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황제가 골디나의 여왕을 욕할 때 까지만 해도, 난 그래도 골디나에 조금이라도 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 에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욕을 들어도 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주권을 포기하고 제국에 합병한다는 건데?
제국의 과거 역사를 익히는 사이 에 이렇게 현대사가 급변해 있다니. 진짜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거 다.
난 생각을 털어냈다.
어차피 세렉과 만날 일 따위 없 을 텐데 지금부터 생각해 봤자 머리
만 아프다.
세렉이 황태후의 사람으로 연회에 온다느니 어쩐다느니 해도 내가 거 기 참석할 것도 아니고, 제국이 또 얼마나 넓은데. 게다가 황태후와 나 는 거의 척을 지다시피 한 사이다. 물론 나 혼자의 생각일 테고, 황태 후는 나 따위 벌써 잊어버렸을 테지 만 말이다. 마주칠 가능성 같은 건 아예 없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짜증 나는 과거 생각을 했더니 마음이 영 심란했다.
하지만 그런 심란함도 폭신하고 고급스러운 깃털 이불을 덮는다는 물리적 행복은 이기지 못했다. 이불
위에서 몇 번 더 몸을 뒹굴뒹굴하는 사이에 결국 만날 일도 없는 세렉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물리 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게 짜증 날 뿐.
한 채의 이불은 고이 한쪽에 모 셔 두고 깨끗하게 덮으려 애쓰며 다 른 한 채의 이불만 쓰고 있었다. 대 체 누가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 래 쓰던 침대와 이불이 싹 사라져 버려서 더 아낄 수도 없다.
황제와 만나야 이것의 출처를 물 어보든지 말든지 할 텐데. 대체 요 즘 뭘 하느라 이렇게 감감무소식인 지 알 수가 없다.
내일은 정말 내 쪽에서 만나 뵙 자고 청해 볼까……오
나는 오늘도 내부는 화려하되 외 관은 평범함을 가장한 마차를 타고 등교했다. 정문 근처에서 멀찍이 떨 어져 걸으려 노력하다가 기사님께 냉큼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정문 안에는 마치 내가 처음 등 교한 날 본 것 같은 풍경이 있었다.
학생들은 중앙 1층 현관 앞에 우글 우글 모여 뭔가를 읽고 있었다. 반 편성이 그사이에 바뀐 건 아닐 테 고, 중간고사 결과인가?
난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들어 그 공고문을 봤다.
〈중간고사 결과〉
무술 장교 양성 클래스
1-/1 9910203
1』9910234
1—9910232
보아하니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성적을 나열해 적은 것 같았다. 클 래스 옆에는 성적순으로 학번이 적 혀 있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성적을 노골적 으로 공개한다고? 애초에 성적별로 클래스를 나눌 때 알아봤다. 진짜 자비가 없네. 체계상으로는 신분 차 별이 없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졸업 성적에 따라 종사하게 되는 직업이 달라지는 만큼, 입학보다 졸 업 요건과 성적 구분이 엄격한 것으 로 유명한 아카데미다웠다.
난 눈을 굴려 관료반을 찾았다.
3-3 9930244, 3—스 9930201
3-/1 9930209
3-/1 9930299
제일 위에 나란히 적혀 있는 공 동 1등의 두 개의 학번 중에는 내 것이 있었다.
눈을 비비고 세 번이나 다시 읽 어 봤지만, 끝자리까지 분명히 내 학번이 맞았다. 세상에나.
난 이 정도를 기대한 적은 없었 다. 전교생의 성적을 다 한꺼번에 채점하는 시스템이라곤 알고 있었 고, 문제도 똑같다는 건 들었지 만…… 그래도 이런…… 관료 클래 스 전체에서 1등이라니……소
시선을 돌려 마법 장교 양성 클 래스의 성적표도 봤지만, 제일 위에 3반 학생이 적혀 있는 것은 나 하 나뿐이었다. 심지어 슈반과 3반의 성적 차이가 월등한지 어쩐지는 모 르겠지만, 0, 0, ?반의 경우는 성적 에 따라 조금씩 섞여 있기도 했다. 하지만 슈반과 3반은 기름과 물처럼 딱 명확하게 나뉘어 있어서, ⑴칸보
다 더 높은 성적을 받은 다른 반 사람도 나 하나뿐이었다.
