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그 뒤로 연회가 끝날 때까지, 나 는 다른 세 명의 아카데미 대표들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재라고 소개받으며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너무 바빠서 세렉과의 최악 의 만남을 상기할 시간조차 없을 정 도였다.
그러는 사이에 황태후에게까지 소 개되었지만, 황태후는 별다른 이야 기는 꺼내지 않고 평범하게 웃으며 덕담을 해 주었다. 긴 이야기를 요 약하면, 빨리 졸업하여 인재가 되어 제게 오라는 이야기였다. 난 그녀가 내내 나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연회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에 등교한 나는 그 연회의 효과를 실감 했다. 간단하게 말해, 우리는 아카데 미에서 일약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귀족과 황제, 황태후, 그리고 각국의 사신들까지 자리한 황실에서 아카데미의 대표로 상을 받은 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때문에 학생들이나 강사님들 모두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학교에 가자마자 학원장이 우리
네 명을 불러다 놓고 길디긴 칭찬과 찬사를 퍼부은 것을 시작으로, 온종 일 가는 곳마다 난데없는 자기소개 를 받았다. 앞으로 황가와 밀접한 사이가 되어 일할 것이 틀림없는 우 리에게 눈도장을 찍어 놓으려는 것 이다.
다른 세 명의 대표와 내가 좀 다 른 점이 있다면, 내게는 묘한 뭇 남 자애들의 시선까지 덤으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본 갈색 드레 스가 정말 잘 어울렸다거나, 다음 아카데미 축제에 함께하고 싶다거 나. 평민인 내게는 생소한 이야기들 을 자꾸만 해 댔다.
조금은 기뻤지만, 일견 내게 접근 하는 모두가 황제에게 줄을 대려는 발악이라고 생각되었다.
비키를 비롯한 3-8반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서 잘 볼 일이 없기도 했지만, 얼굴을 마주쳐도 전 처럼 날 괴롭히려고 구는 대신 조용 히 시선을 피하고 지나갔다. 황제와 제 부모가 대면했던 기억이 꽤 크게 남는 모양이다.
남은 학교생활은 지나치게 주목을 받긴 하겠지만 괴롭힘을 당하진 않 으며 지나갈 것 같았다.
기말고사가 가까워져 올 때까지 황궁 생활과 아카데미의 생활에는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 황제는 그 연회에서 부쩍 날 감싸고돈 것치고 는 그 뒤에 평범하게 날 대했다. 그 리고 난 그가 날 돌봐 준 만큼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인재가 되고자 힘 쓰며 열심히 아카데미를 다녔다.
황제가 직접 그 높은 코를 꺽어 준 이후에도 세렉은 여전히 꽤 인기 있는 마법 장교로 지낸다는 것 같았 지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 은 아직까진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합병은 무사히 진 행되어 슬슬 마무리 단계에 이른 것 같았다. 제국 측에서 관리자를 파견 하고 영지를 나누는 등의 일이 마무 리되어 갈 무렵이었다.
황제가 날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그래.”
요즘 좀처럼 원정을 떠나지 않는 황제는 부쩍 안정된 기색이었다. 그 는 오늘도 침대에 누워 서류를 뒤적 거리다가 날 흘끗 바라봤다.
“아카데미 생활은 잘하고 있나?”
“네.”
“좀 더 빨리 졸업하고 내 곁으로 와라.”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눈을 동그 랗게 뜨고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 제의 시선은 서류가 아니라 내게 곧 장 와 있었다. 난 농담이라는 생각 이 들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커리큘럼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황제는 조금도 농담이 아 니었던 모양이다. 서류를 아예 옆에 내려놓고 상체를 일으켜 날 봤다.
“정규 과정을 꼭 다 소화하지 못
해도 괜찮다. 필요한 만큼 속성으로 밟아라. 조기 졸업 코스가 있다고 들었다.”
