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난 거대한 기둥 뒤쪽으로 숨으며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틀림없습니다요, 황태후 마 마.”
“그렇다면 황제가 왜 저다지도 멀 쩡한 것이냐.”
“그것은 저도 잘……,”
난처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나와 장난하자는 것이냐, 지금!”
버럭 화내는 황태후의 목소리에 이어, 쩔쩔매는 나이 든 사내의 목 소리.
“분명 알약이 듣지 않는 체질이십
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 지가 없습지요. 지금은 조용히 꼬박 꼬박 약을 타 가십니다만, 처음 마 력을 사용하시던 황태자 시절에는 왜 약이 듣지 않냐고 돌아가신 황후 마마께서도 몇 번이고 문의하셨지 요. 비밀에 부쳐 달라고 하시면 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의 침묵 뒤로 도무지 말도 안 된다는 기색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두어라! 내가 그딴 소릴 믿 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어이가 없구 나.”
“마마!”
“이제야 그럴듯한 약점을 하나 잡 아 보나 했는데……?
황태후의 탄식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세상에. 이 황태후, 정말 미쳤구 나.
머리가 바삐 돌았다. 어떻게 하면 좋지? 황제가 알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입지 에 영향이 있을지도 몰랐다.
부르크 제국이라는 이 패권 국가 는 겉에서 볼 때는 견고한 지위의 황제가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정치 세력의 가장 중심에 서서 바라보니, 전대의 왕이 너무 많은 외척을 심어 놓아 정치적 균형이 미묘하게 유지 되는 상태였다.
말소리는 점점 더 은밀하게 작아 졌다. 벽에 귀를 바짝 붙어야 간신 히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난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 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복도를 지나 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 지나갈지 계속 들을지를 고민하는데, ‘기왕 훔칠 거면 더 큰 것을, 기왕이면 나라를!’이라는 소매 치기 길드의 구호가 생각났다. 나와
친한 소매치기들은 툭하면 그 말을 하곤 했다.
그래, 기왕 듣기 시작한 거 끝까 지 들어야 정보라도 얻지. 어차피 엿듣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돌아 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셈이다.
긴장해서 손안에 쥔 쿠키가 다 바스러질 것 같았다. 난 슬그머니 귀를 벽에 가져다 대었다.
“오늘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네 목이 무사하길 바란다 면.”
“그러면 제 아내는 정말 살려 주 시는 겁니까?”
황태후의 목소리에 이은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 내가 들어 본 적 있 는 것이었다.
누구더라? 순간 떠올려 보려 했 지만 가물가물한 잔상만 떠오를 뿐 이었다.
“물론이다. 내가 그 정도를 못 해 주겠느냐. 다만, 네가 물어 온 그 얄팍한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조 금 더 두고 본 다음에 말이다.”
“못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정말로…… 뻔하지 않습니까. 그간 의 행적을 지켜보셨지 않습니까.”
“처음에 들었을 땐 그럴싸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본 황제의 얼굴은 쌩쌩하기만 하더구나.”
“그러니까 그것은…… 저도 연유 를 도저히 알 수 없사옵니다만
“아무튼 됐다. 더 자세한 것은 다 음에 다시 내가 부를 테니 그때 이 야기하도록 하자.”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한 소리에 난 정신이 퍼뜩 들었다. 벽에 바싹 붙이고 있던 귀를 얼른 떼었다.
상상 밖의 심각한 이야기였다. 도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것을 엿들었 을까?
난 황급히 옆의 방으로 들어가려 고 했지만, 급하게 잡아당겨 본 문 중에서 열리는 것은 없었다. 우왕좌 왕하다가 결국 기둥에 바짝 붙어 서 서 기둥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는 수 밖에 없었다.
문이 열렸고, 다급하게 걸어 나오 는 발소리가 들렸다.
황태후 일행은 내 쪽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몇 발 걸음 떨어진 곳이다. 황태후가 내 쪽으로 몇 걸음만 옮긴다면 눈이 마 주쳐 버리고 말 거다.
아주 짧은 순간에 긴장으로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또각또각.
황태후의 구두 굽이 두 발짝을 걸어 내가 보일락 말락 한 아슬아슬 한 지점까지 걸어 나왔다. 반짝거리 는 보석이 달려 있고, 뾰족한 모양 으로 마무리된 고급스러운 구두코를 바라보며 난 소리 나지 않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이리 오지 마. 이리 오지 마. 간 절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속으로 외운 주문이 통했을까?
“이쪽입니다.”
예의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안내했
다. 황태후의 구두코가 순식간에 사 라졌고,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하고 차가운 벽을 등으로 느끼며 찰 싹 붙어 있었다.
구두 소리가 멀어지는 소리마저 어찌나 더디게 느껴지는지, 영겁과 도 같이 느껴졌다.
간신히 그들 일행이 저 멀리 있 는 꺾어지는 복도를 지나는 것을 확 인하고서야 숨이 조금 트였다. 여전 히 몸을 꼼짝달싹할 수 없어서 난 거기서 그대로 한참을 더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 한 것은, 황태후가 사라진 쪽 복도 에서 하녀들이 웃으며 떠드는 목소
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난 갑자기 뜨거운 것을 만지기라 도 한 듯 후다닥 벽에서 몸을 일으 켜 그 자리를 떴다.
방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잘 기 억도 나지 않았다. 거의 본능적으로 구름다리를 건너 계단을 내려왔다.
“세상에……-”
방에 들어서서도 다리가 다 후들 거렸다. 미쳤다. 이게 다 무슨 일인 지 모르겠다.
