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나는 돌아가는 내내 기사님을 홀 끗흘끗 쳐다보았다.
처음엔 그저 거북하기만 했는데 보면 볼수록 대단한 사람 같아서. 황제가 분명 검으로 마법을 쳐 낸다 느니 하는 말을 했던 걸 똑똑히 기 억하고 있다. 수업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그건 그리 쉬운 게 아니었 다. 마법을 두른 마법 검을 쓰는 것 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검의 경지 를 어느 정도 넘어서야 할 수 있는 일 이 라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고작 나 같은 사람을 호위하고 있어서야 불 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저, 기사님.”
“말씀하십시오.”
언제나처럼, 어떤 뜻도 담기지 않 은 말끔한 시선이다.
“항상 감사드려요. 좀 더 높으신 분을 경호하시는 게 좋을 텐데.”
기사님은 조금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러곤 잠시 뭔가를 생각 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비서직이 되신다면 황궁에서도 손에 꼽히는 중요한 보직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요. 정말 졸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잘하실 겁니다.”
“하하……,”
별로 다른 사람한테 아부하는 스 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었나?
내가 어설픈 웃음만 흘리고 있자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당황한 와중에, 공격당한 마법의 레벨까지 정확하게 분석하는 식견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지만…… 전 마법 수업을 들으 니까요.”
“아닙니다. 지식의 문제를 떠나
빠른 판단력과 담력을 가지고 계시 다고 생각합니다. 검을 쥐시는 분도 아니고, 전장에 서시는 분도 아닌데,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게다가 평소 와 돌아오시는 시간에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겁니다. 그렇다 는 건, 환영 술식을 깨는 데 고작 1 분 남짓이 걸렸다는 말이겠지요.”
난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을 붕붕 내저었다. 아니, 뭐 저렇게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까지 칭찬을 한단 말 인가.
그저…… 난 뒷골목에서 자라면서 너무 간이 부었을 뿐이다.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아카데미가 그저 무용한 것이 아 니라는 것을 셀레스티아 님을 통해 알았습니다. 전 이런 유능한 분을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 다.”
이제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좋게 봐 주셨다니 감사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제국 출신이 아닙니다.”
“아…… 네. 그야……-”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와 노란
눈동자만 봐도 딱 티가 났다.
“그래서 제 경호를 꺼리시는 분들 도 많은데, 셀레스티아 님께선 그런 것엔 신경을 쓰지 않으시더군요.”
“그야……,”
나도 다른 나라 출신인데, 뭘. 굳 이 언급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 었다.
“앞으로는 비뉴스라고 불러 주십 시오.”
“알겠어요, 비뉴스.”
어쩐지 뜻밖의 사건으로 그간 내 내 멀게 느껴졌던 그와 거리가 좀 가까워진 것 같았다.
황성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열 일 제쳐 두고 가장 먼저 쿠키에 관한 작업부터 착수했다. 어제는 너무 당 황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와 이야기를 나눈 뒤 차 분해지고 나자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누가 쿠키를 주워 갔는지 는 모르겠지만, 가장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했다. 황태후가 어쩌다 쿠 키를 주워서 내가 그걸 홀린 거라는 걸 알았다고 해 보자. 그러면 내가
댈 만한 핑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가진 권력도 없고 힘도 없는 나 에게 있는 건 머리뿐이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끝에 내가 생각해 낸 건, 소매치기 길드의 격언 중 다른 하나였다.
‘훔친 금화를 숨길 때는 금화 더 미에.’
나는 얼른 쿠키를 조금씩 나누어 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모두가 쿠 키를 가지고 있게 하는 수밖에 없 다.
내가 홀린 것과 꼭 같은 모양으 로, 작은 종이봉투에 쿠키를 몇 개 씩 나눠 넣고 거기에 리본을 묶은 것을 수십 개 만들었다.
