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창문 틈으로 바깥을 흘끔거리다가 난 문득 황제의 적안과 시선이 맞닥 뜨렸다. 비서 대행이라는 명목으로 일단 같은 마차에 오른 것이다. 마 차 안에는 황제의 엄호를 전담하는 기사님 한 분이 더 있었다.
난 그 기사님의 시선을 의식하여 여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점점 커지는 염려를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폐하.”
“뭐지?”
“제국의 군사력은 대륙 제일인 데 다, 지금은 많은 분쟁이 사그라들어
잉여 병력도 많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소수 병력으로 군대를 꾸리 신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잘 정리되어 있던 흑발을 쓸어 올렸다. 귀찮다는 듯 제 머리 를 흐트러트리는 동작까지 잘생겨 보이다니, 황가의 핏줄이라는 게 대 단하긴 한 모양이다.
“쓸데없는 병력을 데리고 가느니 소수 정예가 편리하니까. 누군가 괜 히 물려서 언데드가 늘어나 봤자 골 치다.”
“하지만……?
황제의 적안이 재밌다는 듯 휘었
다.
“왜, 설마 걱정인가? 질까 봐? 살 아서 돌아오지 못할까 봐?”
“그런 것이 아니오라, 폐하께서 무리하실까 그러질 않습니까.”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내 힘 을 의심하는 건가?”
“아닙니다.”
“재밌군.”
그는 재밌어했지만 난 못내 염려 되었다.
난 그가 이미 익히 알고 있을지 도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그들의 약점이나 통하 기 쉬운 마법 같은 것에 관해 이야 기했다. 그가 주로 쓰는 화염 계열 대신 빙결 계열을 사용하는 게 도움 이 될 거라는 이야기도 했다.
황제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흥 미로운 얼굴을 하고 들었다.
“성실한 비서 대행이군.”
“너무 뻔한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 까?”
“대부분은 그렇지만…… 아닌 부 분도 있군.”
“그게 뭡니까?”
“내가 화염 계열을 주로 쓰는 걸
어떻게 알지?”
그야……오
난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으려다 마차 안에 함께 앉은 기사 님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래서 좀 뭉뚱그려 대답했다.
“술식을 읽어야 해체를 할 수도 있으므로…… 반복적으로 읽는 것들 은 대충 공식이 보이니까요. 정확히 어떤 마법인지까진 알기 어렵더라도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요 키워드들만 살펴 도 알 수 있는 부분이 있고요.”
“거꾸로 되짚으면서 그런 일이 가
능하다라……, 정말 넌 가끔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재밌어.”
황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네가 곁에 있을 거라 생 각하니 딱히 수식을 아끼지 않아도 되겠군. 좋아, 빙결 마법은 펼칠 때 손아귀에 드는 감각이 안 좋아 그리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쪽으로 하 지.”
“그간은 마력을 아끼셨습니까?”
“조금, 그렇지.”
나에게 놀랍다느니 천재라느니 운 운해 대는 그였지만, 진정 천재는
그가 아닐까.
우리가 남부의 밀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일행은 아예 숲 인근에 진 을 쳤다. 언데드들은 근처에 인간이 있으면 해가 저물 녘에 반드시 나타 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진을 치 고 기다리면 그들을 만나는 거야 가 능하겠지만, 이쪽이 수세다. 정말 괜 찮은 걸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무 작정 염려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진을 친 일행은 불을 피워 밥까 지 해 먹어 가며 여유를 부렸으나,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각자 무기를 들고 조용히 모닥불 앞으로 모여들 었다.
해가 완전히 산을 넘어갈 즈음엔 다들 신경질적인 눈으로 주변을 살 폈다. 황제만이 이 자리에서 긴장하 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마차 안에 있으라고 명한 뒤 전체 기사들의 정 가운데 유유자적 하게 앉아 서류인지 뭔지를 뒤적이 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워낙
긴장되는 상황에서는 시간이 가는 속도조차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문득 말 한 마리가 자꾸 투레질 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지르며 앞다리를 쳐들었 다. 난 어두운 숲 그늘을 살펴보려 고 애써 눈을 떴다. 하지만 어떤 그 림자들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일 뿐, 거기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알아 내기 어려웠다.
황제가 보던 종이를 내려놓으며 수신호를 했다. 그의 곁에 선 기사 가 녹색 깃발을 휘둘러 전체에 그의 의사를 전달했다. 대기하라는 뜻이 다.
좀 더 긴장이 짙어져, 모두가 제 무기를 뽑아 들고 숲 쪽을 노려보고 서 있던 그때, 황제가 두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의 동시에 붉은 깃발이 허공에 휘날렸고, 때를 함께 하여 숲속에서 형체를 정확히 인식 하기 어려운 생물들이 일제히 뛰쳐 나왔다. 그들은 마치 개 같기도 했 고, 사람 같기도 했다.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네 발로 거침 없이 뛰어오는 형상이 너무 기괴하 여 짐승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난 입술을 깨물며 그들을 바라보 았다.
숲 쪽에서 떼를 지어 모습을 드
러낸 그 수많은 언데드에 비하여 고 작 서른 명의 일행은 너무 수가 적 어 보였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기고 또 다른 언데드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너무 긴장하고 무서워서 손끝이 다 하얘졌다.
언데드 쪽을 향하여 온갖 마법이 쏟아졌다. 마법사들은 바닥이나 종 이에 그려 둔 마법진에 쉴 새 없이 지팡이를 가져다 댔다. 빙결 마법과 전뇌 마법, 그리고 땅을 아예 꺼뜨 려 버려 그들을 갇히게 하는 마법들 이었다. 혹은 기사들은 보조 마법이 한껏 걸린 검을 휘둘러 가까이 접근
하는 언데드들의 턱뼈를 부숴 놓기 도 했다.
