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난 악착같이 기를 쓰고 공부했다. 중간고사 이전에 놀기 좋은 이벤트 들이 정말 많았지만, 난 굳이 그런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같은 클래스 애들끼리 모여서 노는 곳에 얼굴을 내밀어 봤자, 좋은 꼴 보지 못할 게 뻔했고, 내 목표는 승급이 었기 때문에.
‘월등한 성적을 보이면’이라는 것 에 절대적인 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학원장이 내게 티 나게 잘해 준다지만, 귀족 들을 누르고 하필 평민만 진급시키 려면 그만한 ‘월등함’을 내보이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내 목표는, 이 부르크 제국의 역 사를 아예 모조리 달달 외워 버리는 거였다. 유명한 철학가나 과학자들 도 대개 자국 중심으로 서술되기 마 련이라, 골디나의 그것과는 전혀 다 른 지식을 쌓아 나가야 해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밤낮없이 기를 쓰고 공부했다.
그러는 중에 황제는 저를 치료할 때마다 아카데미 생활이 어떤지 꼬 박꼬박 물어보았다. 황제가 아카데 미에 관심 있어 한다는 말은 학원장 으로부터도 들은 바가 있는데, 과연 그는 정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귀족들의 괴롭힘 같은 건 처음에 야 상처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털 어놓았지만, 그 뒤로는 최대한 언급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황제에게 아 무리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키워 내고 싶다는 야망이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황제 그 본인부터가 신 분 제도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 던가. 말은 그렇게 해도 다른 나라 출신이기까지 한 내가 귀족들의 욕 을 일삼는 것은 좋게 들릴 것 같지 않았다.
똑똑똑.
중간시험 이틀 전. 내 팔뚝만 한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다가 눈이 아 파서 조금 쉴까 하는데, 문 두드리 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내가 하도 종일 책을 손에 서 안 놓고 다니니까 하녀 루아나가 종종 와서 기운을 북돋아 주고 가곤 했다. 루아나도 나랑 처지가 비슷해 서 부모님이 없었고, 우리는 이야기 가 잘 통했다.
난 오늘도 루아나가 왔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른 잦은 방문 자 중 세레나는 요즘 잘 보이지 않
았고, 황제 폐하께서는 근래엔 나를 제 방으로 부르면 불렀지, 몸소 이 런 구석진 방까지는 행차하지 않으 셨던 까닭이다.
그런데 틀렸다.
보던 책을 놓고 뛰어나가서 문을 열자, 또 눈앞에 얼굴이 아니라 가 슴팍이 있었다. 난 거의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인사를 올렸 고, 황제는 걸어들어와 문을 닫았다. 요 며칠 연일 무슨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듣긴 했는데, 그는 요즘 계 속 피곤하고 짜증에 절어 보였다. 오늘도 그랬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황제는 내 방에 들어오면 의자에 부터 앉곤 했는데, 오늘따라 호기심 이 생기는지 내가 보고 있던 책들을 뒤적뒤적 훑어보았다. 그러곤 내 노 트도 살펴보았다. 난 물에 젖은 흔 적이 있는 노트를 그가 보는 게 좀 부끄러웠지만 내버려 두었다.
“어려운 책을 보는군. 3클래스라 고 했나?”
“네.”
“8클래스에서 저 정도 책을 볼 필요가 있나? 현대 정치 개론서 중 에서 좀 더 쉬운 것도 있을 텐데.”
“곧 테스트라서요. 잘 보고 싶어
서…… 좀 이것저것 추가로 보고 있 어요. 발췌되는 책을 아예 통으로 봐 버리면 발췌문만 보고도 아니까 요.”
“그런가.”
그런데 황제가 이런 책을 다 아 는구나.
난 비교적 최신 이론들을 정리해 놓은 정치 개론서를 흘끗 바라보았 다. 황제가 정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까지 찾아 볼 줄이야.
처음엔 무력밖에 모를 거라 생각 했는데, 가끔 그와 말하다 보면 명
석할 뿐만 아니라 관심의 폭도 넓어 서 어떤 화제든 수월하게 이야기가 진행되곤 했다. 그리고 서류뿐만 아 니라 침상엔 항상 책이 놓여 있기도 했고.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출정은 아니고 출장이 있다.”