난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서성 거리다가 침대에 궁둥이를 붙였다. 몇 번 심호흡을 하니까 조금은 침착 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겨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밤 9 시가 넘은 시간.
황제에게 부효과 알약이 듣지 않 는다는 것을 황태후가 알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지 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일을 황제 에게 알리는 것은 당장 오늘이 아니 라도 괜찮을지도.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먼저 폐하
께 먼저 뵙자고 청한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냥 내일로 미룰까.
하지만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기사님 이 있는 건물 쪽으로 향했다. 오늘 꼭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한다고 말씀 드리기 위해서.
내가 떠올린 생각은 바로 이거다.
황태후에게는 세렉이 수하로 있다 는 것. 세렉이 황태후에게 내가 마 법의 부효과를 무효화할 수 있는 능 력이 있단 것을 말해 버릴지도 모른 다는 것.
황태후는 지금은 제가 들은 밀고
를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세렉의 증 언까지 들으면 그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황제의 약점도, 이 황궁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 같은 존재가 버젓 이 돌아다니고 있는 이유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세레나 님이나 시종장님을 통해 면회를 요청드리는 것보다 사정을 잘 아는 기사님을 통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아카데미 등굣길을 수행해 주시는 기사님을 뵙길 청했 다. 연무장 앞 공터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 이내 뽀얀 얼굴의 기사 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늦은 시간에도 정복 차림이 었다. 내가 청한 것이 의외일 텐데 도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무슨 일 이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기사님,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 송해요.”
“무슨 일입니까?”
덤덤하다 못해 냉철해 보이는 노 란 눈의 기사님 앞에서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나는 잠깐 말 문이 막혔지만, 겨우겨우 입을 열었
다.
“정말 급한 용건이라 그런데, 오 늘 황제 폐하를 뵙는 건 도저히 불 가능할까요?”
그는 생각해 볼 틈도 없다는 듯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소에 드셨습니다.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니 뭐,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 녁까지 격무에 시달리시는 분이니 잠자리에 드셨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항상 잠자리에 들어 계시잖 아? 내가 볼 때마다 침대에서 서류 를 뒤적이고 계시던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급한 용건이라고 말했는데도 저렇 게 요지부동인 걸 보면, 더 이상 설 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난 내키지 않았지만 수긍하고 돌 아서기로 했다.
“어쩔 수 없죠. 그럼 내일 다시 청해 주세요. 그리고…… 늦은 시간 에 불러내서 죄송해요. 이거라도 받 아 주세요.”
난 황제 폐하께 뜯어낸 쿠키 몇 개를 손수건에 싸서 기사님께 꼭 쥐 여 드렸다. 기사님은 당황했는지 잠
깐 주춤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그것을 제복 앞주머니 에 넣었다.
“내일 아카데미에서 돌아오실 즈 음이면 뵐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해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늘 ‘이렇게까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 깍듯한 기사님이고, 저 렇게 뭐든 말해 달라고 하지만, 역 시 잠을 깨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황제의 잠을 깨울 만한 인물인 가, 지위인가 하면 그렇지 않으니까.
황제와 일대일로 만날 수만 있다
면야 자고 있어도 어떻게 깨워서 이 런저런 사정이 있다고 말할 자신이 있었지만, 역시 막대한 신분 차이가 있었다. 아직도 이렇게 지고하신 분 이고 미천한 나인 것이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내 방으 로 돌아온 나는 고급스럽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 따뜻하고 가벼운 이불 을 덮고 다디단 쿠키를 오물거렸다.
이렇게 몸이 편해서야 웬만한 고 민도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지금 이 건은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 니었다. 다행히도 이런 완벽하고 행 복한 환경에서도 계속 생각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세렉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 탁해 볼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그 자식은 내가 뭔가를 부탁하거나 사정한다고 들어줄 위인 이 아니었다. 만약 들어준다면 뭔가 를 그 대가로 요구하고 끈질기게 들 러붙겠지.
연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세렉이 뻔뻔하게 나에게 다시 잘해 보자는 듯 말하던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았 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내가 부끄 러울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부 탁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내가 부탁하면, 내가 부탁 했다는 것을 이유로 내 능력이 중요
한 화두라는 것을 더 빨리 눈치채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 지 않을 수도 없고.
난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황제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며 다른 쿠키 하 나에 손을 뻗다가, 문득 내 손끝을 바라봤다. 쿠키에 닿아 있는 내 손 가락을 보는 순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포장된 쿠키가 없었다.
루아나가 있는 방까지는 가지도 못했는데, 쿠키가 없었다.
다시 들고 돌아온 기억도 없었다.
귀를 바짝 대고 엿듣는 사이에 홀린 게 틀림없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혹시 몰라 방 안에 두었을 만한 곳을 다 살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난 구름다리 건너편, 내가 이야기 를 엿듣고 서 있던 기둥 옆에 루아 나에게 주려고 가지고 가던 쿠키를 홀려버리고 온 거다.
한밤중에 구름다리 근처에서 서성 거리면 얼마나 수상할까?
나는 이른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그 근처에 가 보았지만, 누군가 치 워 버린 건지 쿠키 꾸러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7, 짙어지는 그림자
나는 밤새 이 이야기에 대해 생 각하느라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아카데미로 향해야 했다.
기사님께서는 가타부타 말없이 마 차에 올라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내내 황태후의 말을 생각하느라 수업이 제대로 귀 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냥한 데다 눈치까지 빠른 빈첸 조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다섯 번이
나 물어봤을 정도니, 내 걱정이 겉 으로도 티가 난 모양이었다.
『II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