조기 졸업 요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코스를 밟으려면 여덟 명 이상의 강사에게 시험을 쳐서 졸업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승인을 받아 야 한다. 또한 남은 학점에서 필수 적으로 배우는 내용을 모두 학습했 음을 입증해야 한다.
전례가 그리 없는 일이라 들었다. 아카데미가 생긴 지 그리 오래됐는 데도 조기 졸업한 사람은 다섯 손가 락에 꼽는다고. 정확히 네 명 있다 고 들었다.
난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지 만 황제는 덤덤하게 억지를 부렸다.
“너라면 할 수 있질 않나? 솔직 히 너만큼 머리 좋은 사람은 달리 본 적이 없는데.”
내 좋은 부분을 그가 알아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무턱대 고 빨리 졸업하라고 해도……소
그는 내 곤란한 얼굴을 본 척도 안 하고 말을 이었다.
“달리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내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써 줄 사람을 하나 키우겠다고, 내가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쓸 수는 없질
않나?”
아무래도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간은 괜찮았는데, 갑자기 졸업 요 건을 신경 쓰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자크 백작은 점점 내 일을 보조 하기 어려워 보이니까.”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뭐, 나이가 많으니 어쩔 수 없 지. 그는 꽤 괜찮은 비서였는데, 점 점 힘들어하는 것 같더군. 그래서 말인데, 슬슬 업무 대행을 해 보는 것은 어떤가 해서……
업무 대행?
뜻밖의 말이었다.
“마수 굴을 알고 있나?”
“네. 제국에는 오랜 세월 마법의 힘으로 봉인해 온 마수 굴이 몇 개 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황태후가 마법사를 양성 한다고 한 것은 사실 그걸 관리하겠 다는 거였지. 하지만 그중 하나의 봉인이 잘못되어, 마수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고 하는군.”
“세상에, 그럼 직접 가시는 겁니 까?”
“제국에서 가장 마법을 잘 쓰는 게 나니까.”
그의 말은, 아마도 맞는 말일 것 이다.
대부분 왕가나 황가의 경우, 재능 있는 마법사나 검사가 초대인 경우 가 많다. 그 피가 계승된 로열 블러 드들은 대체로 마법에 재능이 있었 다.
게다가 그가 사용했던 마법의 복 잡함을 모두 체감해 본 것이 나였 다. 그가 사용한 마법 술식들의 복 잡함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으니, 그는 도대체 얼마
나 강대한 마법을 구현하고 있는지.
그가 대답해 준 적도 없거니와 난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무슨 마법 을 썼는지 묻지 않았다. 그 마법으 로 살상한 수많은 생명에 대해 말하 고 싶지 않을 거라 짐작하게 되었 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하 필이면 알약이 듣지 않는 그의 재능 이 이렇게까지 대단하다니.
“출정은 그리 머지않아서다.”
“그래서 알려 주러 부르셨습니 까?”
“이번의 전투는 지금까지와는 달
리 대(쏴) 인간의 전투가 아니다. 다른 종족을 상대로 한 전투는 훨씬 더 치열하고, 잔혹하다. 대체 내 몸 이 어디까지 버텨 줄지 모르겠다.”
약한 소리를 하는 걸 들어 본 적 이 없었다. 내가 놀라서 그를 올려 다보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와 함께 가지. 이제 대행 을 해낼 명분 정돈 됐겠지.”
함께 가도 괜찮겠냐고 그의 출정 때마다 난 반복해서 여쭈었다. 하지 만 그간 돌아온 대답은 항상 같았 다.
그럴듯한 명분이 없어서, 혹은 그
럴 바엔 그냥 내가 아카데미나 열심 히 다니는 게 미래에 더 도움이 되 어서.
하지만 이제 그런 핑계들에 앞서 서 정말로 그에게 내가 필요한 거 다. 그리고 어느덧, 나도 그의 필요 에 조금쯤은 부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난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곁을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보 필하겠습니다.”
