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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33화 (33/103)

- 33화

뭐든 손에 잡히면 죽여 버리겠다 는 듯 주위를 냉철한 눈빛으로 쏘아 보는 황제의 얼굴이 여느 때와 같이 차가웠다. 차가운 인상의 얼굴도 보 다 보니 적응이 되어서 조금쯤 착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무서운 얼굴이다

얼굴까지 튄 나뭇조각이 볼이 때 리는 감각은 생생했다. 아무래도 이 게 꿈이 아닌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방금 들었던 큰 소리는 내 방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였던 모 양이다.

“쫓아!”

황제가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마법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고서는 공기 중에 흩어진 마법의 기운 또한 잘 느끼지 못한다. 마법사들이 움직 였을까?

멍하니 시선만 옮겨 그를 바라보 는데,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황제가 눈을 찡그리고 날 내려다봤다.

“알람 마법을 걸어 둔 게 천행이 군. 마법엔 안 당할 것 같아서 그냥 두어도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는 데…… 왜 이 모양이지?”

잘못했다는 듯 질책하는 말에 나 는 대꾸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쉽사 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어설픈 소리를 내 보려다가 빠르게 포기하 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그대로 걸음을 떼기 시작 했다. 아니, 설마 이렇게 공주님 안 기를 한 채 복도를 돌아다닐 셈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하 는데. 황제의 품에 안겨서 복도를 돌아다니는, 그런 이목을 끄는 짓은 하고 싶지 않은데……오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짐 짝이라도 옮기는 듯 짜증 가득한 얼 굴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 복도로 나

섰다.

난 너무 황당해서 덜렁덜렁 들려 가는 사이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좀 처럼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전 신의 근육을 이완시키고 잠들게 하 는 종류의 약물이 있다고, 약초학 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그것에 당 한 게 틀림없다.

고개를 제대로 돌리지는 못했지만 온갖 이목이 다 쏠리는 게 느껴졌 다. 가수면과 이성의 경계에서 아찔 한 기분으로 눈을 꽉 눌러 감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 다.

그 복도를 걷는 순간은 평생과도

같이 느껴졌지만, 어찌어찌 지나가 긴 했다. 이것을 도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황제는 아랑 곳 않고 날 침대에 내려놓았다.

화라도 내려고 눈을 번쩍 뜨는데, 순간 걱정 어린 그의 표정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들 셈은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했나?

말을 하려고 해도 아마 아무런 말도 못 하긴 했을 테지만, 난 할 말을 잃고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정 신을 잃었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무래도 약물에 당하신 것 같습니다.”라는 진중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의식이 또다시 가물가물해졌다. 아 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여느 때와 같이 그의 방 안에 그와 내가 단둘이 있 었다.

그는 내 볼을 쥐고 슬쩍 날 흔들 고 있었다.

간신히 시선이 맞닥뜨리자 그는 한숨을 쉬며 검은색 작은 병을 들어 보였다.

정황상 저게 해독제일까?

어지간히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못 견디는 그는, 의사도 벌써 물려 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손수 병을 기울여 누워 있는 내 입가에 그 액체를 흘려 넣어 주려 했다.

황송하긴 한데…… 요령이 없는 황제가 날 눕혀 놓고 자꾸 액체를 먹이려고 하는 것이 난 그저 공포스 러울 뿐이었다. 그게 기도로 들어가 면 죽지 않을까?

말도 할 수 없는데, 그걸 잘 받아 먹을 거라 생각하면 착각인데요. 눈 꺼풀이 이만큼 움직여 주는 것도 아

주 조금 기적인 상태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사이에 아주 조금은 근육이 풀렸는지, 그가 막무 가내로 입 안에 넣어 준 약물이 기 도로 잘못 넘어갈 뻔하길 반복할 때 마다 간신히 기침할 수는 있었다.

황제는 뜻하는 바대로 되지 않는 게 짜증 나는지 언제나처럼 눈을 찡 그리곤 날 쏘아봤다.

내 잘못이 아닌뎁쇼.

난 화가 난 그의 시선을 멀뚱멀 뚱 마주 보기만 했다.

그는 내 상체를 아주 조금 들어 올려 안더니, 뭘 생각하는지 약을

한참 쳐다봤다. 아니, 그게 해독제면 빨리 먹여 주지 않고 뭘 하는 거람.

답답해서 재촉하려고 입을 어떻게 든 힘을 주어 여는데, 황제가 뭔가 를 결심한 듯 제 입에 머금은 약물 을 내 입으로 옮겨 주었다.

황제의 입에서 내 입 안으로 홀 러들어 온 액체에서는 해독제 계열 의 약초가 가지는 특유의 톡 쏘는 향이 났다. 난 너무 놀라서 그게 식 도로 넘어가는지 기도로 넘어가는지 도 모르고 삼켰다.

그는 내가 잘 받아먹는 모양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 약이 든 병을 기울여 제 입에 머금었다가 내게 흘

려 주었다.

키스라면 솔직히 별로 좋은 기억 은 없다. 하지만 전쟁터나 응급 상 황 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인공호 흡을 하는 것 등은 많이 보았고, 의 료를 위해서 입을 맞대는 것쯤은 아 무렇지도 않았다. 뭐, 황제가 직접 해독제를 입으로 옮겨 줬다고 하는 점에서는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몰라 야 하긴 하지만……소

내가 또 힘겹게 그것을 삼켰다.

두 번째에는 황제는 입술을 맞대 고 있다가 입을 떼는 것이 아주 더 뎠다. 그는 눈을 오래 감았다가 나 를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

서 시선이 맞닥뜨렸다.

황제는 뭔가 느리게 입술을 떼어 낸 것치고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빠르게 제 몸을 바로 했다. 그리 고 내 안색을 가만히 살피더니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짚었다가, 제 이마 를 내 이마에 대어 보았다.

