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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31화 (31/103)

- 31화

온통 자료가 흔히 구비되어 있지 않은 과제들뿐이다. 묘하게 금지된 마법에 대한 내용들이 많은 것 같은 데……오 골디나에 있는 서점에서 읽 은 책들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이런 것들을 어떻게 기술하라고. 벌 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이 빠져서 과제 지시서를 내려 다보고 있자니, 사람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록스 강사가 방긋방긋 웃어 댔다.

“조기 졸업까지 하려는 걸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한 것 같네요?”

“직업을 권유해 주신 것은 감사해

요, 정말로.”

“황실 마차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 는 들었어요. 황실에서 일하는 거 죠? 저로서는 훌륭한 연구자가 될 인재를 보내는 기분이라 아쉽네요.”

“과찬이세요.”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자꾸 볼이 화끈거렸다.

제록스 강사는 깍지를 끼며 의자 에 기댔다.

“물론 저 또한 황제 폐하를 가장 높게 모시는 사람이지만, 아무리 황 실 사람이라고 해도 문제를 봐 주거 나 할 수 없는 건 알죠? 일단 저를

비롯한 여덟 명의 강사에게 필요한 과제를 듣도록 해요.”

“네.”

“응원합니다.”

지금 이 말을 앞으로 일곱 번을 더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사탕을 우물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지 만 속으론 한숨이 몇 번이고 나왔 다.

제록스 강사의 방을 막 나오려는 데, 그가 다시 말했다. 어쩐지 초조 해 보이는 얼굴을 본 기분이었지만, 다시 보았을 땐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잘못 본 거겠지.

“괜찮은 거죠?”

“……네? 아아, 졸업 과제요?”

“아닙니다. 가 보세요, 셀레스티아 양.”

“네.”

나만 정신없는 게 아니라 과제를 부여하는 강사님도 정신이 없는 모 양이 었다.

여덟 명의 강사를 지나 다시 교 실로 돌아왔을 때는, 내 손에는 깨 알 같은 글씨가 써진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빼곡한 책 이름과 과제의 목록과 내가 제출해야 할 리포트의 주제 목록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외워야 할 것들과 시험 을 쳐야 할 것들이었다.

난 그 종이들을 팔랑팔랑 넘겨 보며 도대체 왜 이 아카데미가 설립 된 이후로 조기 졸업자가 그리 적은 지 정말 잘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해야 할 것의 목록만 외우기에도 정말 긴 시간이 걸리겠는걸.

긴 한숨을 쉬며 책상에 엎드리는 데, 문득 연회 때 내가 외웠던 사람 들의 목록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것들을 외울 땐 세레나 님과 시종 장님께서 얼마나 배려를 해 주셨던 가.

난 숨을 들이마셨다.

문득,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 각했던 목소리의 주인이 떠올랐다. 그 남자, 황태후와 이야기하던 남자 가 누군지 깨달았다.

황제의 전직 약사였던, 현직 시종 장이다.

수업을 마칠 때까지 시종장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그렇게 자주 뵈었는데, 황궁 내 일을 돕지 않게 된 이후에는 쭉 뵐 일이 없었단 이유로 목소리를 떠올 리지 못하다니.

시종장님은 내게 퍽 다정하셨고 동생을 보는 것도 충분히 배려해 주 신 분이다. 황태후 때문에 일을 다 망쳤을 때도, 날 혼내기는커녕 내게 사탕을 하나 쥐여 주신 그런 분이 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분이 폐하를 배반하고, 황태후 의 세력에 붙을 분이 아닐 텐데. 도 대체 왜……?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부인에 대 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시종장님의 아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 다. 하지만 기사님이라는 것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황태후와의 이야기를 엿들을 때 ‘아내를 살려 달라’는 이야기도 있 었다. 시종장님의 부인에게 무슨 일 이라도 있는 걸까?

일 관계로만 아는 사이라 자세한 집안 사정을 모르니 쉽사리 짐작하 기도 어려웠다.

다만 믿고 싶었다.

