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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22화 (22/103)

- 22화

“세월이 많이 흐르긴 뭘 많이 홀 러? 이 개자식아. 내가 겪었던 그 수많은 일에 비교해, 넌 뭘 겪었는 데? 사람을 노예로 팔아 치우고 나 서, 그 알량한 권력을 휘둘러 네 소 꿉친구를 그렇게 팔아 치우고 나서, 다시 나한테 감히 말걸 생각을 해‘?!”

그는 쓰게 웃었다.

“많이 컸네. 오늘 보니까 다른 사 람처럼 예쁘다. 못 알아볼 뻔했어. 아까 무대 위에서 상 받았잖아, 네 가. 그때 이름 들으면서 다시 봤다 니까? 그거 아니었으면 정말 못 알 아봤어.”

“죽고 싶냐.”

세렉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끝 까지 끌어 올려 웃었다.

아무리 내게 심한 짓을 해도 난 그 미소만 보면 기분을 풀곤 했다. 그의 환한 미소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까지 내가 그 면상을 좋아 할 거라 생각한다면 그런 심한 착각 도 없다.

“오랜만인데 밥이나 먹을까?”

“나가 죽어.”

“그냥, 재회한 것도 인연이잖아.”

난 왜 내 손에 다른 물잔이 또

없나, 다른 물잔들은 왜 저렇게 멀 리 있나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그를 쏘아봤다.

진짜 죽여 버린다, 개자식. 뚫린 입 이 라고.

너무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데, 높은 구두 때문에 순간 발이 삐끗했다. 난 크게 휘청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세렉이 날 부 축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그 손 을 뿌리쳐 버렸다.

그때 황제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황제는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섞 는 게 따분한지 재미없는 얼굴이었 다가, 갑자기 내 쪽으로 걸음을 옮

겼다.

왜 갑자기 오는데? 왜 하필 지 금? 난 바삐 구두를 고쳐 신고 세 렉의 곁을 떠나려는데, 황제가 성큼 성큼 다가오는 게 먼저였다.

그는 세렉의 옷차림을 보곤 내게 턱짓을 했다.

“골디나 국 사람이군. 소개를 좀 해 줬으면 하는데.”

“헉, 이게 누구십니까. 황제 폐하 아니십니까.”

또 꼴에, 우아하게 인사하는 척한 다고 내 앞에서 수십 번도 더 연습 해 댔던 그 예법을 차려 인사하는

걸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예나 지 금이나 겉멋에는 엄청 관심이 많다, 진짜.

“처음 보는 얼굴이군. 골디나에서 온 사람인가 본데.”

“먼저 여쭤 주시니 가문의 영광입 니다. 전 황태후 마마의 전속 마법 장교로 발령받은 세렉이라고 합니 다. 셀레스티아와 아시는 사이라니, 놀랍…… 으악!”

난 눈치 없이 헛소리하려는 세렉 의 발을 꾹 밟아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아픔을 조금도 참 을 줄 모르는 세렉은 어지간히 아팠

는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날 쏘아봤다. 그러곤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날 탓했다. 진짜 비열한 자 식 어디 안 간다.

“왜 이래, 셀레스티아. 황제 폐하 앞에서 무례하게! 아무리 나랑 친하 다지만……?

황제는 명백하게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둘이 원래도 알던 사인가 보군.”

세렉은 노예로 팔려 나간 내가 황제와 아는 사이인 것에 놀란 얼굴 이 되었고, 황제는 세렉이라는 이름 에서 떠오른 게 있는지 내 눈을 빤

히 쳐다봤다. 세렉이란 이름이 그렇 게 드문 이름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 지 기억을 잘하는 건데? 머리가 좋 아도 문제다, 문제야.

내가 입술을 깨물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황제는 이번엔 세렉을 바라보았다.

“즐겁게 회포를 푸는 데 내가 끼 어들었나 보군.”

세렉은 권력자 앞에선 언제나 충 성을 다하는 개 같은 놈이다. 그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무슨 그런 말씀을. 아 닙니다.”

황제는 적안을 길게 접으며 말했 다.

“그래? 아니라니 끼어들어 보지.”

