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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17화 (17/103)

- 17화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하지만 그전에도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기 도 했고, 덜덜 떨리는 것 같기도 했 기 때문에, 실제로 누군가 날 안아 든 건지, 그냥 그런 느낌만 드는 건 지를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말소리 같은 게 웅웅거리 며 들려왔다. 꿈인 게 틀림없었다.

“시종장이 할 일은 사람들을 관리 하는 것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관리가 되고 있나?”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송구합니다.”

“그리고 의료관은 사람을 치료하 는 게 일이 아닌가?”

“……정말 송구합니다만, 폐하. 이 자에겐 제 치료 마법이 전혀 듣질 않습니다. 저로서도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만, 다른 자들에겐 틀림없이 듣는 거로 보아…… 제가 아니라 이자가 특수 체질인 것 같습 니다.”

“그런 변명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정당화하라고 내가 월급을 주는 줄 아는 모양이군.”

“몸살에 잘 듣는 보약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정말 잘 들 었으면 좋겠군.”

악몽은 여전히 계속되는지 기분이 썩 나쁜 듯한 황제가 호통을 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마치 현실처럼 느 껴지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황제는 줄장 중이었고, 그리고 황성 에 있다고 해도 나와 있을 땐 늘 단둘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의식이 까마득히 멀어 졌다가, 기분 좋은 따뜻한 손이 이 마를 짚는 것 같은 느낌에 또 잠깐

가까워졌다가 또다시 멀어졌다.

잠결에 또 다른 꿈도 꿨다. 황제 의 친구인 티아헤브 공작가의 남자. 그분의 목소리인 게 틀림없는 목소 리도 꿈에 나왔다. 황제의 목소리와 세트였다.

목소리에 맞추어 황제의 잘생긴 얼굴과 공작의 잘 기억 안 나는 얼 굴이 머릿속에 동동 떠다녔다.

“갑자기 아카데미에는 또 무슨 훙 미가 생긴 거야? 설마 저번의 그 아가씨 문제야?”

“글쎄.”

“그 아가씨가 그렇게 유능해? 왜

그렇게까지 관심을 두는데? 확실히 누가 봐도 매력적일 정도의 사람이 긴 하더라만.”

“그것도 그렇고, 솔직히 귀족들이 입 나불거리는 게 더 짜증 나니까 그냥 내버려 뒀던 아버지 대의 문제 도 슬슬 쇄신해야지. 언제까지 젊은 패왕이니 하는 소리 들으면서 납작 엎드려 살 수는 없으니까.”

그 공작가 남자의 웃는 소리.

“누가 들으면 진짜 네가 엎드려 산 시절이 있는 줄 알겠군. 네가 언 제 그렇게 살았다고 그래?”

“너무 웃는군.”

“흐음, 그래서 아카데미에 간섭하 고 싶으시다? 노골적으로 그냥 감싸 고도는 게 빠르지 않아?”

“그쪽이 내 취향이지만, 그 인재 님에게도 취향은 있으신 모양이라.”

“……뭐야, 그런 생각도 해? 너 가짜냐?”

“쓸데없는 소리 더 할 거면 꺼지 든가.”

“진짜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구석 이 있나 보네. 정말 둘도 없이 유능 한 구석이 있거나.”

“맞아. 둘도 없이 유능하지.”

“흐음…… 그 정도로 유능하면 뭐, 상이라도 하나 주지 그래? 그럴 만한 인재는 아닌가?”

황제의 고심하는 듯한 신음 소리.

공작가 남자가 다시 말을 꺼내는 소리.

“네 말대로 신분을 배제하고서라 도 정말 대단한 인재가 맞는다면, 두각을 드러내는 시점이 올 거야. 그때 제대로 치하해 주는 게 제일 정도(I트I)지.”

“정도라는 건 누가 개발한 건지 몰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 게다 가 귀찮아.”

“네가 바란 게 정도잖아.”

황제의 한숨 소리.

“황제 자리에 오른 뒤로는 귀찮은 일뿐이야.”

“왜 그래, 천하를 손에 쥐었잖아. 네가 죽으라면 죽을 신하도 있고.”

“어딨는데?”

“여기, 황제 폐하의 눈앞에.”

“쓸 만한 신하가 필요한데.”

“……그러기 냐?”

의식은 또 거기서 멀어졌다.

