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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19화 (19/103)

- 19화

내가 아는 바로는 3으슈의 이 다 섯 명은 전원 귀족 자제들이다. 그 런데도 이런 정상적인 분위기라니. 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그 아카데미의 정경이 아닌가. 학문의 상아탑! 서로를 도 와 학문을 일궈 나가는 진정한 동료 애!

혼자서 감동에 차 있는 내게 다 가와 짐을 받아 주었던 흰 얼굴의 남자애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얼결에 그 손을 쥐고 악수했다.

“잘 부탁해. 네가 이번 1등이라 며?”

“아, 잘 부탁해.”

“내가 원래 1등인데, 이제 긴장해 야겠는데?”

손은 차가웠고, 황제와는 달리 아 무런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황제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게 된 내가 웃겨서 속으로 쓰 게 웃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 고 제국의 황제가 비교 기준이 되다 니. 나도 쓸데없이 출세했네.

경계하는 기색이라곤 느껴지지 않 는 순순한 말투와 선한 얼굴을 보는 건 기분 좋았다.

“그럼 네가……;

“맞아, 공동 1등이 나야. 연회 갈 때 같이 가겠네? 난 빈첸조야.”

“난 셀레스티아야.”

“앞으로 잘 지내 보자.”

반장이라면 원래 이렇게까지 친절 한 법인가? 선한 인상의 빈첸조는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 반 수업 진도라든지, 다른 아이들의 이름과 프로필 같은 것을 알려 주었 다. 고작 첫날인데도 난 빈첸조와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황가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겠지 만, 초대장에 적혀 있는 날짜는 그 리 여유 있는 미래도 아니었다. 고 작 일주일 후였다.

황제와 연회장에서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카데미 애들도 있는 데, 설마 나한테 아는 척이라도 하 시진 않겠지?

난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 서 내내 고민하고 있다가,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기사님께 여쭈었다. 황제 폐하를 만나 뵙고 싶은데, 청 해도 괜찮겠냐고. 기사님께선 분명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하 셨으니까, 내 쪽에서 뵙고 싶다고

청하는 게 좀 이상해 보이더라도 다 른 분들보단 더 잘 들어주실 것 같 았다.

기사님께선 마차에서 내리는 내 팔을 잡아 주시곤, 알겠다고 대답만 하고 사라지셨다.

방에 돌아와서 막 짐을 내려놓기 도 전에 하인이 와선 황제님께서 찾 는다는 전갈을 전해 주었다.

그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 있 는 화려한 황궁 복도를 지나 황제의 방에 도달했을 때, 호위병들은 내

얼굴만 보고도 덤덤히 문을 열어 주 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난 그 적막이 익숙 했다. 황제는 근처에 사람을 두는 걸 싫어했다.

침실 쪽으로 다가갔을 때 침대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폐하, 셀레스티아이옵니다.”

“이리 와라.”

어째, 목소리가 또 안 좋다. 마법 안 쓴다고 하시더니……소

황제 폐하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 는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로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내게 시

선을 주었다. 그는 아주 조금 수척 해 보였다.

난 깜짝 놀라 다짜고짜 그의 팔 을 만졌다. 그러다 그의 적안이 조 금 웃는 게 보여서 어이가 없어 옷 을 들치고 그의 등을 보았다. 그가 좀처럼 몸을 돌리지 않아서 손을 밀 어 넣어 단단한 근육이 잡힌 등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부효과 반응이 심하다면 손에 확 연히 느껴질 정도로 열기가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

위를 보고 누워 있어서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그저 얼굴을 뵌 지

좀 오래되어서 덜 나은 상처가 조금 번져 있을 뿐.

괜찮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나는 말도 없이 황제의 몸을 너무 더듬은 것 같아서 그에게서 손을 떼고 조금 물러나 섰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오랜만이군.”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넌 안색이 괜찮아 보여 다행이 다. 시험도 잘 쳤다던데.”

또 대답 대신 하고 싶은 말을 하 는 그였지만, “시험도 잘 쳤다던데.” 라는 한마디에 지나치게 기분이 좋

았다. 그 한 문장이 주는 감흥이 너 무 커서, 심장이 다 두근거릴 만큼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어찌나 기분 이 좋은지 순간적으로 내가 세렉에 게 뭐든 다 퍼 줄 듯이 그의 한마 디, 한마디에 반응하던 그 시절이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과한 것들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주는 것들도, 등가의 것들이 다.

