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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21화 (21/103)

- 21화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서야 황제 는 천천히 입을 뗐다.

“리온도 가끔은 쓸모가 있군. 과 연, 예쁘군.”

리온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인물의 이 름을 모조리 외웠던 터라 동명의 이 름이 몇 개 떠올랐지만, 대화의 맥 락으로 보아 황제의 친우이신 티아 헤브 공작가의 리온 님을 말하는 것 같았다.

리온 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걸까?

황제가 평소에도 칭찬이 후하긴

했지만,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내가 웃으며 급히 옆에 선 다른 귀부인의 행동을 복사해 치맛 자락을 쥐고 살짝 무릎을 굽혀 보이 자, 그는 픽 웃곤 돌아섰다.

그러는 사이에 각국의 원수를 대 표하는 사신들이 도착했고, 황태후 까지 들어섰다. 어디인지는 모르겠 지만 틀림없이 세렉도 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황태후가 뽑은 마법 장교들이 온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난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중간에 티아헤브 공작께서 빈첸조 와 챙, 네로와 나를 단상 위로 불러 올렸다. 사람들이 날 어찌나 쳐다보 는지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아카데미의 촉망받는 인재 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소개된 우리 는 굉장한 박수를 받고서야 단상에 서 내려올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함께 온 빈첸조와 다른 두 명이 같이 있지 않았더라면 난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 지도 못했을 거다.

단상에서 내려와서 빈첸조가 건네 주는 물을 받아 마시고서야 난 겨우

정신이 들었다. 빈첸조가 부드럽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못 알아볼 뻔했어, 너무 예뻐서. 정말 너무 예쁘다.”

“고마워. 너도 멋있어.”

농담이 아니라, 연한 파란색의 정 장을 입은 빈첸조는 꽤 그럴싸해 보 였다. 우리가 얘기를 하는 사이에 다른 두 명의 대표인 챙과 네로는 우리에게 인사하려고 애쓰는 다른 무리에게 끌려가 버렸고, 우리는 그 둘을 희생양으로 삼아 의자에 앉아 조금 쉴 수 있었다.

“연회 오는 건 처음이지?”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참 석하는 건 처음이지. 내가 어정쩡하 게 고개를 끄덕이자, 빈첸조는 일어 서더니 내게 팔을 내밀었다.

“음악 들리지? 나가서 춤추자.”

“ 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아깝잖 아.”

대체 뭐가 아까운 걸까. 하지만 난 귀족 나리들의 춤 같은 건 전혀 출 줄도 모르거니와 더 주목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냥 앉아 있을 뿐인데, 인재라고 소개받았다 는 이유로 쏟아지는 시선이 과했다.

“그러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줄게.”

“글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흰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개를 들고 보니 티아헤브 공작가의 리온 님이다.

“너무 강권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 지, 빈첸조.”

“끼어들지 마세요. 데이트 신청하 고 있는데.”

“아가씨가 싫다잖아.”

“싫다고 한 적 없거든요. 그렇 지‘?”

둘은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내가 둘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리온 님 이 날 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지만, 황제께서 아카 데미의 인재들에게 내린 부상(리프) 은 황제와 첫 춤을 함께 출 수 있 는 영광이라고 하는군. 어쩌지? 여 자는 한 명밖에 없으니, 셀레스티아 양이 맡아 줘야겠는걸요.”

빈첸조가 한숨을 쉬었고, 리온 님 은 내게 윙크를 했다.

“부담스럽겠지만, 잘해 봐요.”

갑자기……?

리온 님은 손바닥을 펴서 한 방

향을 가리켰고, 거기엔 다른 나라의 사신들과 환담을 하는 황제가 있었 다.

아니, 부담스러운 정도가 아닌데.

