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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35화 (35/103)

- 35화

골디나. 금기. 마법사.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정말로 만약에라도 황제와는 상관없 이 나 단독을 노리는 소행일지도 모 른다는 그런 생각이 든 거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그 복면의 사내는 나를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니 라, 마치 나를 어떤 집단의 일원으 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 였다. 나에게 외롭냐고 물었다. 금기 를 범한 자로서 버티기 힘들지 않냐 고.

금기.

슬며시 왼손을 들어 마법진이 새

겨져 있는 오른 팔뚝을 꽉 쥐었다. 설마 하는 생각을 하지만내 능 력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필요로 하 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래도 짐작 가는 거라곤 이것뿐이었으니 까.

황제는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리고 그들은 황궁에 침투하면 서까지 너에게 접근했다. 미리 약을 써 가면서까지. 네가 비명을 지르기 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까.”

“ 네.”

“아마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 력을 써서라도 납치할 셈이었겠지.

네게 그런 쓸모가 있나?”

“그걸 알아내고 싶어서요. 제가 대체 뭐라고 저에게 접근했나 싶기 도 하지만…… 목적이 저라면, 제가 은밀하게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요?”

“안 된다.”

난 제법 그럴듯하게 그를 설득했 다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이야기를 퍽 잘 따라와 준 사람치곤 어이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아니, 여태 이렇게 열심히 잘 들 어 주고선 이렇게 강경하게 반대할 건 또 뭐람.

“그렇게 무턱대고 반대만 하지 마 시고요. 그들이 처음부터 제 목숨에 관심이 있었으면 독약을 과다 투여 해서 죽여 버리지 않았겠어요? 절 죽일 생각은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안 된다.”

“제록스 강사님도 그냥 이용당한 거면 어떻게 해요? 그냥 잘라 낼 도구로 이용당한 거면요? 그러면 협 박을 하든, 고문을 하든 제대로 된 정보는 못 얻을 텐데, 괜히 아카데 미 강사를 건드리게 되는 거잖아 요.”

“안 된다면 안 되는 거다. 그만두

지.”

끝까지 듣기는 들어 놓고 또 이 렇게 딱 잘라서 거절해 버리는 것 좀 봐.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너무하다, 정말.

“맹수를 잡으려면 맹수 굴에 들어 가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말은 들어 본 적 없다. 너 는, 내가 산 물건 중에서 가장 내 말을 안 들어.”

“하지만 저를 노렸잖아요. 제가 대체 뭐라고……소 정확한 의도를 파 악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부탁 드려요. 대신 위험하지 않게 접근할

게요.”

황제는 대답하는 대신 기가 차다 는 얼굴로 나를 묵묵히 쏘아봤다. 당장에라도 ‘그냥 해 본 소리예요.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난 어떻게든 입을 꾹 다물고 그 시선을 마주해 보려 노력했다.

언제나처럼 먼저 시선을 피한 것 은 나였다. 비꼬는 듯한 그의 목소 리는 덤이었다.

“황태후와 연관 없는 세력이라는 것은 아직까진 추론에 불과하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뒷일은 내 가 알아서 하지.”

부하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그렇게 자주 들었다고 했던가. 그는 그런 문제에 있어선 도통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딱 잘라 단호하게 결론을 내 버 리면 더 이상 내가 말을 붙여 볼 구석도 없는 거다.

난 입을 비죽 내밀었지만 어쩔 도리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문 바깥쪽에서 외치는 시종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아헤브 공작님께서 뵙기를 청 하십니다.”

“들라고 전해라.”

황제의 대답을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날 내쫓을 셈이었던 그 는 의외로 거실의 의자를 내게 권했 다.

저번에도 분명 황태후와 비키의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 나를 동석하 게 했지.

정말 나를 앞으로 자신의 사람으 로 부릴 생각인 거다. 그래서 미리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게 하는 거다.

난 기쁜 마음으로 의자에 궁둥이 를 붙였다. 다만 기절했다 일어나는 바람에 다 구겨진 교복 매무새를 억 지로 정리해야 했다.

