룩 잠에 빠져들 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는 제록스 강사님이 이미 도망치고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게 약 을 먹인 자라는 걸 추론해 내지 못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테니 까.
하지만 아카데미 조회 시간에 그 는 버젓이 나타났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동그란 안경테가 인상적인 모습 그 대로였다.
교탁 앞으로 간 그는 서둘러 자 리에 가서 앉는 우리를 기다렸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좋은 아침입 니다. 오늘 알려 드릴 사항은 교실 이동이 좀 있네요. 마법 약초학 이
반의 수업은 야외에서 진행될 예정 이었으나 실내에서……
나른한 목소리로 설명하면서 학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는 모습까 지도 여느 때와 같았다. 나와도 잠 깐 맞닿았던 시선은 가볍게 흘러 지 나갔다.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에 내 가 뭔가 착각한 건 아닌가, 내게 독 약을 쓴 것은 다른 사람인 게 아닌 가 하는 그런 의심들이 머릿속을 떠 돌아다녔다. 하지만 착각일 리는 없 었다.
나는 조회를 마치고 나가는 그의 뒤를 따라 강사 사무실로 향했다. 제록스는 내가 뒤따라오는 기척을 눈치챘는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이 숨바꼭질 같았다. 혹은 어려운 퍼즐 같기도 했다.
제록스 강사는 태연자약하게 매일 아카데미에 잘도 출근해서 여느 때 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고, 황 제는 그런 그를 언제나 잡아 가두거 나 목을 베어버릴 수 있는데도 그러 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 둘 사이에서 나 혼자만 생각이 많은 채로 바삐 오가며 어떻게든 그 집단의 목적을 알아내려 애를 쓰는 거다.
언제나처럼 기분 좋은 공기가 감 도는 그의 강사실로 들어선 나는 권 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가까이에 앉아 마주하는 강사님의 얼굴은 언 제나처럼 선해 보이기만 했다. 쌍꺼 풀이 없는 가는 눈매도, 옅은 색소 의 눈도, 그리고 큰 안경과 북슬북 슬한 녹색 머리도.
강사님은 내가 가만히 앉아서 말 을 고르기만 하자, 작게 웃으며 사 탕을 내주었다.
“어쩐 일로 왔어요, 셀레스티아 양‘?”
어제와 같은 사탕. 내가 정말 대 단한 멍청이가 아니라면 이걸 먹진 않겠지.
하지만 그가 이것을 의도를 가지 고 내게 쥐여 줬던 것이라면? 내가 이 사탕을 받아 들고 먹지 않는다는 것은 곧장 그를 의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내가 멀쩡히 깨어 있는 이상, 그 를 의심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태연 하게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설마 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 을 것이다. 하지만 그 확신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해독제를 미리 상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관찰하는 기색이 느껴 졌다.
정말 사소한 낌새였지만 나는 이 로써 확신했다. 제록스 강사가 의도 를 가지고 내게 ‘돌용의 침’을 먹인 것이 틀림없다고.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직설적으로 묻는다고 대답해 줄까? 해 주지 않는다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
었다. 모처럼 황제 폐하로부터 얻어 낸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여쭙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요.”
“상담인가요?”
“돌려 말하지는 않을게요. 저…… 어제 주신 사탕이요.”
“ 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지만, 난 심호흡을 하고 단숨에 물었다.
“강사님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강사님께서 어제 주신 사탕, 왜 주신 거예요?”
제록스 강사님은 영문을 모르겠다 는 듯 눈을 깜박였다.
“제가 준 사탕이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실 생각은 아니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요.”
“그 사탕에 약이 들어 있는 것도 모른 척하실 셈이세요?”
“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라고 물어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황제에게 모처럼 받아낸 허락이었
다. 허투루 이 기회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신중히 생각하려 애쓰며 그에게 물었다.
“아카데미에 있는 내내, 강사님은 제게 잘해주셨잖아요. 신분이 낮아 도 차별하시는 법도 없고요. 전 강 사님을 존경해왔어요.”
“감사합니 다.”
“내내 시간이 있었잖아요. 강사실 에도 자주 왔고요. 그런데 왜 갑자 기 이런 일들을 벌이신 거죠……? 전 잘 이해가 안 돼요. 대체 강사님 께서 제게 돌용의 침 같은 걸 왜
주셨는지.”
“제 곁에서 연구원으로 남는다고 했다면, 좀 더 시간이 있었을 텐 데……, 조기 졸업이니 황궁으로 들 어간다느니 하니까 그렇잖아요.”
여느 때와 같은 어투와 여느 때 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박자 늦게서야 그가 제 행동을 자백했음을 깨달았다.
책상 위 바구니에 든 사탕들을 바라보며 이상한 얼굴을 해보이던 그가 여전히 천진한 얼굴로 대꾸했 다.
“곧장 쓰러지지 않아서 이쪽도 큰
일이었으니까요.”
워낙 여상한 어투라서 난 내가 뭔가를 잘못 들은 거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가 범인이라고 확정 짓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이렇게 순 순히 털어놓자 속이 울렁거리고 손 에 땀이 뱄다.
