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나는 내 자리를 골라 짐을 놓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아, 네가 셀레스티아니? 난 비키 야.”
밝게 웃는 미소가 귀여웠다. 나도 같이 웃어 줬다.
분명히 이 학원 팸플릿에 모두가 평등하게 학업을 이수 운운하는 내 용이 있었고, 학원장도 그런 내용을 미리 말했기 때문에 나는 편하게 반 말을 했다.
“안녕.”
비키는 더 짙게 웃었다.
“뭐야, 대답을 하네.”
비웃는 듯한 말투에 공기가 차갑 게 식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반말이 아 니라 대답을 했다고 시비를 걸다니. 과연, 사교계에서 단련된 분이라 이 거지.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다. 난 이렇 게 웃으면서 다른 사람 깎아내리는 부류랑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데.
“인사를 하면, 그럼 앞으론 씹을 까?”
“와, 당돌한 것 좀 봐. 너, 그런 태도로 괜찮겠어? 힘들 텐데.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하긴 평민들은 정보에 어두우니까. 사교장에도 못 나가니 내가 이해해 줘야겠지?”
“누구신데 그래?”
“황제 폐하의 아내 될 사람.”
“뭐……?”
“놀랄 줄 알았어. 후후, 앞으론 잘해. 알았어? 평민.”
주요 3대 공작가 중 하나의 딸이 라고도 들었고, 춤을 추긴 하더라만, 아내가 될 사람이라.
뭐,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얘기지 만, 그런 인성으로 일국의 황비가 되어도 괜찮을까 걱정되는 것은 사
실이다.
하급반에는 평민 비율이 훨씬 더 높다고 하더니, 8반에는 평민이라곤 오클라와 나, 둘뿐인 모양이었다. 학 생들이 한 명 한 명 더 올 때마다 그들은 부지런히 나와 오클라를 씹 어 댔다.
그렇게 아주 알차게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아 침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 이전에 학생들의 태도에 대 해 아주 크게 실망한 것은 수업 내 용으로 대번에 만회되었다.
어쩌다 8반에서 성적이 가장 좋
다는 이유로 반장으로 지목당한 나 는, 수업마다 쉴 새 없이 호명을 당 해 강사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다행히도 난 그걸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제대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 런 사소한 이유로 이틀째부터 괴롭 힘은 좀 더 노골적인 형태가 되었 다.
2주가 흐르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학용품 들이 사라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지 나가는 길에 화분이 떨어져 정통으 로 맞을 뻔하기도 했다.
성질 같아서는 참고 싶지 않았지 만, 어쨌든 상대는 귀족이었다. 쓸데
없이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온종일 말도 안 하 고 지냈으면 하는 모양이지만, 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난 대꾸하지 않으려 애쓰는 오클라와도 이야기하 고 싶은 만큼 했고, 학구열을 불태 우며 청강도 하러 다녔다. 이 기세 라면 슈반으로 승급하는 것도 머지 않은 것 같다고 담당 강사님께서 귀 띔도 해 주셨다.
내가 저들 마음에 흡족하게 적당 히 시키는 것도 못 하고 얌전히 앉 아 있기만 했더라면, 그런 유치한 괴롭힘은 금방 사그라졌을 테다. 하 지만 내 입장이 돼 봐라. 내가 이놈
의 아카데미에 오겠다고 도대체 얼 마나 오랜 시간 염원했던가? 세렉, 개새끼. 그런데 내가 저들의 눈칫밥 좀 덜 먹겠다고 아는 것도 모른 척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것도 틀리게 대답하고, 그러고 살아야 하겠나.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대로 모 른 체하고 살았다.
그러자 그 황제의 (자칭) 미래 부 인님께서는 내가 아주 못마땅하셨는 지 쉬는 시간마다 내 주위를 얼쩡거 렸다. 주위 귀족들도 그 여자가 황 제의 거의 유일한 부인 후보라는 의 견에 공감하는 눈치였고, 그런 이유 로 그 여자에게 굽실거렸다.