그리고 정말 정신이 또렷해졌을 때, 나는 잠들었을 때와 다름없는 모양새로 내 방 침대 위에서 잘 자 고 있었다. 잠결에 어지간히 많이 앓았던 것 같은데, 몸은 가뿐했다. 자면서 내내 시달리던 두통도 씻은 듯 나아져 있었다.

멍하니 몸을 일으키는데 뭔가, 뭔 가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난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땀에 흠뻑 젖어 무거운 옷을 벗

으려고 하다가 문득 내 방을 돌아보 았다. 그런데 짚 침대는 온데간데없 고, 천 안에 솜을 빵빵하게 채워 넣 어 원목 위에 올린, 아담하지만 비 싸 보이는 침대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은 또 어떻고? 다른 귀족의 방은 잘 모르지만, 황궁의 객실이나 황제의 방에서 보던 이불과 비교하여도 전 혀 질이 떨어질 것 같지 않은, 거위 솜털이 가득한 가볍고 따뜻한 게 두 채나 펼쳐져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데 누워서 이런 걸 덮고 있는 거지……? 아니, 분명 내 가 자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스

똑똑똑.

멍한 생각을 끊은 건 문을 두드 리는 소리였다. 난 벗으려다 만 옷 을 다시 정리하고 대답했다.

“ 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루아나였다. 손에는 따뜻한 죽이 들려 있었다.

“좀 괜찮아? 일어나 있네?”

“아…… 신경 쓰게 했네.”

“아냐, 신경이라니. 네가 아파서 다들 걱정했어. 세레나 님도 몇 번 이나 다녀가시고, 시종장님도 어쩜 그렇게 자상하게 돌봐 주시는지.”

“시종장님께서?”

워낙 자상하신 분이긴 해도, 한 명 한 명이 아프다고 일일이 돌봐 주고 다니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으 실 텐데……소 그렇게까지 직접 들르 셨다니 깜짝 놀랄 일이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아나 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다니까? 솔직히 이번 기회에 좀 감동했지, 뭐야. 우리를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구나 싶더라니까.”

“그렇구나……으 근데 혹시 이 침 대 말이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루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짚 침대가 아니네?”

루아나는 객실에서도 잘 쓰지 않 는 고급 원목 침대를 한눈에 알아봤 는지 한 번만 앉아 봐도 되냐고 물 었고, 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 운데도 루아나와 함께 몇 번이고 거 기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그 부 드러운 감촉에 감탄했다.

“……세상에, 이런 침대가 어디서 났어? 객실 침대보다 좋은데?”

“나도 잘 모르겠어. 자고 일어났 더니 생겼네.”

루아나는 내가 재밌는 농담을 한 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가리고 까르

르 웃었다.

같이 웃고 싶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봉급을 여기 다 털어 넣은 거야? 너도 참……-”

“……그 봉급을 다 모아도 이 침 대를 살 수 있을까?”

루아나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시종장님은 아닐 테고…… 루아나 가 전혀 모른다면…… 설마, 황제의 소행일까?

하지만 그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또 이틀이 흘렀다. 나는 심하게 앓 았던 것치고는 빠르게 몸을 회복했 다. 난 회복 마법이 전혀 안 듣는 몸인데, 마치 누가 밥에 보약이라도 탄 것처럼 빨리 나았다.

몸이 좋아진 뒤에는 다시 오전에 아카데미에 다녀오고 있었지만, 남 는 시간에는 언제든 부르면 가서 이 기현상에 대해 물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황 성에 돌아와 계신 게 틀림없는데도 좀처럼 나를 호출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먼저 황제 폐 하를 뵙겠다고 청한 적이 한 번도

없구나 싶었다.

예상하지 못했을 땐 방까지 불쑥 불쑥 찾아오곤 하더니, 막상 기다리 니까 오지 않는 게 정말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보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니까 너무 답답했다. 이쯤 되면 등의 상 처도 살펴야 하니까 내가 먼저 뵙자 고 청해 볼까 싶었지만, 막상 그러 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난 고작해야 황제 소유의 사람에 불과하니까. 아직 번듯한 신하도 아 니고, 좋게 말해 봐야 그냥 신하 후 보 1 정도?

청해 볼까 말까 하다가 황제가 먼저 날 찾는 게 더 빠르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어차피 황제는 이틀이 멀다 하고 날 불러 댔으니, 이번에 도 그럴 게 아닌가.

