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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28화 (28/103)

- 28화

난 그런 것보다 황제의 외척인 비키나 다른 아이들의 동향이 바뀌 지는 않았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황 태후가 그렇게 뒤를 캐고 다니는 것 치고는 비키의 태도는 얌전헀다.

내가 학교에서 마법학 수업을 듣 는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부분 위주로 청강하는 것뿐이라 마 법을 무효로 할 수 있는 능력에 대 해서는 알려진 적이 없는 것이 다행 이었다.

온종일 생각해도 황태후와 대화한 남자가 누군지 알 듯 모를 듯 했다. 내 기억력이 그렇게 비상한데도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 많

이 마주친 사람은 아닌 것 같은 데……,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끙끙 거리는 사이 모든 수업은 어느덧 끝 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담당 강사 제록스가 들어왔다. 제록스는 안경을 연신 밀 어 올리며 곧 연말이니 매년 있는 연말 무도회와 진급 신청 등에 대해 신경 쓰라는 안내를 하고,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나갔다. 아마 종일 넋 을 빼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항상 그의 기대 어린 시선만 받 다가 그런 식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어쩐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 다.

이런 식으로 수업을 제대로 안 들어서 조기 졸업은커녕 진급이나 제대로 하려나.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데, 오늘도 0칸과 마법 장교 양성 클래스의 애 들 중 몇이 몰려왔다.

“셀레스티아, 오늘 혼자 가?”

“어.”

“나랑 같이 갈까?”

“아니.”

“하하, 그러지 말고. 난 마차 있 어.”

난 ‘나도 있어.’라는 말이 목 끝까

지 올라왔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끌 어 올려 웃어 주었다.

“어머, 그러니? 정말 좋겠다. 그 마차 타고 조심해서 잘 들어가.”

나를 에워싼 남자아이들이 내게 말을 걸던 귀족 남자애에게 고소하 다는 듯한 웃음을 보내는 게 보였 다.

“넌 정말 그렇게 단호한 점이 매 력적이야. 마치 밟히면서도 꿋꿋하 게 자라난 들꽃과도 같은 아름다움 이……/

아주 헛소리도 풍작이다.

저 애들은 내가 슈반과 아카데미

전체의 대표로 연회에 불려 나가기 전까지는 3반 귀족 나리들이 나를 괴롭히고 식판을 쏟고 화분을 집어 던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던 애들 이었다. 갑자기 내가 연회에서 상을 받고 황제와 춤을 한번 춘 뒤로 저 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 좀 보라지.

물론 시류에 맞춰 태도를 바꾸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어울려 줄 필요는 없다. 한가한 것도 아니고.

난 다른 남자애가 다시 내게 말 을 걸기 위해 입을 떼는 것을 보자 마자 가방을 꽉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애들한테 시간을 줬다 간 더 이상 대화가 끝나질 않는다.

“앗, 갑자기 급한 일이……

그렇게 외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와 복도 를 질주하다시피 하여 정문까지 나 왔다. 정문 안뜰에 마차와 말을 세 울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정 문까지만 걸어 나와도 이미 시야에 보이는 제복 수는 확 줄어든다. 아 무리 평등이니 어쩌니 해도 아카데 미에 보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집 은 어지간히 성공한 평민 집안 말고 는 대부분 귀족이기 마련이니까.

인적이 드물어지자 걸음을 늦춘

난 정문을 지나 기사님이 기다리는 외견이 허름한 마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황태후가 했던 말들과, 내가 흘리 고 온 쿠키 꾸러미 때문에 너무나 생각이 많았다. 게다가 그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주위의 이목을 신경 써서라도 사 람이 덜 다니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나였다. 평소의 습관대로 좁은 골목 을 지나 마차 쪽으로 가려는데, 눈 앞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일렁이는 번개 같은 것이 눈앞에서 파지직거 리고 있었다.