망했다.

“자네가 황태후께서 발탁했다는 그 마법 장교군, 골디나의. 이야기는 들었다.”

패왕의 이야기에 세렉의 눈이 기 쁨으로 반짝였다. 인정받은 기분이 리라.

“제 이야기를 들으셨다니 영광입

니다.”

“정규 교육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 한 평민인 자네가 공격조에서 뛰어 난 활약을 보였다지? 정말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데, 스스로의 열의와 머리로만 마법을 그 정도로 쓴다면 과히 천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황태후께서 직접 고른 것도 이해가 된다.”

“하하, 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 데 다들 천재라고 어찌나 말이 많던 지요.”

진짜 어이없다. 입술에 침이나 바 르고 그런 소리를 지껄였으면 좋겠 다.

황제는 입술을 비틀며 술을 들이 켰다.

“그래서, 정말 그런가?”

세렉이 잘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폐하를 쳐다봤다.

“네‘?”

“정말 천재냔 말이다. 지금껏 제 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도 여기까 지 올라온 잘나신 마법 장교라고 소 문이 자자하다고? 그러면 황태후께 서 마음먹고 키워 준다면 놀랄 만큼 성장하겠군. 안 그래?”

“……그, 저, 어떤 질문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렉이 내 눈치를 보느라 말을 더듬는 사이, 황제는 손안에 쥔 술 잔을 홀랑 비워 버리고 빈 술잔을 옆에 선 시종에게 쥐여 줬다.

황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명 백한 한심함이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모두 다 기억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솔직히 난 황제가 한낱 내 이야기 따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홀려 버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미주알고주알 세렉의 신상과, 내 가 어떻게 노예로 팔려 오게 됐는

지, 또 어떻게 마법진을 몸에 새기 게 됐는지 다 나에게 들은 후라 세 렉의 이야기가 얼마나 어이없을까.

“내가 잘못된 질문을 한 것 같 군.”

“어떤 말씀이신지……,”

“내 질문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네에게, 들리는 헛소문만큼 잘난 사람인지 물어본 건 내 실수지.”

세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존 심에 어지간히 상처를 입은 게 틀림 없었다. 하지만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세렉은 그걸 내색도 하지 못하 는 눈치였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 한 말은 이해했나?”

명백한 비꼼에 세렉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황제는 위압적 인 표정을 풀고 이내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이거, 내가 지나친 농으로 기분 을 상하게 한 것 같군.”

“아닙니다.”

황제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주 자, 세렉은 정말 어디까지가 농담인 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바삐 굴렸다. 그러나 황제는 곧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마법 장교인 자네와 셀레스티아와는 어떤 사인가?”

“아, 그게…… 어릴 때부터 보육 원에서 함께 자란 사이입니다. 한때 정말 뜨거운 연인이었는데…… 어쩌 다 보니 좀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습 니다만,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모 르지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난 그 대화에서 물러나 그냥 방 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 다.

따지고 보면 아직도 그는 나보다

훨씬 지위나 급이 높다. 하지만 이 제는 그가 멋있어 보이는 대신 한심 해 보일 뿐이다. 대체 사람이 왜 저 럴까? 그 약혼녀는 어떻게 된 건 데? 그때 임신했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런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 이, 나의 가치까지 깎아내리는 것 같았다. 난 세렉이 당황하면 할수록, 인간이 덜된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 록 나의 과거가 비참했다. 그리고 황제가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 에까지 다다랐다.

황제는 작게 웃었다. 목격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웃 음 말고, 비웃음이 아래에 깔린 언

제나의 웃음이다.

“내가 들은 것과는 조금 다르군.”

“무엇을……?”

“내가 듣기론, 네가 셀레스티아를 노예상에 팔아넘겼다고 하던데? 등 골까지 빼 먹고 사람을 파는 그런 것을 골디나에서는 뜨거운 연인이라 고 하나? 제국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거든.”

세렉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봤다.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황제 폐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 는 내가 신기해? 내가 봐도 내 삶 이 신기하다. 황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아, 자네에겐 잊고 싶은 기억 이겠군. 매일 침상에서 이런저런 이 야기를 하다 보면 별 하찮은 과거 이야기도 나오기 마련이지. 셀레스 티아를 너무 탓하지 마라.”