그러는 사이에 이틀이 더 흘렀다. 놀랍게도 황제로부터의 호출은 아직 이었다.

루아나는 매일같이 내 상태를 보 러 방에 들렀고, 난 루아나와 같이 솜털같이 가볍고 따뜻한 이불을 덮 고 오래 수다를 떨었다.

“시험 결과는 나왔어? 정말 공부 열심히 했잖아.”

“아직 채점 중인가 봐. 이번 주 중에 나온다는데…… 오래 걸리네. 강사님들도 수업하랴, 채점하랴 바 쁜가 보지, 뭐.”

“아, 설마 그것 때문인가?”

“응‘?”

“이번에 왜, 합병 건 있잖아. 이 번에 황태후 마마께서 마법 장교들 스카우트해 오셔서 마법을 본격적으 로 부흥시키겠다느니 하면서 발표하 신 게 있거든. 그런 것들로 아카데 미 강사님들도 바쁜 거 아닐까?”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법 장교 를 스카우트하다니……,

“합병하는 나라에서 마법 장교를 데려온다고?”

“응. 그중에서도 평민인데 엄청나 게 재능이 있는 마법 장교님이 있어 서 직접 데려오시나 봐. 엄청 잘생 겨서 벌써 인기가 많대.”

잘생긴 마법 장교라니. 정말 관심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루아나가 저 렇게 눈빛이 반짝반짝해서 열성적으 로 이야기하는데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그분이 그렇게 잘생겼어?”

“몰라. 소문만 들었지, 뭐. 이번에 합병 때문에 개최하는 연회에 오신 다는데, 스쳐 지나가다라도 보고 싶 다, 세렉 님.”

난 헛소리를 들었나 싶었다. 분명 지금 세렉이라고 한 것 같은데. 하 지만 그럴 리는 없다. 세상에 그런 우연이 흔할까.

동명의 마법 장교가 또 있는 거 겠지?

설마…… 아니겠지? 설마……오

“그…… 합병하는 나라가 어디라 고‘?”

“왜 있잖아, 수아르랑, 아, 이름

생각 안 나. 마법 왕국인가 하는 거 기.”

“골디나……는 아니지?”

“아, 맞다! 골디나! 그래, 거기!”

골디나 출신의 마법 장교 세렉.

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다 아찔했다. 악연은 악연인가. 왜 네 이름이 또 나와?

루아나가 돌아가고 난 뒤, 난 좁 은 방 안을 몇 번이고 맴돌다가 침 대에 드러누웠다.

세렉이라고? 그 세렉?

세렝게반과 살아평생 다시 만나는 일이 있다면 뺨이라도 시원하게 때 려 주겠다고 결심하긴 했다. 게다가 내가 훨씬 더 잘난 사람이 되어서 보란 듯이 속 쓰리게 해 줄 거라고 도 생각했지만…… 정말로 그놈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는 날이 올 줄 은 몰랐다.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제대로 된 사회적 교류의 혜택을 누 리지 못하는 사이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나긴 한 모양이다. 제국의 합병 건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며, 그 대상 에는 골디나도 포함된다는 것을 이

제야 알았다.

황제가 출장 간다고 했을 때, 어 디로 가냐고 한마디만 물어봤으면 이렇게 멍청하게 여태 모르고 있진 않았을 텐데. 내가 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골디나와 제국 사이는 원래도 종 주국과 흡사했다. 그런데 최근에 골 디나 내의 신분 차별로 인한 폭동 과, 계속된 좋지 않은 작황으로 무 더기의 빚을 안게 된 여왕은 끝내 주권을 포기해 버리기로 한 모양이 었다.

하긴 그전에도 빈민들이 노예로 팔려 나갈 지경으로 엉망진창인 상

태였으니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 골디나 귀족들의 반발이 어 지간했을 건데도 이 지경이 된 걸 보면 재정난이 심각했나 보다.

하긴 마법 왕국이라는 이유로 자 부심이 대단해서 빚을 져 가며 돈을 펑펑 써 댄 게 문제겠지. 근래 부르 크 제국이 아예 패권을 쥐어 버린 이후로 소국 간의 전쟁은 잘 일어나 지 않게 되었고, 마법의 수요는 계 속 증가했지만 가장 큰 수익원은 사 라졌다. 아마 그게 가장 큰 원인일 거다.

#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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