빈첸조와 꼭 닮은 얼굴을 한 리 온 티아헤브 공작은 늘씬한 자태와 화려한 옷차림을 뽐내며 거실로 걸 어 들어왔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땅에 대며 멋들어지게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천세만세 하시 옵소서.”

황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쳐다보지 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리온 공작 은 내가 동석해 있다는 것이 기분 나쁠 법한데도 가볍게 내 인사를 받 는 게 다였다.

“무슨 일로 들렀지?”

“오늘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좀 무사한가 해서 들렀사옵니다, 폐 하.”

“ 내가?”

“아니, 습격당한 사람이 폐하도 아닌데, 내가 왜 애먼 남정네를 걱 정합니까? 너 말고 네가 아끼는 그 종달새……;

리온 공작은 황제가 집어 던진 쿠키 바구니에 정통으로 얻어맞을 뻔하곤 입을 다물었다. 문관인 그는 반사 신경이 좋지 않은지 어떻게 잡 긴 잡았지만 쿠키는 죄다 쏟아 버렸 다.

황제가 아끼는 종달새? 습격당한

사람은 난데?

아무래도 리온 공작의 언어 습관 은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기억해 두 며 나는 다음 대화에 귀를 기울였 다.

리온 공작은 태연자약하게 무릎 위에 떨어진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손에 쥔 반쪽의 쿠키를 슬쩍 쳐다보는 걸 보 니 정말 맛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렇겠지. 나조차도 그걸 먹곤 정신 이 번쩍 들어서 가져가도 되냐고 물 어봤을 정도인데.

“하하, 이 쿠키 때문에 온 황실이 난리가 났다고 하기에 대체 무슨 소

린가 했더니, 정말 맛있긴 하네그래. 달콤하면서 쉽게 물리지 않을 맛인 데? 아주 고소하고 말이야. 버터 향 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본론만 말해. 오늘 할 일이 많아.”

“쯧쯧, 성질이 급하기는. 누구 하 나 죽이러 갈 기센데 그래?”

“ 맞다.”

리온 공작은 농담으로 한 말인 것 같았지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 고, 대화는 거기에서 뚝 끊겼다. 황 제의 친우라는 리온 공작은 그의 그 런 화법에는 익숙한지 당황하지 않

는 것 같았지만, 말의 내용에는 놀 란 것 같았다.

기묘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공작님, 쿠키 때문에 황실이 난 리가 났다는 이야기는 대체 뭔가 요?”

“아아, 그것 말인가요? 다름이 아 니라, 이 쿠키 때문에 웃지 못할 해 프닝이 벌어지고 있어서 말이에요.”

그는 연회장에서 나를 봐서인지 나를 시녀나 하녀가 아니라 다른 귀 족층 아가씨를 대하듯이 응대해 왔 다.

“이건 사실 비밀입니다만, 제 아 랫사람 중에 황태후에게 심어 놓은 간자도 있으니까 말이지요. 듣기 싫 어도 이야기가 줄줄 홀러들어 온단 말입니다. 물론 이쪽의 사람 중에도 그쪽의 사람이 있겠지만……/

아니, 도대체 어디가 듣기 싫어도 들려오는 건가? 간자를 심어 놨다면 서? 리온 공작과 직접 이야기를 나 눠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마냥 좋은 사람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분도 참 특이한 분이었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맞장구에 힘이 났는지 이야기를 계 속했다.

“황태후가 하는 일이야 정말 허구 한 날 다 이상하지만, 이번에는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서쪽 건물로 가는 통로에 누가 쿠키를 떨어트렸 는지 알아내라고 발작을 한 모양입 니다.”

심장이 떨어질 것같이 놀랐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눈알만 굴려 황제를 슬쩍 봤지만, 심드렁한 그의 적안에선 어떤 기색도 읽을 수 없었 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 네요. 그래서요?”

“다른 것도 아니고 쿠키라니, 정

말 뜬금없지 않습니까? 거기까지만 해도 웃기기 짝이 없는데, 그런데 글쎄, 이게 무슨 영문인지 황태후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쿠키 꾸러미가 온 황궁 내에 돌아다닌다지 뭡니 까‘?”