그것들은 유효한 타격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세로는 끝이 없었 다. 언데드들의 죽은 개체는 고작 열 구 남짓이었고, 숲속에서 새로 모습을 드러낸 개체는 거의 백 구가 넘어 보였다. 너무 수가 많아, 숲의 언저리가 새까맣게 보일 정도였다.
그때, 누구보다도 고요하게 있던 황제가 손을 들었다. 술식을 한꺼번 에 여러 개를 외운 건지 그의 입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시전어조차 크게 외치지 않고, 무
슨 바닥에 마법진 하나 그리지 않은 그는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눈 부시고 거대한 마법을 사용했다. 그 의 발아래에서 출발한 작은 얼음 길 은 앞으로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가면 서 조금씩 넓어지더니, 그 길에 닿 는 모든 초목과 잡풀을 얼려 버리고 나아가 언데드들의 몸도 그 자리에 서 얼려 버렸다.
다른 이들의 빙결 공격을 받은 언데드들은 속력이 현저히 느려져 검사들의 검을 피할 수 없을 지경이 었을 뿐인데, 황제의 마법에 당한 언데드들은 그 자리에서 꽝꽝 언 얼 음이 되었다.
그의 마법 시전 범위에 들지 않 은, 고작 몇 안 남은 언데드들을 다 른 자들이 처리하는 사이, 황제는 또 어찌나 빨리 뭔가를 읊조렸는지, 금세 손을 위로 쳐들었다가 아래로 깔아뭉개는 시늉을 했다.
강한 바람이 불었다. 마차를 날려 버릴 것 같은 강풍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깥을 쳐다보느라 두려움 따 위는 느낄 새가 없었다.
얼어 있던 수많은 형상은 칼날이 라도 달린 듯한 날카로운 바람의 난 도질에 우수수 바닥으로 흩어져 버 렸다.
바람이 잦아들자, 그 자리에는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정적 이 찾아왔다.
난 말도 안 되는 마법의 스케일 에 침을 삼키며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그 정적을 바라보았다.
그간 황제의 몸에 난 부효과들을 치료하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이 황제의 마법의 이해도 는 지나치게 뛰어나 그 위용이 대단 하겠구나, 하는 생각.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 다.
정작 눈앞에서 보는 그의 마법은,
내가 상상했던 어떤 광경보다도 스 케일이 대단했다. 규모가 크고 웅장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술식을 계산 해 마나를 실제 세계에 물리적인 형 태로 구현해 내는 것은 순식간에 이 루어져서, 마치 여러 가지의 마법을 한꺼번에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 도였다.
내가 견문이 넓다고 해 봤자, 우 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닫지 않 을 수 없었다.
난 이래 봬도 마법이라면 꽤 많 이 보았다고 자신한다.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인 데다, 어릴 때부터 여 기저기 떠돌며 자라 온 내겐 전쟁터
까지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세렉이 마법 실습을 하는 것을 도와주느라 내내 기초적인 마법부터 단계별 마 법의 구현을 구경하기도 했다. 게다 가 제국에 온 뒤로는 마법 장교 양 성반의 수업을 청강하며 어지간한 소.중형 마법의 구현은 다 구경했 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격이 다른 재 능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일까. 그가 그런 상처를 감 수하면서도 매번 선두에 설 수밖에 없는 건.
지금도 그의 곁에 선 다른 자들 은 황제를 경외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어떤 ‘당 연한 의무’가 포함되어 있을 테다. 황제는 지금껏 그런 식으로 해 왔으 니까. 점점 더 몸이 안 좋아진다는 이유로 그것을 피하기에는 그 책임 감이 너무 컸을 테지.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에 다시 불 이 지펴졌다.
문이 열린다 싶더니 황제가 들어 섰다.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는 그의 등 을 얼른 보고 싶어 커튼을 내렸다.
“지금까지는 너무 눈에 띄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저어했지만, 이렇게까지 근처에 있으니 꽤 편리
하군.”
“그렇습니까.”
그때 그의 등을 살피고 싶은 생 각에 여념이 없다가 겨우 그의 얼굴 을 바라본 내 눈에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이 들어왔다. 평이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도저히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 었다.
“음…… 평소보다 조금 무리했 나?”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 렸다.
“이상하군.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아마…… 네 몸에 새겨진 그 마법진 때문이겠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깊게 내리감았다 뜬 그의 눈빛이 순간 섬 뜩할 정도로 매서워 보였다. 난 그 눈빛을 알았다. 그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언제냐면, 세렉이 부효과 때문에 내게 키스한 순간에.
난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 다. 만약 황제마저 내게 그런 일을 한다면, 난 그때와는 달리 좋게좋게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거부의 말을 하기도 전에, 황제는 내 손을 쥐었 을 뿐이다. 그러더니 뭔가의 상념을 떨쳐 내려는 듯 긴 한숨 같은 신음 을 몇 번이고 흘리더니 내게로 시선 을 돌렸다.
“한 번만…… 안아 봐도 괜찮은 가? 나도……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은데……/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허락을 구 하는 그 말에 난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러고 보면 그는 뭐든 명 령하여 해결할 수 있는 지위에 머물 러 있으면서 나의 영역을 침해할 수
있는 부분에는 늘 허락을 구하곤 했 다.
그는 세렉과 다르다.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 라앉았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황제의 몸을 안았다.
황제는 안아 봐도 괜찮겠냐고 물 은 사람답지 않게, 내가 그의 단단 한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릴 때까지 도 두 팔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 다. 그의 등의 심한 상처라면 매번 곪고 곪은 것을 보았고, 지독히 곪 은 상처 위에 새로 쌓인 부효과를 보곤 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갓 생긴 상처로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 라 있는 몸을 안고 있자니, 뜨거운 태양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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