어떻게 거절할 방법을 찾고 싶었 지만, 난 황제가 말한 이상 이게 반 드시 행해질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부상은 황제와 첫 춤을 함께 출 수 있는 영광이라니…… 갑자기 정 해진 거 아냐? 미리 그런 언질을 주든가! 갑자기 그런 걸 멋대로 정 하면 어떻게 해. 그냥 자긴 일하고 있는데, 내가 놀고 있으니까 꼴 보 기 싫어서 그런 걸 제안한 건 아니

겠지?

진짜 춤 같은 건 출 줄도 모르는 데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음악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정 말 본격적으로 춤곡이 연주되기 시 작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흥겨운 곡 은 아니라 부드러운 곡이다. 이런 걸 왈츠라고 부르던가?

곤란한 얼굴로 있는데, 황제가 제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고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게 보였다. 평소엔 얼 굴을 보면 반갑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지 마……

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귀찮은 일 을 해치운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팔을 쓱 내밀었다. 난 일단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어떻게 해 야 할지 몰라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 다. 주위의 여인들이 부럽다는 듯 한숨 소리를 내쉬는 게 들려왔다.

“뭐 하는 거지? 내 팔을 잡아.”

“못 추는데요.”

“춤이요 춤출 줄 몰라요.”

“……그런 가능성은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생각보다 재밌겠군.”

재밌는 건 황제 혼자겠지. 난 아 니다.

우선 떠오른 것은 세렉이었다. 오 늘은 최대한 눈에 안 띄는 것이 내 목푠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와 있다면 틀림없이 날 보게 되겠 지.

하지만 그런 문제는 이제 사소하 다. 이젠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다른 것보다 비키와 아카데미의 3 반 귀족 자제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실수하는 건 정말로 싫었다.

“이게 무슨 부상이에요! 벌칙이 지. 절 창피 주실 셈이 아니라면 제

발 그만둬 주세요.”

“하지만 매번 저 공작가 여식을 데리고 첫 춤을 해치우는 것도 이제 슬슬 그만할 때가 됐는데, 적당한 핑곗거리가 모처럼 생겼잖아. 난 양 보할 생각이 없다. 춤이 그렇게 싫 다면.”

“……오늘은 넘어가 주시는 거예 요‘?”

“빨리 해치우지.”

그런 식으로 해치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난 단호하게 날 바라보는 그가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

고 한숨을 쉬며 그 팔을 잡았다.

“이렇게 잡으면 돼요?”

“ 잘하는군.”

황태후는 무대에 나설 생각이 없 어 보이니, 첫 무대는 황제가 장식 한다. 다른 누구도 없는 무대에 나 와 황제 둘이 서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것 같았 다. 나도 어지간히 간이 크다고 생 각했는데, 너무 긴장해서 손이 다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진정하고 날 봐라.”

“진정이 되겠어요? 전…… 이런 자리는 처음인 데다가……,”

“진정해.”

명령한다고 진정되는 게 아니잖 아. 난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팔 위에 손을 올렸지만,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셀 레스티아.”

황제가 내 이름을 부른 건 처음 이었다.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 다. 그의 적안이 언제나처럼 시선을 마주해 왔다.

“난 겁내지 않으면서 무대는 겁내 는 건가. 내 옆에서 수행할 셈이라 고 해서 아카데미까지 보내 줬더니,

보기보다 간이 작군. 사람들이 좀 쳐다보는 게 뭐가 어떻지?”

“창피를 당하기 싫을 뿐이에요.”

“내 발을 밟아라. 춤은 내가 춰 주지.”

“제가 어떻게 그래요.”

“치맛자락도 긴데 무슨 걱정인 가.”

“하지만 폐하……;

나보고 폐하 발을 밟으라니. 그건 또 그것대로 큰일이다.

“그렇게 아프고 나선 더 반쪽이 됐는데, 무게를 걱정할 일은 아니

지.”

“……무게의 문제가 아닌데요.”

“나한테 베개도 던지질 않았나.”

그건 그렇다.

새삼 이 황궁에 와서 있었던 일 들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로 황제에 게 베개도 던졌지. 나도 모르게 웃 음이 터졌다. 그런데 이깟 춤 같은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갑자기 긴장이 싹 사라졌다.