말도 안 되게 기뻤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엇 보다도 너무나 내가 자랑스럽고 뿌 듯했다.
내 힘으로 관료반 전교 1등을 따 내다니. 물론 공동 1등이라곤 하지 만 그게 어딘가?!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을 받으시는 그 쟁쟁한 귀족 나 리들을 제치고 말이다.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난 종이 앞을 떠나지 못하는 다른
아이들 사이에 끼여 계속해서 그걸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돌아보니 큰 안경과 녹색 머리가 인 상적인 내 담당 강사님 제록스였다.
“셀레스티아, 얘기 좀 할 수 있을 까요?”
“아, 네! 물론이에요.”
난 홀린 듯 계속 읽고 있던 공고 문에서 그제야 눈을 뗄 수 있었다.
제록스 강사님의 방에 들어와 보
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난 종종 질 문하느라 이곳을 찾았다. 강사님은 그런 내가 기특하다는 듯 참고 자료 로 읽고 싶어 하는 자료를 후하게 구해다 주셨다. 좋은 분이다.
강사님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씩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축하해요. 정말 잘했어요.”
“다 강사님 덕분이에요. 정말로 요.”
“솔직히 이 정도까진 생각 안 했 는데, 사회로 내보내기가 아까울 정 도예요. 혹시 괜찮다면, 연구직에서 일해 보는 건 어때요? 졸업한 뒤에
요.”
“ 네?”
“물론, 셀레스티아가 하고 싶은 일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생각만 해 보라고요. 뭐든 잘할 것 같으니 까.”
황제에겐 내가 필요했고, 나도 황 제를 보필하는 일 말곤 달리 생각해 본 게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직업을 권유해 주고 그럴 자격이 있 다고 말해 주는 건 기쁜 일이었다. 난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제록스 강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상담할 때도 말했 지만, 셀레스티아 양의 열의와 성적 은 슈반으로 승급하기에 충분해요.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고, 이번에 정말 명확하게 입증되었고요.”
“진짜 저, 승급해요?”
난 너무 기쁜 나머지 웃음을 감 추지 못했다.
그것만을 그렇게 바라 왔는데, 정 말 승급이라니!
“그럼요. 당장 오늘부터 클래스를 바꾸게 될 거예요. 오전 수업 전에 안내해 줄게요. 담당 강사는 계속
제가 맡을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고 요.”
너무 기쁜 와중에도 무심코 생각 해 보면, 이번에도 그 반에 있는 귀 족 나리들보다 더 높은 성적으로 들 어가게 된 셈이다. 그러니 또 똑같 은 괴롭힘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 상황보다 더 나빠질 리 없었다. 그 가엾은 오 클라를 혼자 두고 승급하는 게 마음 에 걸릴 뿐이다. 쉬는 시간마다 찾 아가서 이야기를 나눠 줘야겠다.
강사님이 방긋 웃으며 내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받아 들어 살펴보 자, 봉투 겉봉에는 어쩐지 지나치게
눈에 익은 황실 인장이 찍혀 있었 다.
심장이 덜컥했다.
설마 황제가 뭘 한 건 아니겠지? 아직 아카데미 생활은 한참 남았는 데, 황제가 뒷배라는 게 알려지면 평화로운 내 아카데미 생활은 바이 바이 다.
별별 생각이 다 들어 망설여졌지 만, 기뻐 보이는 강사님의 재촉에 못 이겨 겉봉을 열었다. 봉투 안에 는 역시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는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이번에 셀레스티아 양이 보여 준 성적에 대한 보답이요.”
“……네?”
“너무 신나지 않아요? 이번에 황 제 폐하께서 특별히,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황실 연회에 초대 하셔서 장래의 인재들과 환담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전공 마다 1등이 연회에 초대됐답니다. 총 네 명이 가는 건데, 거기에 뽑힌 거예요. 정말 잘됐어요, 셀레스티아 양.”
“와아……-”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하며 머리를
굴려 보았다.
환담?
거기에 내가 포함된 건 우연인 가? 그래, 우연이겠지. 굳이 나한테 더 잘해 줄 필요도 없는 거고.
