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무슨 소리야?”
“우리 황제 폐하께서, 노예상들을 안 좋아하신다는 소문이 있거든. 노 예상들을 보면 꼭 말을 거신다고 말 이야. 그래서 노예를 사셨다기에 마 음이 바뀌신 건가 했는데, 역시 황 제 폐하께선 사람을 사고팔고 하는 걸 싫어하시는 거라니까? 내가 딱 생각해 봤는데, 잘생긴 사람은 마음 도 넓은 것 같아. 안 그러니? 정말 오늘도 다시 반한다.”
난 루아나의 태도가 너무 웃겨서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골디나의 여왕님께서 신분 차별이 확고하게 구분된 것을 완화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기 도 했다.
정말로 신분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이 깊은 황제라는 건 틀 림 없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잘생기긴 하셨 지.”
“그치? 넌 자주 가까이에서 뵐 수 있으니까, 정말 부럽다니까.”
“그 대신에 안 좋은 점도 있어.”
“뭔데?”
“목이 간당간당하다는 거? 아무래 도 긴장되기도 하고.”
“하긴…… 그럴 것 같아. 멀리서 봐도 그런데 넌 더 걱정되겠다. 이 번 출정 말이야.”
출정?
금시초문이었다.
“출정을 하신다고?”
“몰라?”
“응. 난 못 들었는데?”
루아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면 서 간략하게 설명해 준 바에 의하면 이번에 국경 쪽에 또 말썽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급히 다녀오신다 는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전에 내게 그렇게 말이 많았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찾 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연회 직후에 하루 고작 쉬고 갑자기 원정을 떠나다니 이게 무슨 극한 직업인가.
가능하면 멀리 가시기 전에 한번 돌봐 드리고 싶은데, 무슨 일정을 제대로 공유를 해 주셔야 말이지. 그렇게 말이 많으시면서 대체 왜 일 정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는 지……스
저번에도 그랬다. 어디 가면 간다 고 이야기나 할 것이지.
서운할 게 아닌데 서운했다. 황제 의 몸을 돌보는 프로 직업인으로서.
진짜, 너무한 거 아냐. 그 전에 나랑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면 몰 라. 세렉 이야기는 그렇게 끝까지 캐묻더니. 어디 간단 이야기 한마디 만 해 줬으면 좋았잖아.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거 겠지.
난 서운함과 짜증을 애써 억눌렀 다.
또 등이 그 짝이 되어서 돌아오
기만 해 봐라. 최대한 아프게 치료 해 줄 거다. 등을 막 발로 꽉꽉 밟 아 줄 거다.
루아나는 내가 표정이 어두워지자 황제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함께 황제 폐하를 위한 기도를 올리자고 권했고, 난 어쩔 수 없이 이름밖에 모르는 제국의 신 에게 난데없는 첫 기도를 올려야 했 다.
루아나는 돌아갈 때까지 연회장에 서 있었던 황태후 관련 일에 대해서 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 은 시녀가 봤는데 아직 소문이 안 퍼지다니, 정말 황태후에 대해 모두
두려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카데미의 입학 절차에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고, 난 그동안 동생도 보러 다녀오고, 간단한 입학시험 준 비도 하고, 교복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황제는 어쩐지 일주일이 다 되도록 날 찾지 않았고, 난 전에 없 는 한가함을 만끽하며 시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시험 당일.
나는 사전 시험을 치러 아카데미 에 방문했다. 평범한 평민 신분으로 방문했는데도, 본의 아니게 후원금 을 많이 내고 중도 입학을 하게 된 처지의 내게 학원장은 관용 있게 굴 었다.
직접 커리큘럼 상담도 해 주고 학원 안내도 해 주는 학원장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얼마를 내고 들어온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직접 들을 용기는 없어 묻지 못했 다.
