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신분에 대한 논란에는 ‘노예 출신 에서 신분이 급상승한’이라는 말이 포함되겠지. 세렉, 개새끼. 진짜 어 떻게 사람 평생에 꼬리표로 따라다 닐 만한 일을 자신이 화난다고 홧김 에 저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세 렉은 도대체 얼마나 인성이 거지 같 은 놈'인지.
“상관없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도 내게 물은 것은 확인차 대답을 듣고자 한 것일 뿐, 이제 와서 내 대답에 따라 바뀌는 것도 없을 거 다.
그가 이제 가 보라는 듯 손을 흔 들었다.
“그럼 이제 다 해결됐으니 조기 졸업 요건만 해결하면 되겠군. 부디 힘내길 바라네.”
“그리 기대해 주시니 황송합니 다.”
입술을 앙다물며 최대한 공손하게 웃어 보인 나는 어쩐지 굉장한 패배 감에 시달리며 그 방에서 물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내 방에 도달했을 때에 는, 하굣길에 느꼈던 그 깊은 공포 감 따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 다. 그저 황제의 농간에 놀아난 스 스로에 대한 동정심과, 조기 졸업 요건의 까마득한 높은 난이도에 대 한 생각뿐이었다.
마음이 진정되어 당장 다음 날 입을 교복을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소매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날 때부터 뭐든 남을 시 키며 살아도 잘 살 수 있는 높으신 나리들과는 달리, 나는 뭐든 내 손 으로 해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인 생을 살아왔다. 옷이 구멍이 나거나
해지면 그것을 손보아야 하는 것도 스스로인 것이다. 그게 내 옷이든, 사미디온의 옷이든, 세렉의 옷이든.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가 갈렸다. 생각해 보면 세렉 그놈이 손재주가 아무리 더럽게 없었더라도 알아서 하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 그놈은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니 고 왜 그런 것까지 날 부려먹었단 말인가?
난 어리석었던 내 어린 날을 후 회하면서도 부지런히 일했다.
다 타 버린 교복 소매를 잘라 내 고, 깔끔하게 반소매로 만들었다. 꼼 꼼하게 감침질까지 하고 나니 말끔
해 보였다. 이 위에 동복에 딸려 나 오는 케이프를 두르면 괜찮겠지.
학생들 중 일부가 더 멋을 부리 기 위해 교복을 변형하는 것도 용인 해 주는 것을 보면, 별다른 말을 하 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산뜻한 기분으로 교복을 걸어 두 고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많은 고민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하지만 기분만은 훨씬 더 나아 져 있었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에 가려고 짐을 챙겨 나왔을 땐 내 앞에 금색 은색의 장 식이 가득한 거대한 마차가 서 있었 다. 심지어 황실의 문장까지 전면에 떡하니 달린 데다가, 튼튼한 쇠축 바퀴 두 개는 번쩍번쩍 광이 났고, 온통 금색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것과 나는 관련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 외장이 허름하고 내장이 화려한 그 마차가 서 있던 공터에 는, 그 화려한 마차 한 대만 계속 서 있을 뿐이었다.
주변을 기웃거리는데, 그 화려하 기 짝이 없는 마차 쪽에서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언제나처럼 정갈한 차림 을 한 기사님이 서 있었다. 아니, 언제나보다 좀 더 화려한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공식적인 인사를 수 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쪽으로 타십시오.”
“네? 제 마차는 어떻게 됐나요?”
“이 마차가 셀레스티아 님의 마차 입니다.”
“이게요? 하지만 제 마차는
아
외향이라도 허름한 마차가 그리웠 다. 지금도 필요 이상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여기서 더 이상 화제의 인물 이 되라니.
하지만 기사님의 대답은 어디까지 나 단호했다.
“이제부터 신분을 밝히시기로 했 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정문까 지 경호하게 되었습니다. 위장은 필 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의 말대로였다. 위장은 필요 없 다. 하지만 부담스럽다. 아아, 정말 부담스럽다.
난 더 이상 우길 빌미를 잃어버 린 채 어쩔 수 없이 그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발받침에조차 금색 장식 이 새겨져 있는 그 마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출발했고, 기사님은 평소 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자세로 내 대각선 자리에 앉아서 침묵하고 계 셨다.
난 그가 어제 황제에게 혼나지 않았을까 궁금하여 안색을 살폈지 만, 언제나처럼 무표정해서 기분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제는 제가 괜히 우겨서 안 좋
은 말 듣게 한 것 같아요……오 죄송 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이거 봐. 무슨 소리를 들은 게 틀 림 없잖아.
하지만 기사님은 덤덤하게 창 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말을 붙일 거리를 찾지 못한 사이에 아카데미 입구에 도착 했다. 마차는 평소와는 달리 마차 보관소가 있는 골목 쪽으로 꺾어 들 지 않고 아카데미 입구를 지나 마차 를 대는 곳에 멈춰 섰다.
다른 귀족 자제들은 내가 탄 마
차에 붙은 표식을 눈치챈 것 같았 다.
“황실의 표식.”
“세상에, 설마……-”
평소에 늘 같은 마차가 도착하는 공간에, 새로운 마차가 등장한 것 때문에 학생들은 모여서 소곤대기 바빴다.
“오늘 황제 폐하께서 참관하시는 날인가?”
“어머, 난 몰라. 그러면 좀 더 꾸 미고 올걸.”
“아니면 황태후 마마? 아니면…… 궁내부 장관님이나 고문관님께서 오
셨을까?”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들 사이에 는 비키의 목소리도 있었다. 난 내 리기도 전부터 반응이 예상되었지 만, 마냥 마차에 타고 있을 수도 없 었다.