시종장님은 의연한 분처럼 보였으

니까. 황태후의 편을 드는 것만으로 비난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황제에게 정말 충성을 바치는 사람 처럼 보였다. 그렇게 수많은 아랫사 람을 제대로 통솔하여 완벽한 환경 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걸. 무슨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아랫사람들의 사 정을 헤아려 주는 분이었다. 세레나 님처럼 지금의 황실을 돌보는 것에 더할 나위 없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 는 분처럼 보였다.

그런 시종장님께서……소

황제에게 이 일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때론 부드럽게 웃는 분이지만, 그 분에게 패왕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 은 틀림없다. 벌하고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는, 그분은 그 리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뒷골목에서 자라며 나는 그 누구 에게도 쉽사리 믿음을 주지 말라는 큰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그 교훈 대로 살지 않다가 세렉에게 아주 큰 코 다치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이렇 게 사람을 믿고 싶어 하는 게 안일 한 걸까?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되, 되도록

믿지 말 것.’

난 르베르티티가 종종 내게 해 주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황제에게 모든 일을 그대로 전하자. 어떻게 결론이 나든, 어떤 사정이 있든 모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 임을 져야 하니까.

겨우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때쯤 하루가 빠르게 흘러 수업이 끝날 시 간이 되어 있었다.

돌아가려고 보니 강사님마다 주신

참고 자료며 리포트 주제가 적힌 노 트 같은 것들이 산처럼 많았다. 쌓 아 올려 놓고 보니 한숨이 나올 정 도였다. 제록스 강사님의 과제도 어 마어마했지만 다른 분들은 더했다. 조기 졸업이란 걸 할 수는 있는 걸 까.

난 읽다가 죽지는 않을까 싶은 자료 더미를 어떻게든 양손으로 안 아 들고 턱으로 눌렀다. 이러다 팔 이 빠지겠다 싶을 때, 품에 있는 짐 이 뭉텅이로 들려 나갔다.

빈첸조?

언제나처럼 상냥한 얼굴로 생글생 글 웃는 빈첸조가 내 옆에 딱 달라

붙어서 짐을 들어 주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마차까지 같이 가자.”

“고마워.”

이렇게 늘 악의 없이 웃는 애한 테는 나도 솔직하게 굴 수밖에 없 다. 부들부들해 보이는 빈첸조의 잿 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오늘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니는 시선은 그대로였지만, 빈첸조가 곁 에 있으니 쓸데없이 말을 걸어오는 애들은 없었다. 내가 피곤해하는 걸 눈치채고 옆으로 와 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늘 반 친구들 모두에게

상냥하게 굴었으니까.

“우리 또 공동 1등이더라.”

빈첸조는 전 과목 백 점을 놓치 는 법이 없었고, 역사 부분에서 부 진하던 나도 요즘엔 틀리는 문제가 거의 없게 되어 우리는 매번 공동 수석이 었다.

“나도 봤어.”

그는 빙긋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 다.

“이쯤 되면 운명 아닌가?”

난 빈첸조의 농담이 재밌어서 꺄 르르 웃었다. 내가 웃을 때마다 그

는 사람을 빤히 볼 때가 있는데, 오

늘도 그랬다. 조금 민망해져서 웃음 을 흐리는데,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혹시, 연말 파티 말이야.”

으으 하

흐.

“나랑 가는 건 어때?”

놀라서 빈첸조를 바라보았다. 아 무렇지도 않은 어투였지만 진지한 눈치 였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에 다른 남자 애들이 툭하면 내게 예쁘다느니, 함 께 뭘 하자느니 하며 대놓고 접근해 왔다. 하지만 세렉에게 너무 덴 나 는 그들이 세렉처럼 날 이용해 먹을

셈일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빈첸조는 달랐다. 빈첸조 와 슈반의 애들은 내가 아무것도 가 진 것 없는 신세일 때부터 날 아무 렇지도 않게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해 줬고, 아카데미 안에서 내가 설 자리를 만들어 줬다. 누군가에게 는 그게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내겐 더할 나위 없이 큰일 이었다.