뒤로 주춤 한 걸음 물러섰지만, 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난 그게 뭔지 그 짧은 순 간에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렉트릭 볼. 마법의 난이도와 범위를 기준으 로 구분한 ‘레벨’에 따르면 고작 2 레벨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잘못 닿 았다간 닿은 부위가 튀겨지듯 화상 을 입고 만다.

난 그걸 피하느라 비명 지르고 말고 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다 가온 그 마법은 내 오른 소매를 태 웠다.

푸시식.

하지만 온몸이 하나의 마법진이나 다름없는 나다. 상대를 기절시키는 정도의 위력을 가진 하급 마법의 전 기 불꽃은 내 몸에 닿자마자 사그라 들어 꺼져 버렸다.

마법 따위 어차피 내게 듣지 않 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 요한 게 아니다. 누군가가 명백히 적의를 가지고 나를 향해 마법을 쓴 것이 문제다. 도시 내에서 공격 마 법을 쓰는 것은 공식적으로 허락된 일이 아니면 불법인데도!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교복 소매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너덜너 덜해진 소맷부리 사이로 팔꿈치 근

처에 새겨진 마법진의 일부가 아주 조금 드러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몸이 굳었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카 데미의 뒷길 쪽은, 내가 다른 사람 과 마주치지 않고 마차와 합류할 생 각으로 고른 곳이었다. 통행하는 사 람이 많지 않았다. 난 천천히 걸음 속도를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 마법은 어디에서 온 걸까? 주문을 시전한 사람은 그리 먼 곳에 있을 리 없었다.

지나가는 몇 안 되는 행인이 모 두 적처럼 느껴졌다. 이제 골목만

돌면 바로 마차가 있다. 너무 서두 르는 먹잇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 다. 최대한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서 도 뛰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 르게 발이 자꾸 조급하게 움직였다.

어라?

나는 벽을 지나치려다가 멈칫하고 멈춰 섰다. 평소에 마차가 있는 골 목이 여기가 아니던가? 분명 골목이 있을 곳에 골목이 아니라 벽이 있었 다.

주변을 살폈지만 분명 여기가 맞 았다.

난 손을 내밀어 그걸 짚어 보았

다.

챙!

마치 돌을 맞은 거울이 부서져 내리듯, 견고하게만 보이던 벽이 내 손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빠르게 금 이 가며 부서져 내렸다.

4레벨의 환영 마법인 게 틀림없 다.

순간 경계심이 들었다.

설마, 날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 라, 내가 마법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것 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머리를 지 배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시간

끌기 식의 의미 없는 환영 술식을 쓰진 않았을 거다. 혹은 정말로 기 사님과 내 조우를 막으려고 한 걸 수도 있지만……오

순식간에 수많은 가능성이 떠올랐 다가 사라지고, 또 떠올랐다가 사라 졌다. 그사이, 멀지 않은 곳에 마차 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마차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 도로 빠르게 걸었다.

마차에 도착하자, 문을 열어 주려 고 내린 기사님이 내 꼴을 보더니 대뜸 나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 다. 그러고는 검 손잡이에 손을 댄

채로 주변을 몇 번이고 더 살폈다. 마차에서 멀어지지 않은 채로 건물 위 지붕부터 이쪽을 지켜볼 수 있는 창문까지 샅샅이 살핀 기사님은 다 시 내게로 돌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공격을 당한 게 맞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님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평 소 아무 표정도 띠지 않던 그의 표 정에 명백한 경계심이 드러났다.

“무슨 일입니까? 상대는 남자? 여자? 인원수는……?”

“아니…… 특정한 상대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원거리 공격입니까?”

“잘 모르겠어요. 공격……이었을 텐데, 마법이었어요. 환영의 술식은 레벨 4의 것으로 보이고, 일렉트릭 볼은 간단한 거였어요.”

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저 마부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그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허공을 향해 큰 소리가 나는 폭죽 같은 것 을 쏘아 올렸고, 마차는 그대로 출 발했다. 가는 사이에 마차 옆으로 여섯 기의 말이 더 따라붙는 게 창

밖으로 보였다. 마차는 호위를 받으 며 빠르게 달렸다.