나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위 험에 노출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고 생각했는데, 아카데미 안까지 어 떤 이유로든 나를 노리는 자가 있었 다니. 내가 순진했다. 황제를 모시기 로 한 이상 24시간 호위를 데리고 다니기라도 해야 했다.
“마법이 듣지 않는 사람은 저도
처음 봤어요. 처음에는 마법 참관을 하는 학생이 실습은 하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만 여겼는데, 골디나에서 온 마법장교가 이상한 말을 하는 걸 들었지요. 합병 직후였나?”
골이 띵했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다닐 사람 도, 내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도 한 명밖에 없었다.
세렉. 세렝게반. 얼마나 내 인생 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인걸까?
“그래서요?”
“그런 능력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 리라곤 생각을 못했어요. 만약 그런
편리한 능력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문제? 제가 필요한 일이라면 제 가 도와드리면 되잖아요. 왜 사람을 납치하고 그래요?”
제록스 강사는 술술 털어놓다 말 고 갑자기 입을 다물고 빙긋 웃었 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웃는 그 웃음이 너무 친숙해보여서 나도 모 르게 따라 웃을 뻔한 것을 참는 게 고작이 었다.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했다. 협조 를 요청했을 때, 내가 도와주지 않 을 일이라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 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수업이라도 하듯 유들유들하 게 말하는 강사님을 쏘아보았다.
“제게 무슨 쓸모가 있는지 말해주 세요.”
“황제가 제 목을 치지 않는 걸 보 면 좀 더 두고 보기로 한 것 아닌 가요? 셀레스티아 양을 꽤 아끼는 모양이죠. 이렇게까지 말을 잘 들어 주는 황제 폐하가 아니실텐데.”
“말 돌리지 말고……
“황제 폐하께 전하세요. 제 목숨 같은 건, 필요하면 언제든 거둬가시 라고. 전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셀레스티 아 양도 앞으로 더 이상 아카데미에 고개를 내밀 일도 별로 없질 않나 요?”
조기졸업 요건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내가 굳이 올 필요가 없긴 했다.
유들유들한 그의 대답이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았다.
“하나만 더 물을게요. 제 침실에 왔던 그 남자는 대체 누구였죠?”
“그것도 비밀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황제의 심복이 쫓아가지 못할 만큼. 아마 내가 짐
이 되지 않았다면 황제 폐하 본인께 서는 절대 놓치지 않았겠지만, 그래 도 어마어마한 실력임은 틀림없었 다.
그런 자와 작당해서 나를 납치하 려는 이유가 대체?
제록스 강사님은 제 앞의 사탕들 을 쥐었다가 놓더니 씩 웃었다.
“호위기사가 붙기 전에 알아냈다 면, 일이 이렇게 성가셔지진 않았을 텐데요.”
“……강사님.”
“졸업논문 응원할게요.”
도망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을 믿
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뒷일 은 황제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도망을 가던, 그렇지 않던 감 시는 황제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먼저 이야 기를 나눌 수 있어서. 속시원하게 알아낸 것은 없었지만, 일말의 가닥 은 잡은 것 같았다. 황제의 영리함 과 강대한 힘은 물론 인정할 만한 것이지만, 너무 많은 소중한 것들을 위협받고 있는 그는 방어적이고 동 시에 공격적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강사실 을 나오려고 할 때였다. 그가 한마 디를 보탰다.
“저, 셀레스티아 양.”
“ 네‘?”
“연말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 왜죠?”
“일 년 중 유일하게 외부인 출입 이 허락되는 날이거든요. 아마…… 이런저런 일이 있지 않을까요?”
날 걱정하는 걸까? 제록스 강사 는 대체 누구의 편인거지?
연말 파티라니. 생각도 안 해 봤 다. 그러고 보니 연말 파티가 그리 머지않았다. 비뉴스가 내게 딱 달라
붙어 있는 등하굣길도 노리지 않을 테고, 이제 두 번 다시 황궁에 있는 나를 노리지도 않을 테다. 그렇게 황제가 나타날 거라곤 예상도 못 해 서 애를 써서 침입한 것이었을 테니 까.
그의 말이 맞는다. 다음에 노림당 한다면 연말 파티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독약을 쥐어준 그의 조언이다. 진지 하게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제록스 강사의 뻔뻔한 얼굴 을 일별하고 돌아 나왔다.
그 날은 아카데미에 앉아 있기만 해도 필요 이상의 주목을 너무 많이 사서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들어오는 강사님마다 내게 조기 졸업 과제가 잘되어 가고 있냐 고 물어 왔고, 황실의 마차를 타고 왔다는 것만으로 내게 잘 보이려고 들던 애들은 더욱더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던 거다.
심지어 오늘은 8반의 비키까지 우리 반 앞에 행차하셔서 복도를 막 고 서 있기까지 했다. 비키가 오는
건 상관없었지만, 비키가 움직이면 덩달아 그녀를 추종하는 멍청한 한 무리가 함께 다니니 문제였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