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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20화 (20/103)

— 20화

5, 궁정 연회

연회 날의 아침이 밝았다. 황제가 그 드레스를 주고 간 뒤로, 괜히 이 연회가 어마어마하게 큰 자리처럼 느껴져서 긴장하는 바람에 잠을 좀 설쳤다.

볕이 창으로 들기 시작하기도 전 에 눈을 뜬 나는, 지금껏 가져 본 옷 중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화려하 고 아름다운 연갈색 드레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소매와 풍성한 치마 부분에 가는 금

색 실의 망 같은 것이 덧대어져 있 어,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것이 특히 예뻤다.

슬그머니 잠옷을 벗고 깨끗하게 세수한 뒤 드레스를 몸에 걸쳐 보았 다. 드레스는 어디 한 군데 크거나 작은 곳 없이 맞춘 듯이 꼭 맞았다. 일할 때 입는 옷을 맞출 때 치수를 잰 거로 맞춰 주신 걸지도 모른다.

옷이 날개라더니 정말이다. 그냥 평범한 마른 몸은 보기 좋게 늘씬해 보였고, 풍성한 치맛자락은 구두를 신지 않으면 바닥에 질질 끌릴만한 길이였다. 내 연갈색 눈과도 잘 어 울리는 색이라 얼굴이 환해 보였고,

마치 귀부인처럼 보였다.

멍하니 거울을 보는데 역시 좀 과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 만 구두며 화장품이며 장신구 일체 까지 주면서 하고 오라고 명하시는 데에야 도리가 없다.

머리를 틀어 올리는 건 혼자 할 재주가 없어 루아나에게 부탁해 두 었다. 루아나는 내가 아카데미에 다 닌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이었다. 황제 폐하와 기타 몇 명의 관리자들을 제외하면 유일하겠지.

화장하고 구두를 신기까지 부산스 럽게 한 시간도 넘는 시간을 투자해 야 했다. 여하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모두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다. 르베르티티는 유행하는 화장을 잘 알아서 늘 내게 알려 주곤 했는데, 그걸 실전에 써 보게 될 줄은 몰랐 다. 옷에 지지 않게 열심히 화장도 하고 구두와 장신구까지 걸치고 나 니, 내가 봐도 내가 고와 보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루아 나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셀레스티아?”

“응? 들어와, 들어와.”

“세상에, 정말 너야?”

“그렇게 못 알아보겠어? 화장 이

상해?”

루아나는 양 볼을 손으로 누르며 내게 다가왔다.

“너무 예뻐. 사람 같지 않아. 허 리가 이렇게 잘록해? 화장도 너무 예뻐.”

“뭐야, 네가 더 미인이잖아.”

“꾸미면 진짜 확 달라지는 모양이 구나. 와…… 이 드레스는 다 뭐야? 목걸이도 세련됐어. 안목 진짜 좋 다.”

“내가 고른 거 아니야.”

“그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루아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너, 아카데미에서 만나는 사람 있어?”

“그런 거 아냐.”

그 말을 그대로 들을 루아나가 아니 었다.

“이번에 옮긴 반에서 같이 1등 했다던 그 사람이야, 혹시? 그 사람 이 그렇게 친절하고 착하다며.”

“아니래도.”

“그 사람 오늘 참석해?”

“뭐……:

여기서 제대로 부정해야 했는데, 난 나도 모르게 이 드레스를 준 황 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입을 다물자, 루아나는 기합 을 넣고 날 제 앞에 앉혔다.

“머리 도와줄게.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서 잘하고 와야 해.”

“응……스 고마워.”

루아나가 생각하는 ‘잘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보였지만, 신이 난 얼굴을 보니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준비를 마친 것으로도 이미 녹초 가 되었다. 난 일찍 갔다간 구두를 신고 오래 서 있어야 할 것 같아 엄두가 안 나서 방에서 좀 더 시간 을 보냈다.

