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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34화 (34/103)

- 34화

내가 입을 삐죽거리는데 황제가 다시 채근했다.

“일정 시간 이상, 한 공간에 함께 있었거나, 대화를 나눴거나, 음식을 나눠 먹은 사람 중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나?”

나는 별수 없이 머리를 굴려 보 았다.

“어젠 하필 너무 많은 사람을 만 나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아카 데미에 가는 길에는 빈첸조와 함께 있었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선 정말 많은 사람들

하고 얘기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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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이야기한 사람은?”

“빈첸조가 연말 파티에 같이 가자 고 해서…… 아무튼, 짐을 들어 준 애가 있는데……/

“연말 파티?”

황제는 화제가 전환되면 그 화제 에 얼른 편승하는 타입인가? 쓸데없 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황제를 멍하 니 보다가, 난 빈첸조가 짐을 왜 들 어 줬는지를 생각해 냈다.

바로 강사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 이다.

그중에서도오

“그러고 보니 이상한 말을 한 분 이 계시긴 했어요.”

“어떤……?”

“마치……,”

마치…… 내가 공격당한 것을 안 다는 것 같은 뉘앙스의 말이 있었 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갔 는데, 지금 와서 곱씹어 보니……소

“옷차림이 바뀌었네요. 교복에 무 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하고 물은 사람이 있었어요. 이상하죠? 보통은 ‘교복 바꼈네요?’라고 하잖아요.”

“그게 누구지?”

“하지만 그분은 강사님이신데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뒤늦게 허브 향이 나던 달 콤한 사탕을 떠올렸다. 하지만 말이 혀에 걸려 뒤늦게서야 대답할 수 있 었다.

“제록스 강사님이요……,”

그는 확신 없이 중얼거린 내 작 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 강사?”

“그…… 제록스 강사님이라고 계

신데, 제 담당 강사님이시기도 하고, 이번에 조기 졸업 요건 상담도 하러 갔었거든요. 그때 좀 이상한 말씀을 하신 게 마음에 걸려서요. 분명…… 먹은 것도 있고.”

“정확한 시간은?”

황실 마차를 타고 간 이유로 나 를 쫓아다니는 멍청한 귀족 놈들 때 문에 도망 다니느라 바빠서 점심을 거르고 바로 찾아뵈러 갔었다. 정확 한 시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말을 함으로써 범인이 완전히 특정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 았지만 말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12시 반이요.”

“네가 먹은 약초는 마법과는 조금 도 상관없는 고전적인 약초였다. 아 마 그러니 당했겠지만. 그 약초의 이름은 ‘돌용의 침’. 그 성분은 약물 적인 것과……;

“마법의 혼합이죠.”

황제는 제가 흐린 말끝을 내가 낚아채듯이 대답한 것이 마음에 드 는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씩 웃었 다. 마치 개를 쓰다듬듯 머리를 아 주 가볍게 톡톡 만져 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받은 거야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신없는 속내로도 어이 가 없었다.

내가 먹은 약초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오늘 만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의심 하고, 내가 먹었던 것들을 돌이켜 생각하는 동안에 황제는 가만히 입 을 다물고 제대로 된 추론을 해내는 지 지켜보고 있었단 말 아닌가?

난 황제가 이렇게 매번 사람의 지능을 시험하듯이 구는 것이 마음 에 들지 않았다. 당장 제록스 강사 님을 의심하고 있는 이 심각한 정황 이 아니었다면 투덜거렸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제록스 강사님을 범인으로 몰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는 처음부터 내 게 상냥했고, 내 편이 별로 없었을 때부터 아카데미에 잘 적응할 수 있 게 도와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도, 의 심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본심이었 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까 황제가 내 방에 들이닥쳤을 때 지었던 싸늘한 얼굴 을 잊지 않았다. 내 방에 낯선 사람 이 서 있던 그 상황도. 봐주고 넘어

갈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일이 아 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내게 보 이는 일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착한 사람일 것이라 고 단정 지을 만큼 순진하게 자라 오지 않았다. 멍청하게 굴어서는 어 제까지 친구였던 자에게 소매 안에 든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탈탈 털 리는 것이 뒷골목의 삶인 것이다.

난 제록스 강사를 두둔하는 대신 알고 있는 정보를 이어 말했다.

“돌용의 침은 마법과 약물이 섞여 효과를 발휘하는 마비약으로, 통상 의학적 용도나 동물을 생포하는 등

의 용도로는 사용하기에 알맞지 않 아 시중에서 거의 거래되지 않는 약 물로 알고 있습니다. 용량을 과하게 투여하면 즉사한다는 사례도 있지 만, 맛과 향이 강해 한 번에 과량을 투여할 시 눈치채지 않을 수 없는 약재로, 해독약만 먹는다면 즉시 마 비가 풀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잘도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마 비는 잘 풀렸군. 그래서?”

“아마 즉시 효과가 있을 거라 생 각해서 사용했겠지만, 제가 아무런 효과도 보이지 않으니 뒤늦게 황실 까지 찾아온 거겠지요.”

“그렇다면?”

“제록스 강사님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재밌다는 듯 대꾸했다.

“보기보다 단호하게 말하는군. 그 자와는 친분이 있는 게 아닌가? 주 는 음식도 넙죽 받아먹을 정도였다 며‘?”

“그렇습니다.”

황제의 적안이 내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의외로 침착하군.”

“제가 어쩔 거라 생각하셨습니 까?”

“글쎄, 짐작은 안 했지. 그냥 뒤

통수를 맞고서도 너무 덤덤한 것이 마치……,”

“ 마치 ‘?”

“나 같아서.”

예상하지 못한 대꾸였다.