난 그 시절과 지금의 나를 확연 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 폐하께서 격려해 주신 덕분입

니다.”

“ 그렇군.”

“그래서 어찌하여안색이 안 좋으신지는……/

황제는 입을 꾹 다물고 날 마주 봤다. 누워 있어서 흑발이 흐트러져 있는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어두워 보였다.

조금의 시간이 더 흘렀지만 황제 는 계속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 다.

아, 진짜. 물으면 대답 좀 하지, 또 이런 식이다.

난 볼을 부풀리고 감히 황제를

노려보았지만, 황제의 적안이 나와 시선을 마주하자 금세 눈을 깔았다. 오래 살고 봐야지.

황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더니, 내가 시선을 피하고 나서야 느릿하게 입 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황태후가 합병의 기회를 틈타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 는 것 같다.”

“그래서요?”

“오랜만에 독을 좀 썼더군.”

“네……?”

독이라고? 난 화들짝 놀라 황제

의 낯을 다시 살폈다. 그의 적안은 이런 와중에도 사람을 빤히 마주 봤 다.

“또 울 건가?”

난 황제의 등에 난 빼곡한 상처 를 보고 울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황제의 그 수많은 상처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과 책임감이 너무 마음 아 팠던 건데. 막상 지금 와서 떠올리 면 너무 과잉 반응한 게 아닌가 싶 어 조금 부끄러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번에는…… 그냥 어쩌다가 그런 거라고요.”

“다행이군.”

“그보다 독이라니……,”

“날 죽이는 게 황태후가 권력을 잡기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리고 황태후는 보기보다 훨씬 더 교활하 거든.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독이 잘 듣는 체질도 아니고, 어릴 때부 터 단련되어 있으니까.”

독에 어릴 때부터 단련되어 있는 삶은 어떤 삶인가? 귀족 나리들이 독살당하지 않도록 약한 독으로 몸 을 길들인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어쩐지 나는 나보다 월등한 위치

에 있는 그가, 이럴 때마다 지쳐 보 이고 가엾게 느껴졌다. 싫다는 내게 도 억지로 기사를 붙일 정도로, 그 가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도 점점 더 이해가 됐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어쩐지 요즘 호출이 없더라니.

난 그미친 황태후가 어디까지 날뛰나 싶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진짜 저번에 볼 때도 미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직접 독을 넣은 범인은 잡았나 요?”

황제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담

담하게 말했다.

“죽였다.”

그 범인이라는 게, 황태후에게 포 섭당한 시종일지 하인일지도 모른 다.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전혀 그것이 무섭거나 섬 찟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땅한 대 가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무사하셔 서 다행이에요. 그간 안 찾으셔서 걱정했어요. 정말 아프셨을 줄은 몰 랐어요.”

“걱정했나?”

“그럼요.”

“ 그렇군.”

그는 손을 내밀어 내 팔목을 가 볍게 쥐었다. 그러곤 피곤한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역시, 무효화 마법진 때문인가? 편해.”

“ 네?”

“널 만지고 있으면 편하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상념들이 정리된 다. 최근에 전혀 못 잤는데…… 널 부를 걸 그랬군.”

난 내 팔목에 감긴 그의 큰 손을

바라보았다. 떨치려고 하면 떨칠 정 도로 가볍게 쥐고 있었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해당할 뻔한 뒤에 그는 무슨 생각을 그리 많이 했던 걸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많았던 걸까?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그가 잠이 들어 손이 스르르 떨어질 때까지 곁 을 지켰다. 그가 내 손목을 놓은 뒤 에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아, 자 는 얼굴을 한참을 더 바라봤다. 적 안이 워낙 위협적으로 빛나서 인상 이 강해 보이지만, 눈을 감은 그는 평범한 미남자였다.

결국,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에 대 해서 한마디도 꺼내 보지 못했다는 건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떠올랐다. 연회장에서 만나게 된 것 에 대해서나, 합병에 관한 것들. 하 지만 어쩐지 다른 문제들은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스에 적응하는 사이, 시 간은 어찌어찌 흘러 연회 전날이 되 었다. 이 연회가 합병을 축하하는 자리인지라, 재수가 없으면 세렉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

만…… 당장 그보다 급한 다른 고민 이 있었다.