세 번째였다. 그의 깊은 웃음을 보는 것은.
또, 그의 웃음에 내 마음이 전에
없이 뿌듯해져 오는 것도.
나는 직접적인 공격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급을 담당 하는 것도 아니며, 전체를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황제를 보필하는 역으로 자크 백작 님 대행으로 참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뭐든 할 거면 확실 하게 하는 게 좋았다. 그냥 어영부 영 황제의 곁을 지키다 올 게 아니 라, 비서 예비역으로서 그가 황실 밖에서 하는 일들을 제대로 보필하
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일어 나는 부효과들도 제대로 치료해 주 고 싶었다.
난 주어진 여유 시간 동안 이번 원정의 목적지인 ‘우거진 동굴’에 대해 열심히 조사했다.
옛날의 나는 제국의 역사나 지명, 사건 등에 대해서는 남의 국가이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이제는 다르다. 실제로 잘 알게 되기도 했고, 그리 고 더 알고 싶어지기도 했다.
황제가 어떤 역사 이야기를 하거 나 설화나 전설 이야기를 한다고 해 도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 않는 다. 벼락치기로 익힌 지식이지만 제
국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알 면 더 잘 알았지, 모르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제 역대 황제의 이름이나 몇 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 는지를 줄줄이 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익힌 지식 중에는 ‘우거진 동굴’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일단 마수 굴이란 언데드가 모습 을 드러내는 굴을 말한다. 그들은 햇빛 세계에 사는 인간들과는 달리, 어둠의 세계에 사는 생명체들이다.
그들은 마치 벌레나 전염병처럼 어딘가에서 창궐하고 또 어딘가에서 사라져 갔으나, 결코 멸종하는 법은 없었다. 또한 죽이려고 하면 그냥
창칼로 찔러서는 죽지 않고, 반드시 태우거나 얼려서 신체 부위를 조각 조각 나누어 묻어야만 했다. 그래서 인간은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마법 을 더욱더 발전시켜 왔다.
맹렬하게 뒤지는 사이에 아카데미 의 서고에 있는 고서적 중에서 관련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거진 동굴’에 사는 언데드들은 다른 곳에 사는 개체들보다 더위와 불에 강하고, 추위와 얼음에 약하다 는 등의 자료였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전력 파 악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정말 어려워 보였고,
나는 그것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염려에 잠겼다.
아무리 황제의 마력 이해도가 높 다고 한들, 그리고 다른 보조 마법 사들이 많다고 한들, 제국의 많은 군대가 그들을 지원한다고 한들, 정 말 피해 없이 무사히 그곳을 다시 봉인할 수 있을까.
황제의 곁을 보필하여 싸움터에 나간다는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 았으나, 내 염려는 점점 짙어져만 갔다.
6, 우거진 동굴
마침맞게 출정은 아카데미의 시험 이 끝난 뒤 출발할 수 있는 일정이 었다. 나는 아무런 부담 없이 원정 대에 참가할 수 있었다.
원정대의 규모는 생각보다도 훨씬 조촐했다. 나는 무슨 대군까진 아니 더라도 1천 명 정도의 규모는 출정 할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30에서 40 정도의 마법사와 기사를 혼합한 군집이 다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처 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간혹 연회에
서 본 얼굴도 있었다.
분명 내가 읽은 문서에 의하면, ‘우거진 동굴’에 사는 언데드의 생 명력과 공격력은 치명적으로 강하다 고 했다. 이 정도 규모로 정말 괜찮 은 걸까.
난 황제와 이 일행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나를 제외하곤 누구도 조금도 걱정하는 눈치가 아 니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나 세력과의 분 쟁을 해결하러 갈 때 하는 도열식 같은 것조차 없었다. 이른 새벽에 모인 일행은 물자와 인원, 장비 등 등의 점검을 마치기가 무섭게 출발
했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우리 일 행은 이미 수도 외곽을 지나고 있었 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