그는, 내가 아직 제대로 주군으로 모시지도 못하는 나의 폐하께서는, 제 아비 되는 전대 황제가 죽은 뒤 로 오죽 많은 승냥이 같은 외척의 등쌀에 시달리긴 했을 터였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조금쯤 편해 보이는 것도, 내겐 어떤 연고자도 없기 때 문일지도 모른다. 자랑은 아니지만 노예상에게 팔려 가다가 간신히 황

제의 도움을 받은 나는 정말 끈 떨 어진 연 같은 존재였다.

난 그런 그에게 작게 웃어 보였 다.

“전 덤덤한 게 아닙니다, 폐하.”

“그러면?”

“아무리 뒷골목에서 살아 온 몸이 라고는 하나, 저를 높이 기용해 주 기로 하신 폐하의 뜻 아래에 우선순 위가 생겼을 뿐입니다. 폐하와 제게 해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따질 필요가 있겠지요.”

픽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젠 아부도 퍽 할 줄 알게 되었

군.”

딱히 아부한 게 아닌데.

그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었 다. 기사도라는 것을 모르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나에게도 조직이라 는 것, 그리고 충성을 다할 존재라 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그것은 기사도보다도 더할지도 몰랐 다. 우리에겐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 였으니까.

“도망간 놈은 추격 단계에서 큰 상처를 입혔다고는 하지만, 못 잡았 다고 하는군. 하지만 아카데미 강사 라는 놈이 있다니…… 꼬리는 잡을 수 있겠지.”

“네.”

“일어설 수는 있겠나?”

해독제를 먹은 뒤로 약효가 도는 정도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은 나뿐 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까부터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 제 일어서도 괜찮겠다고 확신하자마 자 이런 질문을 듣게 되다니.

“ 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 봐라.”

알겠다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 았다.

내가 이 방에서 나서면 그가 어

떤 일을 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내 방에 들이닥쳤을 때 거느렸던 이 들과 같은, 혹은 마물을 사냥하러 갔을 때 데려갔던 마법사들과 같은, 수족 같은 자들을 데리고 아카데미 로 쳐들어가겠지. 그리고 제록스 강 사를 끌어내 그자가 알고 있는 사실 을 모두 실토할 때까지 살지도, 죽 지도 못하게 고문할 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 로.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황 실에 감히 침입해서 황실의 사람으 로 선언된 거나 다름없는 나를 건드 렸다. 응당 마땅한 보복이 뒤따르는

게 당연하다.

아마 제록스 강사도 알고 있을 거다. 내가 깨어나면, 그래서 내가 미주알고주알 하루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만, 그 이전에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흑발의 황제께서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 하 지 않을 일이었지만.

난 그가 꺼지라는 듯이 눈짓하는 문 쪽으로 걸어가는 대신 혀로 입술 을 축였다. 어떻게 말문을 떼어야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 주실까.

“저, 폐하.”

“뭐지?”

“지금, 머릿속으로 제록스 강사님 의 사지를 조각내고 계신 것은 짐작 이 됩니다만, 이번 일은 제게 어느 정도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 까?”

“아깐 두둔하지 않을 셈이라고 하 지 않았나?”

“두둔할 생각이 아닙니다. 다만 문득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 입니다.”

“그 꼴을 하고 돌아와서는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군.”

그는 사람의 소용 있는 말은 퍽

귀담아들어 주는 편이었다. 나는 거 기에 건 거다.

황제는 예상대로 빨리 꺼지라고 재촉하는 대신 말이나 해 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설득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 의가 들었지만 해 볼 수밖에 없었 다. 내가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만 빼면, 지금으로선 이보다 최적의 계 획은 없으니까.

난 숨을 작게 들이쉬고 입을 열 었다.

“황태후 마마께 폐하의 용태에 대 해 밀고한 것은 바로 시종장님이세

요.”

“뭐……?”

“저번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지만, 곱씹다 보니 목소리가 귀 에 익더라고요. 틀림없어요.”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 네.”

난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가 시 종장과 나 둘 중에 어느 쪽을 더 믿을지는 모르는 문제였다. 나는 그 의 판단을 기다리며 아주 잠깐의 침 묵을 기다렸다.

황제는 잠깐 생각하는 듯 붉은 눈을 굴리더니 귀찮게 되었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시종장이라. 과연 그라면 내가 어릴 때의 일도 알고 있을 테니까, 어느 정도 알고 있겠군.”

“ 폐하.”

“그렇군.”

“괜찮으세요?”

“뭐, 괜찮지 않을 것도 없지. 의 외긴 하지만, 잘라 낼 썩은 가지를 알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야. 뿌 리째 썩어 버리는 게 나쁜 일이지.”

날 믿는 걸까?

날 믿지 않더라도 내 앞에선 그

런 척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의 속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시종장님께서 황태후 마마께 황 제 폐하의 체질을 말했을 때, 황태 후께선 조금도 믿지 않으시는 눈치 였어요. 그런데도 제가 황태후 마마 께서 그 증언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이유는, 제가 그 뒤에 갑자기 공격당했기 때문이 에요.”

“그래서?”

“그런데 그 두 집단이 만약 서로 다르다면요?”

“ 다르다……?

“폐하께서도, 황태후 마마께서는 폐하의 체질에 대해서 믿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정말로 그럴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굣길에 날 공격한 그 마법사가 마법 무효화 능력을 알아내기 위해 서 황태후가 보낸 사람이라고만 생 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제록스 강사님과 내 방에 쳐들어왔던 그 남 자의 목적은 다른 게 아닐까?

“두 집단이 전혀 다르고, 정보도 공유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군.”

황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알아챈

것 같았다.

“네.”

“황태후와는 다른 목적이 있는 제 3의 집단이 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에 서 있던 그 남자는 흘끗 봐도 골디나 사람이었다. 분명. 착각 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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