이번 참석자 중 유일하게 나만 여자였다. 남자들도 멋을 부리려면 한도 끝도 없다곤 하지만, 여자의 의복과는 또 다르다 보니 상담할 대 상이 없었다. 3-슈의 반장 빈첸조도 한없이 잘해 주긴 했지만 남자라 좋 은 상담역이 되지는 못했다.

난 가진 옷들이 걸려 있는 옷장 을 노려보다가 다시 닫아 버렸다.

결국은 교복일까? 단정해 보이니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어차피 달리 입을 옷이라고 해

봤자, 가진 옷들은 모두 일할 때 입 는 것들이었다. 황제 폐하를 뵈러 갈 때 입는 옷들이 제일 좋은 것들 이었기 때문에, 그걸 입을까도 생각 해 봤지만…… 귀족 자제 중 공작가 급까진 참석한다고 들었다. 격이 차 이 나는 게 확 눈에 보이는 차림을 하고 가느니 교복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고심 끝에 교복을 잘 정리해서 벽에 걸어 두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후다닥 옷을 추스르고 일어나 문 을 열자, 문밖에는 거대한 상자를

든 시종을 옆에 낀 황제가 서 있었 다. 황제는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마법이 안 듣는 체질도 아니라 빠르 게 회복했다. 그리고 그제부터는 왕 성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 방문도 그 일정의 일환일까?

“폐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 이세요?”

황제는 내가 잠옷 차림이라 그런 지 평소처럼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 서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날 빤히 봤다.

“ 폐하?”

“연회에서 보겠군.”

“아…… 네. 알고 계셨네요, 역시. 제가 가는 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합병 전이고, 타국 사람이 있는 곳에 내 사람이 초라한 꼴로 나타나는 건 보고 싶지 않구나. 드 레스 정돈 내가 마련해 줘야 할 텐 데, 내가 미처 신경을 못 썼다.”

“……드레스요? 아뇨, 그러지 않 으셔도……,”

하지만 당장 내일이 연회고, 치수 를 잴 시간도 없을 텐데, 무슨.

난 손을 내저으려고 했지만, 그의 옆에 선 시종은 불쑥 상자를 내 옆

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보니 두 명 이 함께 옮기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니, 대체 이게 뭐길래……오 드레스인 가?

“제작을 의뢰한 다음 내내 까먹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일이 오래 걸 려 이렇게 됐군. 좀 더 일찍 줬어야 했지만, 내일 못 입을 건 없겠지.”

어떻게 하지?

난 감사함에 앞서 당황스러움이 더 컸지만, 얼떨떨하게 일단 몸을 푹 숙였다. 시종들이 보고 있기도 하고, 원래 황제의 하사품을 받을 때 갖추어야 하는 예는 꽤 거창한 거 니 까.

하지만 그는 내 인사를 받기도 싫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겸양의 말 따위에는 정말 쥐꼬리만큼도 관 심이 없는 그인 줄은 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예를 차리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아니, 대체 왜 황 제 주제에 예를 차리는 걸 싫어하는 데?

황제가 너무 휑하니 사라져 버리 는 바람에 난 그에게 간신히 감사와 배웅의 인사를 건네는 게 다였다.

그가 가 버리고 나서 난 내 방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거대한 그 상 자를 노려봤다.

시험을 잘 쳤다는 상이겠지? 하 지만 그 상자의 크기만 봐도 벌써 기가 죽었다.

난 이렇게까지 차려입어 본 적이 없는데. 옷을 바꾸면 머리와 신발과 화장까지 바꾸어야 하는 법이 아닌 가.

어떻게 갑자기 입으라는 건지, 다 소 걱정이 앞선 채로 상자를 열었 다.

그 상자가 과잉 포장의 산물로 거대한 규격을 자랑하고 있을 거라 고만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빼곡하게 물건들이 들어차

있었다. 어쩜 그렇게 정리를 잘했나 싶을 정도였다.

곱디고운 드레스가 한쪽에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벨벳으로 덧댄 뾰족한 코의 구두부터 시작하여 화 장품 세트, 금을 가늘게 엮어 만든 아름다운 장식의 목걸이까지 장신구 일체가 들어 있었다.

그중 압권은 드레스였다. 연갈색 의 내 눈과 꼭 같은 색의 기품 있 고 자락이 긴 드레스가 들어 있었 다. 슬쩍 대어 보자 몸에 맞춘 듯 꼭 맞았다. 마법진이 새겨진 등과 팔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내 마음마 저 읽은 듯한 드레스였다.

『II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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