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알약이 안 듣는 체질이 어디 흔 한 것도 아니고. 나도 나 빼곤 이런 체질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야. 게 다가 내가 마법을 쓰는 것을 꺼리는 기색을 보인 적도 없으니 굳이 믿을 필요가 없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황태후가 어 떤 일을 벌일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 남자가 누구라 고?”
참으로 오랜 세월 숨겨 온 비밀 일 것이다, 황제로서는.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들추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 반가울 리 없었다. 황태후가 그 걸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로서 는 충분히 밀고자를 잡아 죽일 이유 가 충분했다.
그의 사나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쉽게도 고개를 저어야 했다.
“송구합니다만, 그자가 누구인지 는……오 분명 들었던 목소리입니다 만……
요트 해
황제는 마뜩잖은지 작은 미소를 얼굴에서 지웠다.
“네가 들었다는 것을 황태후가 아 나?”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보처 럼 제가 쿠키 꾸러미를 흘리고 와 서……/
“흠…… 널 공격한 게 황태후의 짓이라고 단정하긴 논리의 비약이 있긴 하지만,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는 거군. 하지만 그 여자 가 갑자기 내 병증과 네 특성까지 알아냈다라……/
황제는 신음을 내다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쥐고 이리저리 슬며시 돌려 보다가 놓아주었다.
뭐라도 묻었나?
“다친 데가 없는 것은 다행이지
만, 네가 가진 능력이 알려졌다면 이제 위협은 두 배가 되겠지.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과 네가 가진 능력, 두 가지 모두 황태후와 그들 의 세력에겐 위협거리니까.”
난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능력’과 ‘황제가 아끼 는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 같은 이 유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그걸 굳이 나눠서 말하는 게 이상하게 느 껴 졌다.
하지만 난 굳이 거기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을 위협받는
존재를 비서로 쓰셔도 괜잖겠습니 까?”
황제가 웃었다.
“아직 이 세계를 잘 모르는군. 넌 발만 담글 생각이었겠지만, 이미 목 까지 푹 잠겨 있어.”
“ 네?”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목숨을 위 협당하지 않는 왕도, 목숨을 위협당 하지 않는 비서도, 장관도, 기사도 없다.”
그 웃음이 너무 견고하고 자신만 만해 보여서, 나는 심장이 뛰었다. 무섭지만, 이 용맹하고 아름다운 왕
의 곁에서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내가 공격당한 이야기를 기사님으로부터 전부 들었다고 했으 면서도, 내게 또 한 번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하굣길에 있었던 그 이야기들을 털어놓았고, 황제는 점 점 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내가 네 말을 다 들어주 라고는 했다만, 그렇게까지 허술한 호위를 허용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황제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가 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철없이 황제에게 기사님의 일에 대해 일러 바친 셈이 되는 거다. 기사님은 정
말 내 쓸데없는 요구들을 들어주기 위해 완벽하게 노력했는데 말이다-
난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기사님께선 정 말 완벽한…… 제겐 과분한 호위신 걸요.”
“완벽한 호위가 공격을 허용하진 않지.”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말 투였다.
“그런 게 아니에요.”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군. 검 으로 쳐 낼 수 없는 계열의 마법인 가 했더니, 그냥 호위와 만나기도
전의 일이라니. 기가 차는군.”
“기사님께서 일을 게을리하신 게 아니라, 제가 요구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그래요. 황궁의 사람인 것이 티 나지 않길 바라면서 아카데 미로 등하교는 해야 하고, 또 어떤 제 주군의 뜻 때문에 숙소는 황궁이 다 보니……오 오가는 길에 이 정도 호위를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완벽하게 일을 해내고 계신걸요.”
황제의 적안이 가늘어졌다.
“칭찬이 과해서 요지를 모르겠군. 원래 그렇게 누구든 두둔하는 성격 인가? 아니면 그 기사만 두둔하는 건가? 완벽……,”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황제 의 얼굴은 영 심기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몸을 푹 묻으 며 등을 기댔다가, 비딱하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나는 목이 떨어져서 바닥에 뒹굴 고 있는 수하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은 이제 질렸다. 내가 무슨 생각 을 하는지 넌 모르겠지.”
“네……『
“네가 공격받았다는 이야기를 들 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물었던 것 은 네가 어떤 꼴로 죽었는가 하는 거 였다.”
그는 화난 듯도 보였고, 슬픈 듯 도 보였다. 나는 어쩐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명백하게 죽 이지 않을 의도로 접근한 거지. 경 고하고 싶었거나, 혹은 정말로 널 시험해 보고 싶었거나. 적들은 어디 에도 있고, 그들은 필요에 의해서는 얼마든지 잔인해진다. 네가 살아 있 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황제의 말이 맞는다는 것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부하를 잃어 보았으리라.
그 자신까지 독살의 위협을 당하
고 있는 황제다. 그가 견디고 있는 아슬아슬한 정치적 균형 위에서, 그 리고 그가 지키고 있는 수없이 넓은 나라의 경계선에서.
그런 그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더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호위를 붙이지 않았 으면 모르되, 내게 네 호위를 책하 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으라고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그는 적 안을 휘며 작게 미소했다.
“어쩐 일로 납득이 빠르군. 이런
부분에 있어선 물러나지 않는 줄 알 았는데.”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급한 말이 있으 면 즉시 날 불러라. 내가 침소에 있 든 여행 중이든. 그 부분은 내가 말 해 두지.”