“ 네?”
“최근에 합병 건으로 논의되고 있 는 게 있어서.”
“……합병이요?”
그렇게 대단한 이야길 옆집 놀러 가듯이 하다니, 과연 황제는 황젠가.
“그래. 사흘 뒤에 보지.”
“아…… 그러면 막 마법 쓰고 그 럴 일은 없으신 거죠?”
“친교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가 다 른 나라를 먹으러 가는 건데, 마법 을 쓸 일이 있을 리 없지. 만약 무 력 분쟁으로 번질 어떤 조짐이라도 있다면 상대국은 멸망을 면치 못할 텐데.”
“……그것참, 그러네요. 근데 그냥 이야기를 하실 거라면 절 부르시지 않고 왜 직접 오셨어요. 바쁘신 것 같은데.”
“줄 것도 있다.”
“네‘?”
그가 내민 것은 배지였다. 난 멍 하니 그것을 내려다봤다.
배지는 아주 작은 금속 장식품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정말 많은 것 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절반은 노랑, 절반은 보라색으로 칠해진 데다, 중 간에 보필을 뜻하는 떠받든 손 모양 이 그려진 그 배지는 황제의 비서만 이 달 수 있는 것이다.
그걸 뒤집었다.
황제가 직접 수여했다는 증표로 새겨져 있는 사자 문양이 은빛으로 반짝거 렸다.
배지가 남의 가슴팍에 달린 것만 봤지 직접 만져 보긴 처음이었다. 난 너무 놀라 그를 바라봤다.
“……이걸……,”
“지금 달고 다니라고 주는 건 아 니다.”
“그럼 왜……?”
“내가 잠깐 출장 다녀오는 사이에 화분에라도 맞고 죽어 버리면 곤란 하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신 분으로 꿀린다 싶을 때 써라.”
“……폐하, 아닙니다. 이건 너무 과분합니다.”
황제는 내가 예를 차리는 소리를 할 때마다 영 따분한 얼굴을 하곤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그의 적안이 귀찮은 듯 천장을 쏘아봤다.
“그깟 배지 만들어 오라고 하면 하루 만에 만들어 오는데, 뭘 그걸 가지고. 소용도 없고, 감동도 없는 겸양의 소리로 내 시간을 낭비하는 쪽이 더 과분한 거 아닌가?”
“그러면 제 목표로 삼고 힘내라는 뜻으로 알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 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더 열심히 하다간 죽을 것 같군. 얼
굴이 빨개.”
황제가 내 이마를 짚었다가 손을 떼었다. 그러곤 알 듯 모를 듯 하다 는 듯 날 쏘아보기만 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남의 이마를 짚고 열의 정도를 알 수 있을 리가 없군.”
황제 폐하, 어떻게 살아오신 겁니 까.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의 이마를 짚어 주는 것도 보기에 이상할 것 같긴 하다. 수긍은 된다.
“그러시군요.”
난 내 이마를 살짝 짚었다. 별로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이제 가 보지. 출장 준비로 바쁘다.”
“……네? 네, 폐하. 살펴 가십시 오.”
황제는 간다고 하면 간다. 의자에 궁둥이도 붙이지 않은 그는 내 인사 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가 버 렸다.
난 폭풍같이 다녀간 그가 이상해 서 멍하니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 다. 그래서 뭐 때문에 날 부르지 않 고 직접 왔다고?
설마…… 설마하니 내가 시험 준
비하느라 정신없는 것 같아서 직접 온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 저 뒤적인 게 내가 공부하던 책이었 잖아.
황제에게는 뭘 물어도 제대로 답 변이 돌아오는 일이 없으니, 쓸모없 는 억측을 하게 된다. 난 말도 안 되는 생각은 그만두고 배지를 집어 들었다. 반짝거리고 영롱한 배지는 크기가 작은데도 꽤 무게감이 있었 다.