작업은 손이 빠른 덕분에 금방 끝났지만, 향긋한 바닐라 빈 냄새에 홀려서 그만 계속 주워 먹다 보니 그 작업을 다 마쳤을 때는 배가 쿠 키로 꽉 차 있었다.
작업이 끝난 쿠키 봉투 더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알리바X와 4스인의 도적〉이라는 민담이 떠오 를 정도였다.
난 그것들을 세탁물처럼 위장해
세탁물 자루에 넣었다. 그러곤 그것 을 짊어지고 하녀들이 쓰는 주방 준 비실까지 가서 쌓아 놓았다. ‘황제 폐하께서 힘내라고 주시는 선물입니 다으’라는 쪽지와 함께 그것을 잔뜩 부려 놓은 다음, 남은 것들을 또 잔 뜩 들고 시녀들이 쓰는 휴게실과 시 종들이 쓰는 곳에도 잔뜩 부려 놓았 다. 거기에도 역시 같은 쪽지를 두 었다.
이러면 아무리 시녀들이 ‘이 쿠키 는 셀레스티아에게 가져다주라고 구 운 겁니다.’라고 증언한다고 해도, 누구나 먹고 있으니 날 특정할 수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막 알찬 일거리를 마치고 내 방 으로 돌아오려는데, 구름다리 근처 에서 루아나를 만났다.
“어머, 셀레스티아! 여기까진 어 쩐 일이야?”
“그냥 좀 산책했어.”
루아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눈에 익기 짝이 없는 쿠키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봐! 이거 보여?”
“어.”
“황제 폐하께서 글쎄! 역시 잘생 긴 사람은 인성도 좋다니까.”
“무슨 소리야, 루아나?”
“그렇게 흑발이 차르르 빛나실 때 알아봤다니까? 우리같이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일일이 챙 겨서 쿠키를 하사하셨다니까. 너무 너무 아까워서 냄새만 맡았는데 어 찌나 향긋하던지……/
루아나가 흥분해서 눈을 빛내며 막 설명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난 그만 웃어 버렸다. 루아나는 날 슬 쩍 보더니, 제 봉투 안에서 쿠키를 세 개 집어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 봉투 안에 여섯 개가 들어 있 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너무 많은
듯싶었다. 게다가 그 쿠키, 이미 내 배 속에 너무 많이 들어 있는데.
“너는 요즘 아카데미 다니느라 일 안 하니까 못 받았지? 이거 줄게. 누구 주지 말고 혼자 먹어.”
“아냐. 정말 괜찮아.”
“넌 항상 좋은 게 생기면 나한테 나눠 주잖아. 나도 그러고 싶어.”
아, 뭐야.
별말도 아닌데 찔끔 눈물이 났다. 그걸 티 내고 싶지 않아서 눈을 잽 싸게 깜박이며 쿠키를 받아 들었다.
“잘 먹을게, 루아나.”
“응. 난 일 마무리하러 저쪽에 가 봐야 해.”
“또 봐.”
루아나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서야 난 방으로 다시 돌아왔 다.
처음에는 강제로 고향을 떠나온 것에 대한 설움만으로 가득했는데, 이제는 이곳에서 마음을 붙일 사람 들이 점점 늘어 가는 것이 좋았다. 마음이 무척 따뜻했다.
8, 침입자
마차에서 내려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묘한 피곤을 느꼈다. 계단 을 오르는 동안에 그 감각은 점점 더 커져서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 다.
온종일 별일을 한 것도 없는데 너무 피곤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인 양.
그렇다고 계단에 쓰러져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나는 억지로 발을 떼어 어떻게든 내 방까지 기어 올라
갔다. 간신히 폭신한 침대에 도달하 자, 옷을 갈아입겠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풀썩 몸을 뉘었다. 정신은 빠 르게 아득해졌다. 이불을 덮어야겠 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을 정도 였다.
“ 일어나지?”
방금 뭔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 은데?