따지고 보면 그 우아한 파티장에 서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서로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으려고 더 화려한 정장과 보석을 갖추고 전쟁을 하시 던 분들의 자녀분들이 여기에 있는 거다. 경쟁을 기초에 두고 자란 애 들이라 인성이 안 좋은 건지, 어쩐 건지.
난 황제가 골디나의 여왕을 욕하 며 인재 풀 어쩌고 했던 말을 떠올 렸다. 뭐, 이 나라는 얼마나 평등하 다고 여왕님을 욕하고 난리람. 이 나라도 아직 멀었다.
당장 내 책상이 모든 것을 증명 해 주고 있질 않은가. 대체 어디서
공수해 온 건지 모를 쓰레기가 가득 쌓인 걸 보라지.
다른 건 괜찮았지만 학용품이 없 어지거나 노트를 내다 버리는 건 좀 짜증이 났다.
난 하굣길에 책가방을 메고 멀찌 감치 돌아서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갔 다.
외양은 평범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화려하기 짝이 없는 실내 공간이 드 러나는 괴이한 마차 말이다.
난 거기에 올라타서 안에 같이
탄 기사님에게 이것저것 필요한 것 들을 말했다.
“연필이랑 노트, 또 부탁드려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바로 어제 사 주신 건데, 오늘 또 사 달라고 부탁드려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냥 제가 사게 해 주시면 좋을 텐데.”
“다음에 허락을 구하겠습니다.”
내가 상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제가 상관이라는 거겠지.
“오늘은 돌아가셔서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황제는 겉보기에는 지극히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난 이제 그의 적안 이 가늘게 떠져 있는 것만 봐도, 그 가 고통을 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3주 만에 보는군.”
난 대답을 안 하고 예를 차린 뒤
그의 옆으로 다가가 침상 끄트머리 에 앉았다. 황제는 윗옷을 벗고 엎 드렸다. 등은 누구한테 얻어맞은 것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아, 또 이 모양이야.
난 입술을 꽉 깨물고 두 손을 천 천히 올렸다.
“아카데미에 보냈더니, 말을 못 하게 된 건가? 환불을 요청해야겠 군.”
난 짜증스레 대꾸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불만스러운 목소 리가 튀어 나갔다.
“가면 간다고 말씀이나 좀 해 주
시면 안 돼요? 그럼 제가 미리 손 이라도 좀 더 쓰잖아요.”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다.”
“네. 그러시겠죠.”
“앞으론 하지.”
선선하게 말해 주는 걸 들으니 기분이 좀 풀렸다. 아니, 시키면 이 렇게 잘할 거면서 미리 잘하면 안 되나?
황제는 고통이 꽤 심한지 내 손 이 움직일 때마다 작게 신음을 흘리 고 있었다. 난 더 이상 투덜거릴 수 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는 한참 말이 없더니 문득 말
을 꺼냈다.
“아직도 방을 옮길 생각은 없나?”
“……이 옆방이요?”
저번에 황제가 내게 말한 그 위 험하다는 거, 사실 황제의 이런 생 각 없는 파격적인 대우에 분노를 느 낀 뭇 귀족들이 날 암살하려 들까 봐 위험하다는 건 아닐까? 저번에 보니까 다들 그에게 꼬리를 못 흔들 어서 난리던데. 머리라도 만져 달라 는 개들인 양.
그리고 지금도 괴롭힘당하는 거라 면 충분하다.
“그런 말씀 그만두세요.”
“그렇군.”
그렇군, 이라는 말은 그만두겠다 는 소리가 아니다. ‘너의 의견은 잘 알았지만, 그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 다’라는 말이다.
진짜 어이가 없다.
“네가 황성을 비우니까 좀 별로더 군.”
황제의 말만 들으면 내가 일 년 정도 여행을 갔다 온 줄 알겠다. 난 매일 여기로 돌아오고 있는데. 일정 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고 멀리 다 녀온 건 황제가 아닌가? 난 고작 오늘 아카데미 수업을 들으러 다녀
온 것뿐이다. 심지어는 끝나자마자 달려왔는데.
어이가 없어서 작게 웃었다. 내 동생도 이 정도로 날 보채지 않는 다.