방에서 고개를 빼고 정원을 내다 보자, 여러 대의 마차가 질서 정연 하게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게 보였 다. 연회에 참석하는 마차가 속속들 이 도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창턱에 팔을 괴고 한참을 바깥 구경을 했다. 그러다 문득 익숙한 문양을 봤다. 파란 바탕에 연두색으

로 위아래로 줄을 긋고, 가운데에는 손에 별을 쥔 인어가 누워 있는 문 양이었다. 골디나의 왕실 문양이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 연회의 주요 안건이 합병이라 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왕 실 주요 인사까지 참석하는 줄은 몰 랐다.

그런 자리에 교복을 입고 갔으면 정말 안 좋은 의미로 눈에 띄었으리 라.

그럼 황태후는 제가 육성하는 마 법 세력들을 선보이고, 황제는 아카 데미의 주요 인재들을 소개하는 자

리가 되는 건가? 생각할수록 구도가 묘했다. 황태후가 황제 독살까지 모 의할 정도로 권력을 탐하고 있다면, 이 연회, 그냥 온화하고 조용하게 넘어가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괜히 긴장돼서 심장이 뛴다.

잔뜩 긴장한 데다가 처음으로 높 은 구두를 신었더니, 연회장까지 가 는 것만도 기가 질렸다.

입구를 지키고 선 시종장님은 내 가 내미는 초대장을 받고 들여보내 주면서도 날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

다. 하긴 나도 그렇고, 일할 때는 가슴에 달린 배지나 옷차림을 먼저 보게 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럴 수 도 있다.

내가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 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 었다. 그들은 가벼운 음료를 즐기며 본격적인 연회 시작 전부터 자신을 마음껏 뽐내는 중이었다.

난 바로 앞에 서 있는 백금발의 여자아이가 눈에 익다는 걸 알았다. 아는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해도 뻘 쭘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비키인 건 좀 그렇잖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려는데, 비키 가 와인 잔을 위로 들며 몸을 홱 돌렸다. 비키는 시종을 찾는 대신 나를 먼저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너?”

“안녕.”

“너, 뭐냐고!”

“밖에선 존대하라는 건 아니겠지? 아직까진 아카데미의 동료잖아.”

“평민 주제에 이렇게까지 꾸미다 니. 전 재산을 여기에 쏟아부었어.”

비키가 짜증 난 얼굴로 고개를

까딱하자, 그녀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던 여자애 하나와 남자애 둘이 나 를 에워쌌다. 꾸몄다고 시비를 건다 고? 진짜 비키는 뭐든 시빗거리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저 애들은 진짜 학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이렇게까지 종을 자처하며 산단 말인가. 그나마 무리가 줄어든 것은, 여기에 초대받는 귀족급이 되 지 않아서겠지.

비키는 팔짱을 끼고 날 위아래로 노려봤다.

“네가 슈반에 갔다고 모든 일이 끝난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 뻔뻔 한 낯짝의 평민 계집애야. 네가 아

무리 발버둥을 치고 지위가 높아져 봤자, 결국은 내게 굽실거려야 할 거야. 내게 반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카데미 시절까지뿐이니까 마음껏 즐겨 둬.”

“그럼, 좀 더 즐길게.”

“이게……! 진짜 미친 거 아냐?!”

비키의 옆에 있던 남자애가 언제 나처럼 물잔을 내게 확 끼얹으려고 했다. 난 평소와 다른 옷차림이 가 장 먼저 신경 쓰였다. 빈정대는 것 은 상관없었지만, 이 드레스는 황제 에게 직접 받은 거다. 연회가 본격 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이걸 망치 는 건 곤란했다.

그 남자애의 손목을 붙들려고 하 는데, 나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손 이 그 물잔을 쥔 손을 붙들었다.

그 손의 주인은 처음 보는 사람 이었다. 비키의 얼굴이 창백해진 걸 보며 난 그 사람의 차림을 잽싸게 살폈다. 시녀로서 연회에 한 번 참 석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연회 참석자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과 특징, 그들의 취향 같은 것 을 모조리 외워 두었던 것이 이럴 때 빛을 발했다.