골디나에서는 학문과 관련된 건물 들을 모두 흰 벽돌로 짓는 데 비해 서, 부르크 제국에서는 주로 회랑이
길게 이어진 갈색 벽돌로 짓는 모양 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은 안 에 수십 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었 고, 각 건물끼리 회랑으로 유기적으 로 연결된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은 몇 가지 코스가 있었는데, 크게 무술 장교 양성 코스와 마법 장교 양성 코스, 그리고 관료 양성 코스로 나뉘었다. 난 당연히 관료 코스를 수강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마법과 관련된 코 스에도 흥미가 있었다.
학원장은 시간만 남는다면 다른 수업을 들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 다. 가을 학기 개강 시기와 딱 맞게
와서 정말 잘됐다는 이야기도 했고, 황제 폐하께서 가끔 직접 방문하기 까지 하는 제국 제일의 아카데미에 온 것에 자부심을 가지라는 이야기 도 했다.
아무튼, 난 아카데미에 다니는 중 에도 이 학원장이 내내 이렇게 굴지 만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짧게 준비한 시험은, 솔직 히 말하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쉬웠 다. 레벨 테스트가 목적인 시험이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쉬웠다고 해서 내가 시험을 다 잘 쳤다는 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난 역사 과목은 낙제를
면치 못할 게 뻔할 정도로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과목에도 모르는 문제들은 있었다. 부르크의 역사적 인물들과 관련된 내용이었으 니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치는 내내 세렉의 시험을 같이 준비하며 옆에서 질문해 주던 날이 갑자기 생각났다. 세렉은 공부 를 할 때마다 매번 앓는 소리를 해 댔다. 그가 친 시험이 이것보단 어 려웠길 바랄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얼마나 멍청이를 좋아했던 건 지 스스로를 싫어하게 될 것 같으니 까.
아카데미에는 회랑 윗부분을 따라
지은 보기 좋은 기숙사도 있었다. 여기에서 잔다면 정말 공부하기도 편하고 아침저녁으로 다니기 편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야 들었지만, 내 겐 그림의 빵이나 다름없었다. 난 기숙사 구조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며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 드릴 수 있다고 말하는 학원장에게 어설 프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 마침내 아카데미에 처음 등교하는 날이 되 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교복까지 차려입은 채로 황성 뒷마 당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기사님 한 분과 시종 한 분이 최대한 평범해 보이려 애쓴 마차 한 대의 곁에 서 계셨다.
그 기사님과 시종님께선 내가 원 하는 것은 최대한 맞춰 주겠다고 했 고, 나는 일단 그 마차를 평범해 보 이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더 으리번쩍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요청을 들은 것은 난생처음 인지 시종님은 처음엔 당황한 눈치 였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평범한 마 차의 외관을 갖춰 주신 거다.
난 얼른 마차에 올랐고, 기사님도 내 대각선 자리에 올라타셨다.
평민이라고 떠들어 놓고 등-하교 에 기사를 데리고 다니라니 너무 눈 에 띄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같이 평범한 사람을 엄호하겠다고 기사를 붙여 놓은 걸 보면, 황태후 사건에 너무 데여서 황제가 오버하 는 것 같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보내 주겠다는 말을 철회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뭐라고 반박하지도 못했다.
내가 그저 멀찌감치 다니려고 노 력 해야지.
외장보다 내장은 쓸데없이 금붙이 가 반짝이고, 벨벳으로 된 소파에는 화려한 장식이 박혀 있었는데, 그것 까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황성에 있는 가장 소박한 마차가 된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천천히 움직 이기 시작했다.
뒷골목에선 절대 들을 수 없는, 비싸고 정교한 쇠축을 사용한 소음 적은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난 혼자 웃고 말았다.
이 황궁에 온 뒤로 뭐 하나 평범 한 일이 없다니까.
아카데미의 정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마차를 내렸다. 기사님은 어 쨌든 제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게 업 무이기 때문에, 정문까지 날 엄호할 듯 따라오셨다. 난 일행이 아닌 척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정문에 들어섰다.
정문의 안쪽에는 나와 꼭 같은 옷을 입은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나와 학업을 함께할 미래의 친구들 을 보는 내 기분은 벌써 좋아졌다.