“그것이…… 도대체……-”

세렉이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 다가 황제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황제는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가, 다시 몸을 돌려 세 렉을 바라봤다.

“세렉이라고 했나?”

“ 네.”

“황태후의 소속으로 들어간 것은 다행이군.”

“……네.”

“내 소속이었다면 아직 목이 달려 있진 않을 거야. 아무튼, 모처럼 이 렇게 부르크 제국의 일원이 된 걸 축하하네. 앞으로도 제국의 번영을 위해 살아 있는 동안 힘써 주길 바 라네. 난 이만 바빠서.”

아무리 지금 상황이 모욕적이라고 해도 황제가 간다는데 허리를 뻣뻣 하게 세우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렉은 황망한 얼굴로 황제에게 엎드려 절했다.

황제가 떠나고 한참 초조한 듯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세렉은 날 쳐다봤다.

“예뻐졌단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 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네, 셀레스티아.”

“더러우니까 말 붙이지 마.”

“하지만 너도 알잖아? 평민 출신 이 출세할 수 있는 건 마법뿐이라는 거.”

“……그게 뭐가 어쨌단 거야.”

“네가 아카데미 출신으로 성공하 려고 황제한테 몸까지 팔고 있단 건 알겠지만, 그거 그냥 다 이용당하는

것뿐

결국 참지 못하고 세렉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그의 한쪽 뺨이 붉 어졌다. 때린 내 손이 더 아팠지만 그딴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황제 폐하도, 나도 모욕하지 마, 개새끼야.”

세렉은 슬슬 기분이 나빠지는 기 색이었다.

“셀레스티아, 이러지 마. 내가 너 랑 네 동생을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 는데. 내가 한순간 잘못된 판단을 했기로서니, 우리가 얼마나 오랜 연 인이었는데……오 그 정돈 다시 생각

해 줄 수 있잖아.”

“다시 생각해.”

“그래.”

“그 약혼자분은 어쨌어?”

“아, 어느 약혼자 말이야……?”

진짜 미친놈. 뭐 이딴 새끼가 다 있나 싶다.

“네 애를 임신했다는.”

“아아, 어찌어찌 결혼할 생각까지 했었는데, 그 알량한 귀족 가문에서 나 같은 평민 출신이랑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해서 결국 무산됐어.”

“아이는……?”

“유산됐다고 하더라. 아마, 아이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결혼했을 텐 데.”

아쉽다는 얼굴을 하는 건 그 여 자분이 그리워서가 아니겠지. 그냥 그 귀족 가문과 결혼했으면 조금 더 지위 상승이 쉬웠을 테니.

“하지만 결과적으론 잘됐지. 합병 건이 있으니까. 너도 만나고. 아, 사 미디온은 잘 지내?”

“내 동생 이름, 입에 담지도 마.”

“네 동생이랑 내가 알고 지낸 세 월이 얼만데, 그렇게까지 굴 건 없 잖아.”

“내 동생이 너 때문에 죽을 뻔했 는데도 말이야? 은혜 입은 분의 조 처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내 동생은 집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죽었어. 알 아?”

“설마 그렇게까지야 됐겠어. 너도 알잖아, 내가 그렇게 매정한 놈은 아니라는 거.”

세렉은 헤프게 웃으며 어깨를 으 쓱해 보였다.

사미디온은, 내 동생은 내가 떠난 뒤로 찾아온 사람은 르베르티티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세렉은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내

동생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거다.

“개새끼, 다시는 내 눈에 띄지도 마.”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연회장 의 반대쪽 끝으로 걸어갔다.

세렉은 날 붙잡으려는지 따라오려 는 듯 일어섰지만, 황제가 있는 쪽 을 한번 쳐다보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천재니 뭐니 하고 칭찬 듣기에 바쁘던 그에게 그렇게까지 매운 소 리를 한 사람은 황제가 유일할 테 지.

남의 재능을 팔아 어디까지 올라 간 다음 주락하는지 내가 두 눈 뜨 고 반드시 지켜봐 주겠어.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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