“여전히 열을 측정하는 방법 같은 건 전혀 모르겠군.”

그는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입가에 묻은 약을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그러곤 나를 다시 침대에 잘 눕혀 주고 어쩐지 서두르는 기색으로 자 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당한 건 수면초다. 약효는 그리 빨리 나타나진 않을 거다. 푹 자고 일어나는 게 좋겠군. 대체 어 디서 뭘 먹고 다닌 건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문득 엄지손가 락으로 다시 한번 제 입술을 닦아 냈다. 그러곤 제 엄지손가락을 빤히 보더니 다른 방으로 가 버렸다.

어딜 가는 거지, 근데?

이 침대가 황제의 침대인데, 날 눕혀 두고 어딜 가는데? 이 밤중에 다른 곳에서 잘 생각인가? 내가 볼 때마다 침대에 들러붙어 있던 그는 꽤나 눕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뭐, 황제쯤 되니까 여분의 침실이야 많겠지만…… 그렇다면 날 다른 방에 보내든지. 왜 사람 마음 불편하게 날 여기 눕혀 두는데?

가만히 누워서 귀를 기울이자, 그 는 응접실에서 뭔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류 넘어가는 소리가 천천 히 들려왔다.

전혀 안 잘 생각인가? 그렇다면 나 혼자 잠드는 것도 좀 그런데.

난 혼자서 몸을 뒤척이다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만 잠에 푹 빠져 버렸다.

눈을 떴을 때는 그리 오랜 시간 이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창밖은 여전히 컴컴했고, 달은 그리 많은 위치를 지나 있지 않았다.

“아아…… 아.”

일단 잠긴 목으로나마 소리 내어 말을 해 보았다. 목소리는 잘 나왔 다. 몇 번 더 발음을 해 보며 손을 움직여 보았다. 손발도 영 무겁긴 했지만, 그래도 잠들기 전과는 달리 어떻게든 의지대로 움직여 주었다.

내가 꼼지락거리며 혼자 웅얼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응접실 쪽에 있던 황제가 내게 다가왔다.

“일어났나?”

“네……,”

왜 저렇게까지 멀찌감치 서 있는 데?

난 아무리 그래도 황제께서 직접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에 이렇게 몸 이 나은 건데 가만히 누워서 팔다리 만 꼼지락거릴 수는 없어서, 자리에 서 일어나 예를 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 다.

바닥에 발을 짚는 것까진 무난하

게 성공했다. 하지만 내 왼쪽 발은 발바닥을 땅에 붙이는 데 성공한 데 비해, 오른쪽 발은 쥐가 난 것처럼 둔하게 움직여서 결국 삐끗했다. 난 공손하게 절하는 대신 땅바닥에 철 퍼덕 얼굴을 들이박을 듯이 크게 휘 청 거 렸다.

저 멀리 서 있다고 생각했던 황 제가 한달음에 다가와 날 잡아 주려 고 했고, 난 내 방에서 문을 열 때 마다 마주하던 그 넓은 가슴팍에 고 개를 처박게 되었다.

“ 괜찮나?”

“아…… 네.”

“너는 내 재산인데, 함부로 몸을 굴리는 것도 허락받고 해 줬으면 좋 겠군. 일단 누워 있어라.”

황제는 상냥하게 말하고는 날 짐 짝처럼 안아 올려 다시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렇지, 그거. 잘 구매한 쇼핑 목 록 중에 내가 있다고 했었잖아. 정 말이지, 쇼핑 잘하셔서 좋으시겠수.

일단 빈정거리기부터 했지만, 어 쨌든 쇼핑 물품치곤 꽤 극진한 대접 을 받으며 좋은 침대에 머리를 눕히 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난 말문 이 트인 김에 해야 할 수많은 말들

중에서 감사의 인사부터 해치우기로 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고 와 주 셔서……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 사해요. 약을 먹여 주신 것도……『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 궁둥이를 붙이고 걸터 앉았다.

“아까 마법을 쓰시던데, 등을 한 번 봐 드릴까요?”

“네 걱정이나 해라.”

하긴 치료해 주겠다고 있는 나인 데, 내가 이런 꼴이라니…… 한심하

기 짝이 없다.

황제는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자는 누구였지? 결국 잡지 못 했다. 내가 부리는 자들은 나만은 못하지만 꽤 유능한 자들이다. 그들 이 잡지 못할 정도의 마법사라 니……-”

“저도 잘…… 모르는 잔데…… 스 스로를 ‘말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처음 봤나?”

“처음 봤어요.”

날 의심하는 걸까?

충분히 의심할 여지는 다분했다. 황궁 안에서 수상한 자와 접촉해서 그저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니. 정 말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황제는 날 추궁하는 대신, 침입자의 인상착의에 대해서 자세히 물었고, 나는 생각나는 대로 묘사해 주었다. 키, 얼굴 생김새, 내가 짐작 하는 국적, 피부가 까무잡잡한 걸로 보아 볕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는 추 즉 등등.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맥락에서 뭘 묻는 건지를 몰라서 내가 멀뚱히 고개를 들자, 적안이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래서 네게 약을 먹인 자는 누 구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다. 난 그 머리에 돈을 냈다. 생각해 내라.”

세상에. 진짜 억지다.

칭찬을 할 거면 칭찬만 하고, 억 지를 부릴 거면 억지만 부리지…… 둘 다 동시에 하니까 감동을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제국의 황제였다. 그 사람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지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사람이다. 뭐, 동시에 두 가지 행동을 한다고 해서 탓하기도 그렇다.

“제가 약초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썩 능하지 않아서요.”

“앞으론 능해져라.”

“……그럽지요.”

『II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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