그냥 거침없는 권력의 정점이라서 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뿐이 다, 이 사람은.
그 점이 귀엽지 않기도 하고, 귀 엽기도 한 것 같다.
“아카데미는 좀 어떤가?”
“아카데미는……?
“거기가 수도에서 나름대로 명문 으로 인정받는 곳인데.”
확실히 교사의 수준은 대단했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빠르게 진단해서, 내게 필요한 기초 학습 부분을 따로 자료로 만들 어 제공해 줄 정도였다. 그들은 날 평민으로 알고 있을 텐데도 그 정도 로 한다면야……오
하지만 학생들의 수준은 글쎄, 그 들이 열심히 공부하든 말든 대충 귀 족으로 잘 자랄 테니까 그렇게 공부 할 필요도 없겠지.
내 주제에 황제의 자존심을 깎아 내리는 것도 이상한 거 아닌가.
“커리큘럼이 좋더라고요.”
“그리고?”
“강사진도 좋고요.”
난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하고 말 았다.
황제는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싶 은지 옷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바로 잠들 게 아니라 오늘 남은 용 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물러가려고 일어나는 데, 나보다 한참 키가 큰 그가 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여긴 왜 이렇지?” 어디가 왜?
황제는 언제 봤는지 드러난 내 어깨를 만졌다. 한번 만져도 된다고 허락한 후로 몇 번은 더 물어보더니 그 뒤로는 아주 조물딱거린다.
신경 써서 고개를 뒤로 돌려도 도저히 안 보이는 상처라 잘 몰랐 다.
난 손으로 상처를 덮으며 몸을 돌렸다.
“아……그거 별건 아닌데요.”
“어떻게 여기에 상처가 나지?”
“뭐……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그사이에 애인이라도 생겼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애 인이 생긴다고 왜 등이 긁히는데? 진짜, 생각하는 것하곤. 학교의 정신 나간 귀족들이 장난칠 때 화분 조각 이 옷 안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긁혔 나 보다.
“애인이 있는 건 폐하시겠죠. 전 그냥…… 좀 충돌이 있었을 뿐이에 요.”
황제는 두 문장 모두에 대해 하 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 가 먼저 언급한 건 후자의 문제였 다.
“충돌이라. 좀 더 설명해 보지. 듣고 싶군.”
저 오만한 태도도 오랜만에 보니 까 좀 그리웠던 것 같다.
난 별것도 아닌, 학생들 사이에서 나 있을 법한 유치한 괴롭힘에 관해 서 이야기하는 게 창피했지만, 나름 대로 재밌는 화두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자란 환경에선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도끼로 찍어 버 리는 일이 있더라도, 이런 자잘한 괴롭힘 같은 유치한 일은 잘 없었으 니까. 교양 있는 말투로 사람을 살 살 긁는다든가, 그런 거.
황제 폐하께서는 선 채로 이야기 를 끝까지 듣곤 되물어 왔다.
“이름도 궁금하군.”
“ 이름이요?”
“그래.”
“……꼭 말해야 하나요?”
“그래.”
말해도 별로 상관은 없지만 이거 야말로 과잉 정보 아닌가. 알아서 뭐 하게?
난 얼떨떨한 얼굴로 걔들의 이름 을 하나하나 말했고, 마지막으로 황 제의 애인이라고 주장하시는 영애의
이름도 말했다. 나도 모르게 황제의 표정을 슬쩍 관찰했지만, 그의 표정 은 그리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 비키가 저번에 연회에서 같이 춤추신 분이죠?”
“그래.”
“혹시……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 요‘?”
황제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얼 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죽여 버릴까 봐 걱정인가? 그래도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진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닌데. ‘혹시 애인이세요?’라
는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4, 더 나아질 이유
같은 반 아이들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복수 는 누구보다도 빨리 ⑴칸으로 승급 하는 거다.
시험을 칠 때마다 반이 재편성되 는 것은 아니었으나, 학기 중에도 월등한 성적을 보이면 슈반으로 편 성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언질이 있 었다.
슈반에 가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8반에 있 는 귀족 나리들의 코를 눌러 줄 수 는 있겠지.
#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