빈첸조쯤 되면 이 아카데미에서도 거의 대항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고 위급 귀족 가문 자제다. 그런 그가 외부 손님까지 몰리는 파티의 파트 너로 출신이 묘연한 - 출신을 밝히

지 않는다고 해도 보통은 서민 출신 이겠지만 나는 기실 노예 출신이니 부담감이 더하다 — 나를 초대한 건 엄청난 결심이다.

“정말…… 나한테 가자고 하는 거 야?”

요으 하

그는 줄곧 생각했는지 단호했다.

모처럼 빈첸조의 부탁인데 거절하 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폐 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게다가 황 제의 일정에 맞춰서 조절되는 내 스 케줄이 따라 줄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처럼 선물받았던 드레스

가 있으니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꾸밀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까지 청을 받았는데……오 그리고 아 카데미의 연말 파티라는 거, 아카데 미 문턱을 밟는 것조차 꿈결 같았던 내게는 정말 꼭 참석해 보고 싶은 이벤트다.

내가 섣부르게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망설이는 사이, 우리는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민을 거듭하다가 겨우 애매한 대답을 내 놓았다.

“혹시 좀만 있다가 대답해도 돼?”

빈첸조는 내가 뭘 고민하는지 아 는 모양이었다. 수월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물론이지.”

“일정을 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 아서. 절대로 네가 싫고 그런 건 아 니야.”

“나도 알아.”

내 말이 기분 좋게 들렸을까? 그 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 다. 그는 내 침묵을 미안함으로 받 아들였는지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 냈다.

“이 짐들, 그거지? 조기 졸업 요

건 확인했다며.”

“이거 보고 알아?”

“물론. 나도 강사님한테 물어본 적 있거든. 조기 졸업 요건.”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뜻밖의 이 야기 였다.

나보다 앞서 조기 졸업 요건을 물어보고 제록스 강사에게 리포트를 제출했다는 그 두 명 중에 빈첸조가 껴 있을 줄은 몰랐다.

나야 어쩔 수 없이 급한 사정이 생겨 빨리 아카데미를 수료해야 하 지만, 그처럼 멀끔한 귀족 가문 자 제가 그리 급하게 졸업해야 하는 이

유가 뭐란 말인가?

“너도 조기 졸업하게?”

“아…… 그러려고는 했는데, 그 많은 수업을 듣고 청강까지 하면서 1등을 하는 너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머리가 모자란지 통과 못 했어.”

“ 네가?”

“응. 그리고 그거, 기회 단 한 번 뿐이니까. 난 그냥 다니게 된 셈이 지.”

빈첸조가 좀 더 자조적인 뉘앙스 로 말했다면,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거다. 하지만 그는 재

밌는 농담이라도 하는 투로 말했고, 난 내 걱정을 했다.

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면 나 역 시 정말 통과할 수 있을까? 매번 생각하지만 빈첸조는 정말 머리가 좋으니까.

그런 염려를 하는 사이에 우리는 마차에 도착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마차가 많았다.

기사님은 빈첸조와 내가 건넨 짐 을 묵묵히 받아 실어 주었고, 나는 마차에 올랐다. 창밖에서 ‘대답 기 다릴게.’ 하고 빈첸조가 입 모양만 으로 말하는 게 보였다. 웃으며 손 을 흔들어 주면서도 왜 그 많은 여

자애들을 두고 내게 가자고 하는지 궁금했지만, 스캔들이 생기지 않을 중립적인 서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잠시 후 덜컹거리며 마차가 출발함과 동 시에, 다른 마차의 마부들이 일제히 마부석에 올라앉는 게 보였다. 난 내가 잘못 봤나 싶어 창밖으로 고개 를 뺐다.

기사님은 내 얼굴을 보고 무뚝뚝 하게 설명해 주었다.

“황성의 마차 앞을 막는 것은 예 가 아니니까, 아예 먼저 출발하거나 뒤에 출발하는 겁니다.”

하긴 이 마차,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겼으니까.

난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으리번쩍한 마차를 타고 아 카데미에 다니게 되다니. 굳이 밖을 보지 않아도 다른 애들의 시선이 얼 마나 여기에 와 꽂혀 있을지 뻔히 상상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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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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