난 기쁜 마음으로 그 학생들이
몰려들어 보고 있는 커다란 안내문 을 함께 읽었다.
〈성적에 따른 반 편성〉
1-
1-8
1-0
1-01: 검술 장교 양성 클래스
2-/1
2-8
2-02: 마법 장교 양성 클래스
3-/1
3-3
3-^
3-03: 관료 양성 클래스
클래스별로 스부터 ?까지 나누다 니. 수준별 맞춤 학습을 시키는 건 좋지만 너무 성적 제일주의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귀족들이 꽤 많이 다 닐 텐데, 괜찮나?
반 옆에는 그 반에 소속된 학생
들의 학번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내 번호는 3-8의 제일 앞에 적혀 있었다.
스가 가장 성적이 좋고 ?가 가장 안 좋은 것으로 생각하면, 시작하는 성적이 그리 나쁜 편이 아닐지도 모 른다.
난 별다른 생각 없이 내 반을 찾 아갔다.
반에 책상이 놓인 구조로 보건대, 한 반은 열 명 남짓으로 구성된 모 양이었다. 나는 꽤 일찍 도착한 편 인데도, 나보다 먼저 온 남자애가 있었다. 안경 때문에 눈이 작아 보 일 정도인 것만 봐도 어릴 때부터
쓸데없이 책을 가까이한 게 틀림없 었다.
곱슬머리의 남자애는 유순한 얼굴 로 날 올려다봤다. 어쩐지 동생이랑 닮은 것 같은 갈색 눈을 보고 있자 니,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 다.
“안녕! 난 셀레스티아야.”
“아, 응. 난 오클라.”
“난 가을 학기부터 등록해서 오늘 이 첫 등교야.”
“……아, 그래서. 왠지 처음 보는 이름이다 싶긴 했어.”
그래서?
“무슨 소리야?”
오클라는 눈을 데룩데룩 굴리더니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작게 속삭였다.
“여기 애들은 나한테 말 안 걸거 드 ”
“왜?”
“너도…… 그렇게 될걸.”
“무슨 소리야?”
“3반에서 1등 했지, 네가? 이 반 에…… 쟁쟁한 귀족가 자식들이 많 아서, 자기보다 성적이 위에 있는 사람은 가만히 안 내버려 둬.”
그게 뭐야. 진짜 유치하다.
“가만히 안 두면 어쩔 건데? 상 관없어.”
“……그래도 조심해. 나랑도 이야 기 안 하는 게 좋아.”
그런 그가 가엾게 보여서 난 한 숨을 푹 쉬었다. 동생이랑 닮은 애 가 그러고 있으니 어쩐지 불쌍했다.
“한 학기 내내 그러고 산 거야?”
“아니, 난…… 괜찮아. 너도 그냥 말 안 하고 지내는 게 좋을 거야. 제발 부탁이야.”
뭘 얼마나 심한 짓을 당하며 지 냈길래 부탁씩이나 하는 거야?
내가 뭔가 말을 더 해 보려고 했 지만 그때 앞문이 열렸고, 오클라는 얼른 내게서 시선을 떼고 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신성한 학문의 상아탑에서 그런 말도 안 되 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뭘 어쩌라고?!
내가 시험을 너무 잘 본 게 귀족 나리들 마음에 큰 스크래치를 남긴 거라니, 말도 안 된다. 내가 얼마나 많이 틀렸는데? 자국민 주제에 얼마 나 역사를 모르면 나보다 성적이 안 좋을 수 있는데? 그딴 성적으로 상 처 입을 마음이라면 상처 입으라지!
그때 난 앞문으로 들어오는 여자 애가 눈에 썩 익다는 걸 눈치챘다. 백금발이 찰랑거리는 그 여자애는 교복을 입고도 썩 예뻐 보였다. 틀 림없다. 황제와 연회에서 같이 춤을 춘 여자다.
그 여자애는 제일 앞자리에 앉았 고, 따라 들어온 시종이 그녀의 가 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물러갔다.
배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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