난 얼떨떨한 와중에도 속으로 놀 랐다. 이런 경호 체계가 갖춰져 있 는 줄은 몰랐다. 내가 대단한 사람 도 아닌데.

주위를 경계하는 기색을 늦추지 않던 기사님은 어느덧 마차가 대로 를 지나 황궁으로 들어가는 거대 정 원수 길로 접어들자 내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런 일이……오 전 황제 폐하께 서 지나친 걱정을 하신다고 생각했 어요. 절…… 누군가 공격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입술이 달달 떨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무서울까? 아직 아무런 일도 당하지 않았는데. 고작 내가 파훼할 수 있는 마법 몇 개를 당했을 뿐인데.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그래, 그게 무서운 점이었다. 다 른 식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명 백하게 그 마법들은 나의 무효화 능 력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걸 시험하려고 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걸까?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황제 폐하께서는, 그리고 나

미리 면회를 청해 둔 것은 정답 이었다. 나는 황제 폐하를 바로 뵙 지 않고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 을 지경이었다.

방에 도착해서 엉망이 된 교복을 갈아입자마자 시종이 찾아와서 황제 폐하의 방으로 오라는 말을 전했다. 나는 얼른 시종을 쫓아 황제 폐하의 방으로 향했다.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초상화가 여느 때와 달라 보였다. 그 수많은

역대 황제들도 모두 그렇게 암투 속 에서 황제 노릇을 했던 걸까? 권력 이란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이제야 제대로 실감한 기분이 들 었다.

권력의 정점에 선 자의 곁을 지 킨다는 것이, 그자의 곁에서 일한다 는 것이 어떤 것인지.

평소에는 내가 침상으로 다가가기 전까지는 황제는 결코 먼저 응접실 로 나오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내가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거기서 서성이고 있던 황제가 얼른 내게 다 가왔다.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표 정을 슥 살피더니 드러난 내 팔과 다리를 살폈다. 내가 인사를 하려고 해도 그걸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 다.

내 모습을 다시 살핀 그의 적안 은 간신히 내 얼굴로 돌아왔다.

“안색이 안 괜찮군.”

“네……-”

“ 모으 2하

“아…… 괜찮습니다. 제가 공격당 한 이야기, 들으셨죠……?”

“그래.”

“그게…… 제가 어제 들은 이야기 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서 찾아뵙 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들은 이야기?”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게 소파를 권했다. 난 감히 황제와 테 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는 영광을 또 누리게 된 점에 감사할 새도 없이 본론을 털어놓았다.

“황태후 마마께서 다른 남자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것을 들었습 니다. 별관으로 가는 길에…… 시종 들이 허드렛일을 할 때나 쓰는 그런 방에서 말씀을 나누셔서…… 어쩌다

듣게 되었습니다만

“뭐지?”

“폐하께서 부효과 알약이 듣지 않 는다는 것을 알게 되셨는지도 모릅 니다.”

황제는 예상외로 표정을 굳히지 않았다. 외려 호전적인 짐승처럼 입 가를 비틀며 웃었다.

“그 여자가 믿던가?”

“사실…… 그렇게 믿는 기색은 아 니었습니다. 하지만 정보를 가진 것 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니까요. 함께 있던 자가 계속 같은 말을 했 지만……,”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내 얼굴만 봐도 두 드러기가 돋을 여자가 날 보겠다고 방까지 굳이 기어 올 때는 이유가 있겠거니 했더니. 역시 그런 이유였 군.”

“네, 직접 확인하려 하셨던 것 같 습니다. 그때 그런 질문도 하셨고 요.”

“그런데 내가 멀쩡하게 돌아다니 고 있어서 기분이 상했던 거였군.”

“아마…… 아직 확신은 못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거야 네가 있으니

까.”

괜히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분 이 들었지만, 기실 내 능력이 좋은 연유로 생긴 것도 아니니까.

『II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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