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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26화 (26/103)

- 26화

좀 반반하다고 발탁되긴커녕, 황 제를 처음 봤을 때는 며칠을 마차로 이송당해서 꾀죄죄하기 짝이 없었 다.

“무언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지 만, 저로서는 더 이상 아는 것이 없 습니다.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간이 부은 소리지만, 황태후가 원하는 말이 정 확히 무엇인지, 황태후가 어디까지 알고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그 냥 모르쇠로 일관할 수밖에.

흘끗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황 태후의 눈꼬리가 뾰족해져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선 시종이 날 노려보고 있는 눈치도 영 좋지 않았다. 이거 익숙한데. 또 뺨을 맞으려나. 실제로 아픈 것보다는 속이 영 안 좋은 일 이다.

“네가 간이 부었나 본데, 내가 만 날 때마다 좋게좋게 군다고 그렇게 나를 쉬운 사람으로 취급하면 사지 멀쩡히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사지라니, 뭘 어쩔 생각인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질문 에 대답 좀 안 했다고 사지 운운하 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황제 에게 독을 쓴 사람도 이 황태후라고 들었으니 얼마나 잔인할지는 짐작이

된다. 그냥 농담한 것은 아닐 것이 다.

황태후의 시종이 내 목덜미를 잡 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마치 매질이라도 할 것처럼 쏘아보 았다. 넘어지도록 세게 맞았던 기억 이 빠르게도 떠올랐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눈을 꽉 감았다.

아무런 고통은 없었다. 대신 목소 리가 들려왔다.

“지금 누굴 붙들고 있는 거지?”

황제의 목소리다.

슬그머니 눈을 떠 보니, 황제가 내 앞에 선 시종을 쏘아보고 있었

다. 그는 천천히 그 옆에 선 황태후 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제 사람에게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황태후는 풍성한 깃털이 달린 아 름다운 보랏빛 부채를 꺼내 입을 가 리며 웃었다.

“세상에, 계신 줄 몰랐구려.”

“방금 오신다고 시종이 다녀갔는 데, 그사이에 제 존재를 잊으셨다니. 건망증이라도 있으신 것 같습니다.”

황태후가 턱짓했고, 시종은 나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황태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엇을 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 다. 대답해 주십시오.”

“저자가, 평민 주제에 내게 똑바 로 눈을 치켜뜨고 그딴 소리를 지껄 이는데, 내가 저자의 목을 쳐도 자 네가 내게 할 말은 없을 것 아닌가 싶은데.”

말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목의 주인 입장에선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황제는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아끼는 인재라면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 저번에 충고해 주셨던 것

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

“충고해 주신 덕분으로, 저 명석 한 이를 비서로 곧 앉힐 예정입니 다. 현재 비서 대행을 수행하고 있 으니, 명백히 알려진 제 사람입니 다.”

황태후는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졸업도 하지 않은 애송이를 부려 야 할 정도로 인재가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졸업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보실 정도라니, 황태후의 관심을 한 몸에

사는 인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 가 아끼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팽팽한 말싸움에 난 기가 다 질 렸다.

황태후와 황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그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아닌, 새로 등장한 제삼자였다. 시종이 등 장을 알리자마자 들어온 지브 공작 은 황제와 황태후에게 차례로 인사 를 했다.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지브 공작 을 바라보았다.

“또, 딸 이야기를 하러 온 모양이

군.”

“저번엔 저희 딸의 안 좋은 모습 을 보여 드리게 되었습니다만, 합병 이 성사된 것을 축하할 겸, 막시 님 의 생신을 축하할 겸 열리는 연회 자리에서는 반드시 저희 여식과 춤 을 추어 주십시오. 대신……/

막시는 황제의 동생의 이름이다.

그동안 황제와 비키의 춤은 이런 뒷공작을 통한 것이었을까? 높으신 분들께서는 춤 하나를 두고도 이렇 게 많은 상징과 정치 권력 다툼을 고려해야 하는구나, 하고 멍하니 고 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지브 공작이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저자는 아카데미 학생이 아닙니 까? 왜 여기에……,”

나가란 소리나 다름없다.

난들 뭐, 여기 있고 싶어서 있나. 황태후가 그렇게 후다닥 들이닥쳐서 못 나간 거지. 나도 나가고 싶다고.

난 이때다 싶어 얼른 물러나려고 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사옵 니다.”

하지만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의 붉은 눈은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듯도 했다.

“나가지 마라. 여기 있어.”

“네……? 하지만……,”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는 제 사 람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하십 시오.”

황태후의 표정이 더 깊이 찌푸려 졌다.

“제 사람이라는 말을 하시기도 하 는군요. 정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 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앉으시지요.”

난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앉아 다 과를 하는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그 대화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황태후와 공작은 도대체 무엇을 살피러 온 것인지, 황제가 심기가 안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그리 오래 이야기를 끌지 않고 담화를 금방 마 치고 가 버렸다.

대체 왜 온 거지?

난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방문 목적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겉보기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거

의 아무런 확답도 듣지 않고 가 비 린 것이 영 이상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황제가 등장하기 전에 나 에게 황태후가 물었던 말이 영 이상 하지 않은가. 마치 황제의 상태를 살피러 온 것 같았다.

지나친 억측일까?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영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황제가 있었다. 그도 왠 지 생각에 잠겨 있는 기색이었다. 영영 다시는 입을 떼지 않을 것 같 은 황제는 누군가 죽일 것 같은 시 선을 하고 있었다.