“하오나 제가 어떻게……-”
파격적인 말이었다. 난 눈을 동그 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아직 난 비서도 뭣도 아닌데.
“미련하게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시체라도 마주할까 봐 그런다.”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걸
까? 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았다.
“하하…… 그럼…… 영광스럽게도 그렇게 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피식 웃은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안고 자는 편이 여러모로 수월하고 내 치료에도 도움이 되어 보이는데.”
‘우거진 동굴’에 다녀온 뒤로 그 가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 다. 어쩐지 그동안 남아 있었던 조 금의 어색함이 날아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도감 같은 것이 마음속을 간질였다.
황제는 이제 나에게 볼일은 다 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옆 에 쌓인 서류를 손에 고쳐 쥐었다. 난 아직까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 었고, 나가 보라는 건지 아닌지를 몰랐다. 황제의 손에서 서류가 두어 장 팔랑팔랑 넘어갔다. 인사를 하려 고 슬쩍 몸을 일으키는데, 황제가 입을 뗐다.
“그런 일을 당했으니 아카데미에 는 당분간 안 가는 쪽이 좋겠군. 쉬 도록 해라.”
난 다시 주저앉았다.
대체 무슨 소리야? 그깟 마법 두
번 때문에? 난 황제가 날 걱정해 주는 것은 정말로 고마웠지만, 그 말에는 결코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기 졸업을 하라는 어마 어마한 주문을 하시고는 제게 아카 데미에는 가지 말라니, 전 어디서 무엇을 배웁니까?”
“그 좋은 머리로 어떻게 해 봐.”
황제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던지는 말에 난 입을 삐죽 내밀었 다.
고작 어제였다. 아카데미에 보내 주셔서 고맙다고 내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런데 저 황제는 내 꿈과 희망 같은 것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
“좋은 머리만 있다고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아카데미에 가 지 않고도 이미 어느 나라의 재상이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고개가 들렸다. 촛불의 빛을 반사해서 반짝거리는 적안이 내 눈 을 마주 보았다. 일순, 그가 묘하게 재밌어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착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는 오 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화내는 건가? 나한테.”
“제가요?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 니까.”
“하지만 안전이 제일이다. 방금 경호 원칙에 동의한 거로 아는데.”
“안전한 자유민 1은 제일이 아니 지요. 안전한 전문직 부하가 제일이 지 않습니까.”
검고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고집이 세군.”
“제게 제 할 일을 찾아 주시고 절 인정해 주신 것은 폐하입니다. 그러 니 제가 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카데미는 제대로 끝내고
싶습니다. 그러니 호위도 잘 받고 조기 졸업도……
난 신음을 흘렸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여기까지 와 있는 걸까? 조기 졸업 요건이 얼마나 빡빡한데.
황제는 뒷말을 어서 해 보라는 듯 내게 턱짓했다.
난 그제야 황제가 서류를 손에 쥐었을 때부터는 그냥 내게 이 말을 듣기 위해 장난친 것뿐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어이가 없어서, 진짜.
황제라는 것은 결국 이 나라에서 가장 교활한 정치 세계의 권모술수
의 일인자가 아니던가. 뒷골목에서 배운 눈칫밥으로 어떻게 이겨 먹기 에는 너무 교활하다. 이렇게 놀아나 게 되다니.
결국 내 입으로 이 말을 하게 되 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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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나는 큰 각 오와 함께 말했다.
“조기 졸업은 어떻게 해서든 해 보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 오랜 기간이 남은 것도 아닙니다. 부디 제 남은 아카데미 기간을 마치게 해 주십시오.”
아까부터 묘하게 화난 것도 아니 고 웃는 것도 아닌 그의 표정이 바 뀌었다. 만족스럽고 재밌다는 듯, 깊 은 웃음이 만면에 드러났다.
“네가 그렇게까지 조기 졸업을 하 는 것에 자신 있어 하다니 내, 믿고 맡길 수밖에 없겠군.”
진짜, 나 같은 미천한 인간을 놀 려 먹어야 쓰겠는가. 어이가 없다.
“……정말 교활하십니다.”
“ 내가?”
“ 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
그보다 방금 경호도 잘 받겠다고 했 으니, 그 부분도 알아서 잘하길 바 란다.”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알겠습니다. 그만 물러나도 괜찮 겠습니까?”
황제는 깊은 웃음기를 지우고 나 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신 아카데미를 졸업까지 하고 싶다면 이제 공식적으로 내 사람인 것을 밝히고 정문까지 제대로 경호 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얼굴을 아 는 자들도 있으니 노예로 팔려 와서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을 테지. 그런 걸 다 감수할 수 있겠나?”
그야 그렇겠지.
사실 지금도 어떻게든 신분을 숨 겨 보겠다고 애쓰고 있지만, 연회 때 내 얼굴을 본 사람 중 기억하는 시녀도 있을 테고, 언제까지나 아카 데미에 황제와 나의 관계가 알려지 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거 숨겨 봤자 얼마나 숨길 수 있겠어요?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이미 알음알음
소문나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거 죠.”
“그렇게 생각하나?”
“ 네.”
“앞으로의 경력에도 계속해서 신 분에 대한 논란이 따라다닐 거다. 골디나 출신이라는 것도.”
배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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