빨간 과일 모양이 새겨진 배지를 단 그는 3대 공작가 중 하나인 지 브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키가 그 가문의 딸이지. 즉, 저 남자는 비키의 아빠다.

그자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기 며 비키에게 쏘아붙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하지만 아버지! 쟤는 평민이라고 요.”

“오늘은 아카데미에서 훌륭한 성 적을 낸 자들을 부르는 자리다. 네 가 그 자리에 가지 못한 것을 수치 로 여겨.”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보고 계신다, 비 키. 행동을 조심해라.”

비키는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입 을 열다가, 그 말에 시선을 돌려 황 제 폐하를 찾았다. 나 또한 마찬가 지였다. 황제는 어디 저 멀리 단상 위에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는 내 뒤에서 팔짱을 끼고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

황제는 내 놀란 눈과 시선이 마 주치자 가까이 다가왔다. 적안으로 비키와 그녀의 아빠를 쏘아보며 입 술을 비뚜름히 올려 웃었다.

“자식 교육은 진즉에 했어야지.

황궁을 그런 용도로 쓰면 어쩌나.”

“죄, 죄송합니다.”

“방금 내가 물을 맞을 뻔했는데.”

아니잖아. 그렇게 가깝진 않았잖 아. 난 어이가 없어서 그를 올려다 봤지만, 비키는 낯이 창백해져서 어 쩔 줄 몰라 했다.

“황가를 대대로 모셔온 그대 가문 에는 늘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내 가 특별히 신경 써서 모두가 평등하 게 교육받을 수 있게 양성하는 아카 데미에서 이런 평민 운운하는 소리 가 나오고 있다니. 그것도 자네 딸 의 입에서. 난 내 귀를 의심하지 않 을 수 없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가르치 겠습니다.”

“다시는, 이라고 말한 걸 믿어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비키는 낯이 창백해져서 황제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폐, 폐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 여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제가 특별히 더 신경 썼답니다. 오 늘은 특별한 연회라고 하셨지 않아 요? 그래서 더 곱게 차려입고 왔으 니…… 황제 폐하와 첫 춤을 추기에 모자람이 없을 거여요. 부디 이 한

번의 실수를 어여삐 봐주세요.”

황제는 작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오늘은 더 이상 얼굴을 보고 싶 지 않군.”

“ 폐하……-”

비키는 억울한 얼굴을 했지만, 비 키의 아빠는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테라스 쪽으로 데리고 나갔다. 대충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는 짐작 된다. 비키가 그렇게 가 버리자, 비 키와 친한 귀족 자제들은 황제께 어 떤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 되는지 시 선을 착 내리깔고 차례로 인사를 하

곤 사라졌다.

한 명씩 사라지고 나서도 황제 폐하가 계속 눈앞에 남아 있는 걸 깨달은 나는,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 예를 올리려는데 그가 내 팔 을 붙들었다.

“기껏 선물했더니, 옷을 구길 셈 이군.”

“……아, 죄송합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부르크 왕국의 예의범절 방’에는 귀부인의 예법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내 신분은 지금 붕 떠 있긴 하지만, 내 가 시녀처럼 굴고 다녀서도 문제일

것이다.

난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모 르는 황망한 상태가 되어 필사적으 로 다른 귀부인들이 인사하던 법을 떠올려 보았다. 치맛자락을 한 손으 로 쥐고 우아하게 인사했던 것 같은 데. 한두 번만 주의 깊게 봤더라면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내게 필요 없는 정보라고 생각해서 보지 않았 던 게 아쉬웠다.

하지만 잘 모르는 예법을 차려 봐야 소용이 없었다. 난 결국 어정 쩡하게 허리를 펴고 섰다.

황제는 내 앞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뭔가 할 얘기가 있나? 난

황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 렸지만, 머리 위에선 아무런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뭐지?

흘끗 시선을 위로 들어 황제의 귀하디귀한 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언제나 사람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시 선에는 쉽게 적응이 되질 않았다.

#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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