황제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반복 되는 음악의 선율이 어마어마하게 울려 퍼지는 이 순간,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발 아프 시면 말하세요.”

난 슬쩍 구두 앞코를 그의 발에 올렸다. 정말 긴 치맛자락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그를 밟고 있는 건 티 도 나지 않았다.

“매번 귀찮기만 했는데, 춤도 꽤 재밌군.”

“절 놀리시는 게 재밌는 거겠죠.”

“그것도 그렇고, 널 만지는 건 기 분 좋은 일이니까.”

마법진의 효과를 운운하는 거겠 지? 좀만 더 효력이 좋았다간 정말 황제가 매일 날 안고 잤을지도 모른

다.

난 그와 함께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내일은 그의 상처를 돌봐 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 온도가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의 발등에 앞코를 겹친 내 발은 물 흐 르듯 움직였고, 그의 단단한 팔이 잡아 준 덕분에 몸도 부드럽게 천천 히 음악을 따라갔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주변을 둘러볼 수도 있게 되 었는데 비키가 날 쏘아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이제 나도 이 춤이 재밌게 느껴 졌다.

황제는 한 곡만 추고 날 놓아줄 것처럼 말했지만, 다른 귀족들이 모 두 무대로 나서고 나서도 두 곡 동 안 더 날 붙들고 있었다. 난 딱히 하는 일 없이 그의 행동에 맞추고 있을 뿐이었지만, 마지막 곡 때는 시선이 좀 흩어진 것을 느끼기도 했 고, 그리 어렵지 않은 반복적인 패 턴을 외워서 끝의 몇 소절은 내 발 로 춤을 췄다.

황제는 놀란 듯 날 봤다.

“역시 머리가 좋군.”

난 그가 비키와 비키의 부모를 나무란 것도 기분이 좋았고, 춤도 생각보다 재밌었고, 무엇보다 비키 의 짜증 나는 시선이 세 곡 내내 따라다니는 것이 제일 재밌었다. 그 래서 담뿍 웃으며 대답했다.

“미래의 고용주님께 칭찬을 들으 니 기쁠 따름이옵니다.”

그는 또 웃었다.

어떨 때 웃는지 잘 모르겠다. 연 극적인 말투를 좋아하는 걸까?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 그의 웃음이 너 무 보기 좋아서, 난 나도 모르게 춤 이 끝날 때까지 그의 얼굴을 뚫어져

라 봤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 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어쩐지 점점 가슴이 간질간질해져서 시선을 먼저 피한 건 나였다.

춤이 끝나고, 나는 그동안 주변의 다른 춤추는 사람들을 열심히 관찰 한 까닭에 무사히 마무리 인사를 하 고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 진짜 주저앉을 것 같았다. 황제는 이만 가 봐야 한다 며 떠나갔고, 나는 직접 집어서 마 실 수 있는 드링크 바 쪽으로 가서 잠시 앉았다.

발도 조금 아팠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했다.

무알코올 칵테일을 들이켜면서 오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누가 옆 에 와서 앉았다.

“오랜만에 보네.”

난 고개를 돌리고 그가 누군지 알아채는 것과 동시에, 잔 안에 남 아 있는 음료를 옆에 앉은 사람의 머리 위로 부어 버렸다. 미처 어떻 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도 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렉은 조금도 화나지 않는 듯, 침착하게 손수건을 꺼내 머리카락에 서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닦았다.

“성질은 여전하네, 셀레스티아.”

난 그를 쏘아보았다.

“이젠 내 이름이 다섯 글자인 걸 알긴 아네, 개새끼야.”

“……네가 그런 욕도 할 줄 알았 던가? 정말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 어.”

이가 절로 갈렸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얼굴 하나 만 반반하고 곱상한 그 자식은, 지 금 보니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다. 그냥 멀대같이 생겼다. 황제 폐하에 비하면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다.

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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