그의 말대로 이걸 무슨 신분을 증명하겠다고 쓸 수는 없다. 그다음 날부터 무슨 얼굴을 하고 아카데미
를 다니란 말인가? 절대로 못 한다. 다만, 이걸 준 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감을 꺼내 두었다. 이걸로 주머니 를 만들어 앞으로 정진하겠다는 뜻 의 부적으로 삼아 소중히 지니고 다 녀 야겠다.
황궁을 떠나는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 달라고 화냈다고 해서 굳이 그 바쁜 와중에 말해 준 것도 고맙다. 황제는 대답을 안 해서 문제지, 한 다고 한 건 꼭 하는 편이었다.
새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렇게 기대받고 있는데, 멍청한 귀족들에게 지고 돌아올 수는 없다.
난 고작 중간시험일 뿐인데 무슨 전투에 나가는 무사라도 된 양 필사 적이었다. 조금 쉬고 할까 하던 생 각 따위는 집어던지고 눈에 불을 켜 고 다시 책을 붙들었다.
공부에 절어 있는 사이에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고 이틀이 흘렀다. 마지막 날은 잠자는 스케줄 까지 완벽히 조절해 무사히 시험을 끝마쳤다.
예감이 좋았다. 모르는 문제는 하 나도 없었고, 참고 서적 삼아 읽었 던 책들에서 지문으로 나온 것도 많 아, 서술형 문제들도 막힘없이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길 게 써서 시험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 고 나니 손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분 좋은 성취감에 정신이 고양되었다. 마차를 타러 가는 그 짧은 길에 어 찌나 많은 시비에 걸렸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었지만, 그것들을 다 웃으 며 받아넘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내가 노력 해서 손에 넣은 것은 별로 없었구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다 면 하는 사람인데도, 세렉의 그늘에 만 가려 살다 보니까 뭔가에 욕심을 부리는 것 자체를 스스로 금하고 있 었다. 그리고 동생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당장 급한 돈을 벌려고 바둥 거리다 보니까 뭔가 제대로 된 꿈을 꿀 여력도 없었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나 간다는 것은 대단히 행복한 일이구 나.
내게 그런 기분을 알게 해 준 황 제 폐하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지금까지 좀 내가 잘한 부분도 있지만 적지 않게 툴툴거린 부분도
있는데, 앞으론 좀 더 잘해야지 싶 었다.
황궁으로 돌아와 그날 밤은 곧장 침대에 누웠다. 공부하느라 계속 잠 을 조금씩 줄였더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피로했다.
눈을 떴을 땐 아직 밤이었다. 어 쩐지 숨을 쉬는 게 더웠고 몸은 추 웠다.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이 상하게 눈이 잘 안 떠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무 거웠다.
아픈가? 그렇게 기를 쓰고 열심 히 다닐 땐 괜찮더니, 시험이 끝났 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나 보다. 원래 사람이 그럴 때 아프잖아.
오늘은 아카데미가 쉬는 날이라는 것을 떠올린 나는 이불을 몸에 꽁꽁 말고 다시 눈을 감았다. 꽤 두꺼운 겨울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기묘하 게 몸이 벌벌 떨렸다. 워낙 건강 체 질이라서 잘 안 아픈데……오 부작용 을 겪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심하게 몸살을 앓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 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안 좋은 꿈만 연달아 꿨다. 아주 어릴 적,
보육원 앞에 버려지며 엄마를 목놓 아 불렀던 아주 과거의 장면까지 생 각났다. 어차피 단편적인 기억뿐이 라 엄마가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 데, 그 영상은 왜 자꾸 되풀이되는 지 모를 일이다.
같은 클래스에 있는 재수 없는 귀족들의 얼굴도 시도 때도 없이 나 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 은 역시 악몽, 하면 빠질 수 없는 개새끼의 대명사 세렉이었다. 세렝 게반은 달콤하게 웃으며 너밖에 없 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 댔다. 꿈속 에서 칼이라도 뽑아 들고 싶었지만, 꿈은 꿈인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어서 그 악몽 같은 꼴을 수수방관 해야 했다.
자다가 깨고, 또 자다가 깼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나를 안아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배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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