난 마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셀레스티아……-”
놀란 얼굴로 가까이 다가온 빈첸 조가 내 마차와 나를 번갈아 보며 감탄한 얼굴을 했다.
기사님은 안전한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중에 하교 시간에 맞추 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
다.
내 생각엔 아마 그게 내가 이목 을 끄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황실 기사라는 게 아무리 급이 낮아도 외 부 사병에 비하면 훨씬 급이 높은 데다, 나를 수행해 주는 기사님께선 평소보다 훨씬 더 휘황찬란한 망토 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난 머리를 긁적이며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 는 와중에도 비키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내가 그녀의 것을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날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애들 이 온통 내 얘기밖에 안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너무 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게 자의식 과잉이 겠거니 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시선이 쏟아졌고, 심지어는 관료 반의 평민들도, 귀족들도 내게 앞으로 잘 알고 지내고 싶다는 뻔한 소리를 해 댔다.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 미리 관직 을 약속받게 되었냐는 질문을 수십 번쯤 받고서야 간신히 그날의 점심 시간이 되었다.
나는 자꾸만 늘어나는 ‘친구 희망 자’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 도망치듯 강사실로 향해야 했 다.
똑똑.
문 앞에 서 계셨는지, 제록스 강 사님은 직접 문을 열어 주셨다. 내 가 누구와 함께 등교했는지에 따라 서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는 애들과 는 다르게, 제록스 강사님은 평소같 이 온화하고 다정한 얼굴이었다. 차 분해지는 기분이 들어 작게 웃자, 강사님은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셀레스티아 양.”
강사님이 권하는 대로 그의 앞에 놓인 작은 의자로 가서 앉았다.
“어쩐 일로 왔어요? 고민이라도 있나요.”
“인사도 드릴 겸 왔어요. 상담드 릴 게 있긴 한데……-”
“말해 봐요.”
큰 안경 뒤에서 빛나는 눈이 퍽 차분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워 낙 안경이 동글동글하게 생겨서 사 람이 선해 보였지만, 이따금 눈매는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빗겼다. 올 때는 왁자지껄한 교실을 빠져나오겠 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강사님의 앞에 와서 앉으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 다.
대체 어떻게, ‘조기 졸업에 대해 상담하러 왔어요.’라는 말을 해야 할까? 조기 졸업이라는 단어를 내 입으로 발음하려고 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골랐 다. 마치 내가 정말 재능 있는 우등 생이라도 된 것처럼, 고작 한 번 황
실에 가서 상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기고만장해서 조기 졸업하겠다고 말 하는 것 같아 창피했다.
제록스 강사님은 내가 한참 입을 다물고 있자, 먼저 말꼬를 터야겠다 고 생각했는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옷차림이 바뀌었네요. 교복에 무 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난 스스로 수선한 교복 소매를 슬쩍 보고 작게 웃었다. 길거리에서 공격당하는 바람에 다 태워 먹었다 고 할 수도 없었다.
“아아, 그냥……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요.”
“잘 어울려요.”
강사님은 상냥하게 웃었지만 난 속이 편치 않았다. 이런 수다나 떨 자고 온 게 아니다.
언제까지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도 없었다. 난 항상 결심이 더딘 게 문제다.
황제의 말대로 나는 이제 목까지 푹 담긴 황제의 사람이다. 최대한 빨리 그에게 힘이 되는 것이 최선이 다. 그에겐 내가 필요했고, 나에겐 나의 힘을 발휘할 곳이 필요했다-
난 내 안에 숨어 있는 뻔뻔함과 철면피를 최대한 끌어내서 그 말을
해 보았다.
“저…… 강, 강사님.”
“네. 말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조기 졸……,”
“네?”
“조기……?
“뭐라고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 졌지만 눈을 딱 감고 후다닥 말을 쏟아 냈다.
“조기 졸업 요건을 여쭈러 왔어 요. 빨리 졸업하고 싶어서요.”
제록스 강사님이 아주 놀란 얼굴 을 했더라면 나는 더 창피해서 쥐구 멍이든 어디든 달아날 생각이었을 텐데, 다행히도 그는 진지하게 고개 를 끄덕여 주었다.
“아아, 그게 고민이었군요.”
내가 오죽 침착하지 못해 보였는 지, 그는 사탕을 권해 주기까지 했 다. 수업 때도 종종 나눠 주곤 하는 허브 향이 나는 달콤한 사탕이었다. 바스락거리는 껍질을 까고 사탕을 입에 물자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 었다.
제록스 강사는 다른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사탕을 오물거리고 있는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내가 왜 그 러냐는 듯 바라보자 서류철을 뒤적 거리더니 파일 구석에 처박혀 있는 어떤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올해 이 과제를 받으러 온 건 셀레스티아 양까지 해 서 두 번째네요. 물론 제대로 과제 를 제줄하진 못했지만.”
조기 졸업 과제를 받으러 온 사 람조차 수가 그렇게 적었다니.
염려로 가득 차서 받아 든 서류 에는 간략하게 몇 가지 과제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적혀 있는 글자 수가 적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
내용들을 흘끗 보니 현기증이 일 정 도로 난이도가 까마득히 높은 것들 뿐이 었다.
[조기 졸업 과제는 다음과 같이 작성하도록 한다.
- 작성 분량: 주어진 항목에 따 라 40〜50쪽 내외로 작성한다.
총 200쪽 이내로 작성
- 제출 방법: 제책하여 제출
- 선택 주제: 다음 중 택 2 하여 작성
1,마법 보조 알약의 효과와 부작
용에 대하여
2, 마법 부효과의 원인에 대하여
3, 금지된 마법의 역사와 사례 및 금지 원인에 대하여
4,이종족 계약 마법사의 사례에 대하여
……』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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