난 그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쿠 키를 하나 집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놓았다.

“뭘 하는 거지?”

“ 네?”

“먹어라.”

“……감사합니다.”

내가 미쳤나. 대체 뭘 하는 거람.

그런데 그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얼결에 입에 넣은 쿠키에서 달콤한 맛이 입 안으로 퍼지는 것에 너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 두 개만 갖고 가도 괜찮아요?”

그가 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언젠가 뭔가를 요구해 올 거라는 생각은 했다. 게다가 이제 슬슬 비 서 자리도 확정될 판이 아닌가.”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데 네가 바라는 건 그깟 쿠 키 몇 조각뿐이군.”

난 부끄러워서 얼굴이 다 빨개질 것 같았다. 말하지 말걸.

하지만 쿠키는 달콤하기만 할 뿐

만 아니라 바닐라 빈 냄새가 솔솔 풍겼고, 입 안에서는 진한 버터 맛 을 내며 부서졌다. 형편 좋은 자들 의 삶은 잘 모르겠지만, 나와 동생 은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꼭 남겨서 서로 맛보여 주곤 했다. 게다가 사미디온은 나와 입맛이 꼭 같아서, 이 향긋한 냄새를 맡으면 기절할 정도로 좋아할 게 틀림없었 다.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꼭 그런 식으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 나? 너무 어이가 없다. 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어?

내가 손부채로 얼굴을 부치다가,

정 주기 싫으면 말라고 하려는데 황 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쯤 되면 내 쪽에서 더 이상하군.”

뜬금없는 시비 조의 말에 내 쪽 에서 불퉁하게 대답이 나갔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의 적안이 사람의 얼굴을 살폈 다.

“언제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 겠지만, 지금만 놓고 보면 네가 너 무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이질 않 나.”

“비협조적인 부하를 좋아하십니

까?”

“아니, 아니다. 하지만 넌 지금껏 네 동생을 보살펴 달란 것 이외엔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으니까.”

잘해도 불만이다.

쿠키 하나 달란 소리에 이런 거 창한 이야기까지 나오다니.

황제는 언데드 사냥을 함께 다녀 온 이후로 이렇게 조금 날 불편한 사람 대하듯 했다. 난 그런 그의 태 도에 맞추어 내내 별말 없이 치료만 하곤 했는데, 그는 그동안 다른 생 각을 많이 한 듯했다.

“내 아래의 모두가 내게 그저 복

종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 같지만, 모두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말들이다. 첩을…… 지금의 황태후 를 그다지도 예뻐하셨던 내 아버지 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척뿐으로 채 워진 신하들을 이끄는 내가 너무 의 심이 많은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까지 하셨습니까? 제가 뭘 더 요구할 것을 그랬습니다.”

“그래, 할 게 있으면 해라.”

그게 더 안심이 될 것 같다는 묘 한 투정 같은 말투에 난 작게 웃었 다.

내가 그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를 필요로 해 주는 것 에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아무것도 받은 것 없이 잘해 주고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었 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가 꿀 수 있 는 가장 큰 꿈을 제게 주셨습니다. 돈을 쓴다고 하여도 낫지 않는 병이 라 계속해서 보살필 수밖에 없는 제 동생을…… 걱정을 쉴 수 없었던 제 동생을 돌봐 주셨고, 마음껏 배울 기회를 가져 본 적이 없던 제게 그 것을 주셨습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 라보았다. 내 진의를 알고 싶어 하

는 것 같았다.

“제가 뭘 더 큰 것을 바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제가 더 바라는 것 은, 지금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정 진하여 곁에서 돕는 것뿐입니다.”

“……그렇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혹은 아니 었을까?

그는 답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 더니 시녀를 불렀다.

“쿠키를 좀 더 가져와라. 당장 준 비 가능한 한 많이.”

시녀가 당황한 얼굴을 애써 숨기 며 고개를 조아리고 나갔다.

황제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쿠키 를 손에 들려 주었다. 커다란 바구 니 한가득이었다. 바구니 위에 손수 건을 덮어 간신히 넘치지 않을 양으 로 만들어 온 쿠키를 보고 있자니, 황제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시녀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가 눈에 선했다.

정말 이렇게까진 필요 없는데.

난 좀 당황한 채로 처치 곤란한 많은 쿠키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 맛있어서 계속해서 먹을 수 있 을 것 같은 맛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쿠키도 그렇게 오래 상하지 않을 음식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많은 양이라니……노

난 그것 중 일부를 덜어 예쁘게 포장한 다음, 최근에 가장 신세 진 사람인 루아나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일을 마칠 시간인 해 질 녘에 맞 추어 방을 나선 나는 두 층을 더 올라가서 루아나의 방이 있는 동쪽 별관 쪽으로 놓인 구름다리를 건너 갔다.

그때, 구름다리 앞에 놓인 방 중 하나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넌 고작 사흘 전에 그런 이야기

를 하며 아픈 네 자식을 살려 달라 고 하질 않았나? 정말 중요한 정보 를 내놓을 수 있다고 하질 않았나!”

황태후의 목소리?

난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분명 황태후의 목소리인 것이 틀림 없는데도, 정말 이상하게도 복도에 는 호위병 하나 서 있지 않았다.

내용이 어쩐지 의미심장해서 난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에 든 쿠키를 만지작거리며 망설 이는 사이, 다른 말이 이어서 들렸 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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