황제는 여기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 되는지 끼어들었다.

“……은 황궁에 돌아다닌다고?”

“그렇다니까.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아주 귀하던 황제의 쿠키라는 것이 황제께서 하사하셔서 온 황궁 내 아 랫것들이 맛볼 수 있게 되었다지 뭔 가. 처음엔 출처를 확신하던 황태후 의 부하들이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쿠키 꾸러미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 을 보고 발작을 해서는……소 아무튼 황태후 그 여자는 정말 무슨 생각인 지 모르겠다니까.”

“정말 하는 짓마다 영악해. 우습 기 짝이 없군.”

황제의 붉은 눈이 그 말을 하며 정확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말이 황태후를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해 있으며, 칭찬의 의미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사냥꾼이 사냥개를 칭찬할 때 저 런 눈을 할까? 난 황제가 이따금 웃는 얼굴을 보일 때마다, 그리고 내가 머리 써서 한 일을 칭찬할 때

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심 장이 기분 좋게 울렸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황태후가 기분이 안 좋아서 사람들 을 추궁하고 다니는 바람에, 지금까 지 웃다가 왔지 뭔가. 대체 쿠키 파 티라도 한 건가 뭔가? 응? 물어보 고 싶어서 방에서 쉴 수가 없어서 내 직접 왔지.”

“아직도?”

“ 응‘?”

“아직도 기분이 안 좋다던가?”

“그렇다니까? 방금까지도 발작하 다가 시종 뺨을 때리는 바람에 둘이

나 볼이 새빨갛게 부어올라서 지나 가는 걸 봤는걸. 정말이지 외척이고 뭐고, 빨리 그 여자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황궁 내 사람들이 남아나질 않겠어.”

황제가 턱을 쓸었다.

“아직까지 기분이 안 좋다……,”

“왜, 그게 무슨 의미라도 있어?”

“아니다. 좀 알아봐 줄 게 있는 데.”

“뭐든 말해.”

“시종장의 부인, 혹시 알고 있 나?”

“시종장이라면…… 그야 알지. 기 사 랑그샤가 부인이지 않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러고 보니 어딘가에 잡혀 있다 는 소문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알아보는 게 좋겠군.”

리온은 어떤 일 때문에 그러는지 반문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 였다.

황제는 날 바라봤다.

“이만 나가 보지.”

“ 네.”

난 최대한 배웠던 황실 예절들을 떠올리며 품위 있게 인사를 올렸다. 턱짓으로 내 인사를 받아넘긴 황제 는 막 몸을 돌리려는 내게 말을 던 졌다.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좋겠지? 안전한 범위 내에서.”

“네……?”

“해 보라고. 대신 그 목숨은 네 것이 아님을 명심해.”

난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한번 냉큼 인사를 올렸다. 황 태후의 현황을 듣고 보니, 내게 사 람을 보내고 독을 먹인 집단과 황태

후가 전혀 다른 집단이라는 것을 확 신한 게 틀림없었다. 내게 접근했던 만큼, 내가 그 의도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한번 시도해 봐도 나쁘지 않 다는 판단이 선 거겠지.

“입이 아주 찢어지는군. 가 봐.”

“ 네.”

돌아 나오는데 둘의 말소리가 다 시 이어졌다.

“아무래도 종달새는 건강한 것 같 군그래. 그렇게 안달복달 의사를 불 러다가 치료하게 하더니, 마법이 안 듣는다고 의사에게 욕을 퍼부은 효 과가 있었나 보네.”

“쓸데없는 소리……-”

그 말을 끝으로 응접실의 무거운 문이 닫혔다. 그 뒤의 대화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9, 자꾸만 얽히는

방에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한 내 방이었다. 분명 창문도 깨진 채였고, 문짝을 다 부수고 쳐들어온 황제폐 하 덕분(?)에 문도 남아 있지 않은 황량한 상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엇 하나 불편한 구석이 없도록 싹 수선되어 있었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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