난 썩 마뜩잖은 기분이었지만, 황 제의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 러운 일이다. 아무리 거의 매일 보 는 황제라고 해도 좋은 일이겠지. 게다가 그냥 성적이 좋은 것으로 끝 나지 않고, 아예 주목받는 인재로 딱 인정받는 거다. 주위의 인식도 달라질 거다.
“정말 잘됐네요.”
제록스 강사님은 뿌듯한 아빠 같 은 얼굴을 하고 날 바라봤다.
“그거 알아요?”
“네……?”
“황실 건물은 살아 숨 쉬는 역사 의 배움터랍니다. 거기엔 선대 황실 가족들의 초상화도 걸려 있어요. 지 금까지 배운 지식을 더 넓힐 좋은 기회가 될 거랍니다.”
……알아요, 라기보다 황제 폐하 를 뵈러 갈 때마다 그 초상화들과 강제로 아이 컨택을 하곤 한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 다. 난 못내 신나 보이는 제록스 강
사님의 이어지는 축하를 뒤로하고 간신히 강사실에서 빠져나왔다.
짐을 가지러 돌아가자, 비키가 내 책상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었다. 난 신경도 안 쓰 고 내 자리로 가려고 했지만, 그녀 는 다시 날 막아섰다.
“비켜. 내 꼴이 보기 싫은 것 같 은데, 다른 반으로 꺼져 줄 참이니 까.”
비키는 짜증 나는 눈으로 날 쏘 아봤다.
“어딜 네 맘대로 간다는 거야?”
난 비키를 마주 노려봤다. 지금까 지는 무슨 짓을 해도 대꾸도 잘 안 하고, 그냥 본체만체하던 내가 정면 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건 처음이었 다. 비키는 좀 놀란 얼굴이었다.
“내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니라, 내 성적이 너무 잘 나와서 가는 거야. 너도 봤잖아, 내가 1등인 거.”
내가 말하고도 좀 재수가 없었지 만, 아카데미까지 와서 권력을 과시 는 재수 없음에 비하면 월등히 내 쪽이 정상적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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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면 네가 좀 더 잘했어야 지.”
“이게, 누구 앞에서! 내가 누군 줄 알고! 너도 연회에 간다며? 넌 초대장을 받아야 갈 수 있지만, 난 원래 가거든? 내가 너 같은 게 부 러운 줄 알아?”
비키는 평소처럼 내 책을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난 그 손목을 탁 낚아챘다.
그녀는 너무 분한지 날 쏘아보았 다. 하지만 그녀를 떠받드는 무리가 다가오기도 전에, 타이밍도 딱 맞게 제록스 강사님이 마침 앞문으로 들
어왔다. 강사님 앞에서까지 어쩌질 못하겠는지, 비키는 날 노려보다가 쿵쾅거리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 많지도 않은 짐을 꾸리는 건 금방이었다. 공부하느라 책을 죄 다 황궁의 내 방에 두었기 때문이 다.
난 그것들을 챙겨 복도로 나섰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3-3반도 안 녕이 다.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득 비키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신분이 높으시니 앞으로도 종종 눈 에 보이긴 하겠지. 하지만 난 기분 이 나빠지는 대신 패왕이 했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연인이냐고 물 으려고 했더니, 죽여 버리진 않겠다 고 했었지.
정치라는 게 꼭 애정이 있어야 결혼하고 그런 건 아닐 테니까, 정 말로 황제의 비가 될지도 모르겠지 만……소 그때가 오면 정말 몸을 납 작 낮추게 될지라도, 지금은 그런 인성을 가진 애한테 귀족 자제라는 이유로 굽실거리고 싶지 않았다.
슈반은 한 층 위에 있었다. 교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보니, 3-8반보 다 3-⑴칸은 지극히 조용한 분위기 였다. 책상은 여섯 개.
원래는 3-3반의 꼭 절반밖에 안 되는 다섯 명이었다. 내가 올라왔다 고 해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지 이제 여섯 명이 된 셈이다.
전원 일찍 등교해서 각자 할 일 을 하고 있던 아이들은 내가 들어서 자 손을 흔들어 주거나 가까이 다가 와서 짐을 받아 주었다.
와,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다니?
#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