생경한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려 고 해 봤지만 잘 안 됐다. 왜 이렇 게 몸이 무겁지?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절대 앞으로도 몸을 일으킬 수 없을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 다. 심지어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것조차 무리였다.
“약을 지나치게 썼나?”
아,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도 현기증 이 나는 것처럼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 었다. 그것도 지금껏 들어 본 적 없 는 목소리다.
방 안에 낯선 남자가 서 있다니, 꿈이 아니라면 평범한 상황은 아니
다. 여긴 궁전이니까.
난 끊어지려는 의식을 억지로 이 어 붙이려 애썼다. 이렇게까지 몸이 무거운 게 정상일 리 없다는 데 생 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안간힘을 쓴 끝에 간 신히 눈꺼풀을 밀어 올릴 수 있었 다.
다행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야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 다. 누구지?
외형 자체는 익숙했다. 그 남자는 골디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머리에 진한 남색 눈을 하고 있었 다. 얼굴빛도 제국민보다 조금 더 어두운 게, 골디나 사람이 틀림없었 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 다.
그 차가운 눈이 내가 눈을 뜬 것 을 확인했는지 나를 쏘아보았다. 내 시선에 어린 의문을 봤을까? 그는 문득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 있으니 찾기 어려웠던 거 였군.”
나를 찾았다고? 대체 왜? 나는 처음 보는 자가 황성 안에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게 무섭기만 했다. 내 방에? 대체 어떻게? 그리
고 왜?
내 몸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 저 자가 꾸민 일이라면 좋은 의도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여긴……,”
무진 애쓴 끝에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자는 내 말을 알 아듣지 못했는지 눈을 찌푸렸고, 나 는 다시 한번 소리를 냈다.
“여긴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어눌한 발음이 전부였고, 다시 목소리가 전 혀 나오지 않았다.
“오래 찾았다.”
나를?
“네가 금기를 범한 자인가?”
그는 처음부터 알 수 없는 소리 를 하더니, 계속해서 영문 모를 소 리만 해 댔다. 눈두덩이 점점 무거 워졌고, 이제 이게 꿈이 아닌가 싶 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동안 낯선 땅에서 외로웠을 테 지. 나와 함께 가자. 네가 원래 있 어야 하는 곳으로 돌려보내 주지.”
내가? 외로웠다고? 대체 무슨 소 리일까 가늠하는 사이에 그의 손끝 에서 파란색 불꽃이 작게 피어올라 일렉트릭 볼이 되었다.
세상에. 난 저것을 똑똑히 본 적 이 있다. 일렉트릭 볼이 다 똑같이 생겼다지만 시전하는 자의 특성에 따라 색깔이며 구형의 크기가 조금 씩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나는 마법 을 쓰는 재능이 없는 대신에 그런 세밀한 마법의 흐름들을 관찰하는 데에는 도가 터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이자가 바로 어제 날 공격한 게 틀림없었다.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날 둘러업으려는 듯 붙잡아 일으키며 그는 말했다.
“난 지하 세계의 심부름꾼이다.
자세한 건 가서 들어라.”
심부름꾼? 머리가 아파 왔다. 날 찾는 사람들이 누구지? 누구기에 온 건한 방법이 아니라,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날 데려가려 한단 말인가?
이것은 모두 꿈인 걸까?
난 몽롱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키 거나 꿈에서 깨려고 노력해 봤지만, 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도 사라지 지 않았고 내 몸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완전히 둘러업은 순간 이었다.
쾅
그때, 귀를 때리는 굉음이 났다.
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 의 큰 소리였으니까.
다시 눈을 떴을 땐, 눈앞에서 얼 쩡거리던 검은 후드의 남자는 어디 갔는지 없고, 양손에 파지직거리는 불꽃을 피운 채로 선 황제만이 있었 다. 검은 후드의 사내에게 업혀 있 던 내 몸은 황제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 난 걸까?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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