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긴말하게 하는군. 넌 머리도 좋 고 편하다. 지금 부족한 건 신분과 걸맞은 지식인데, 그것은 내가 준비 해 줄 수 있다. 그러면 된 거 아닌 가?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피곤하던 차다.”
그가 정말로 내가 편하고 필요해 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라면, 노력 해서 그가 원하는 만큼의 사람이 되 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나를 필 요로 해 준다는 게 솔직히 기쁘니 까.
황태후의 제안을 안 받아들인 상 인 걸까?
망설이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표정이 너 무 지쳐 보였다.
아카데미에 가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동경해 왔다. 그 꿈이 이런 식으로 이뤄질 거라곤 생각도 해 보 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말 열심히 배울게요.”
그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작게 끄덕였다.
“그래. 시종장에게 이야기는 해 두지.”
“그럼 동생 집에서 같이 살까요?”
“아니. 그건 안 된다. 무조건 이 곳에서 자라.”
“여기서 살라고요?”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군. 여 기서 자라고.”
무슨 철없는 애들을 관리하는 부 모도 아니고, 통금 시간 맞춰서 집 에 돌아오라는 건가, 사람이. 난 어 처구니가 없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 다.
“진심이세요?”
“이건 양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그 파티 건으로 이미 넌 대 외적으로 노출된 신세다. 황태후의
말이 맞는 구석이 있다는 건 인정하 지. 처음부터 널 내 방에 가둬 놓고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했으면 조용 했을 텐데.”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난 지금이라도 짐을 꾸려 도망쳐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제가 다른 데서 자면 무슨 문제 라도 생겨요?”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럼 나도 곤란하겠지.”
위험하다는 목숨이 황제의 목은 아닐 테고, 내 이야기겠지.
‘황제가 날 아끼는 게 보이면 제 삼자가 날 약점으로 삼기 좋다’는 이야기인 듯했다.
굳이 그럴 만한 제삼자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미 황태후부터가 그 런 일을 벌였으니, 황제의 과대망상 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죄다 생략된 말을 가지고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도 이제 잘한다. 제가 좋을 대로의 화법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날 느끼며 스스 로를 좀 동정했다.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내용으로 그 치료법도 나아지겠지. 효율이 늘
면 나야 좋으니.”
“아, 그거요.”
드디어 마법 무효화를 내가 어떻 게 익히게 되었는지 말할 타이밍을 잡았다. 황제가 저번에 질문했는데 내가 대답을 미뤘던 게 이거다.
별로 듣기 좋은 내용도 아닌 데 다가, 별것도 아닌 구구절절한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싫었던 것뿐이 지…… 굳이 말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동생도 데리고 와 주셨고. 동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거 지금 말씀드릴게요.”
“뭘 말이지?”
“치료법, 어떻게 익혔는지요.”
황제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난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말하 려 애쓰며, 마법 무효화를 내가 왜 익히게 되었는지 그에게 털어놓았 다. 세렉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설명 에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세렉과 나는 워낙 가난해서 알약 을 구할 처지가 아니었고, 나는 그 의 재능을 꽃피워 주고 싶어 마법 무효화를 독학했다’는 맥락의 이야 기는 구차하게도 좀 길어졌다. 황제
는 일련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더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제 사정을 듣고 나니 내 치료 법의 출처가 뒷골목이라 신뢰가 좀 떨어진 걸까?
“그래서, 지금 이런 몸이 되었지 요.”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조금 짜증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은 이해했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얼 굴을 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 가 내 멍청한 과거에 대해 곱씹는 게 싫었다.
난 얼른 화제를 넘길 겸 팔을 걷 어붙였다.
“뭐지?”
“잘 보세요.”
난 어깨까지 소매를 걷어 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하얀 피부에 진한 색으로 수식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내 팔을 보았 다. 뭔가 새삼스러웠다. 사실 골디나 에선 이게 금기시되는 일이기도 해 서, 달리 남에게 보여 준 일이 별로 없었다.
“만져 봐도 괜찮나?”
“네.”
일일이 허락을 구하는 황제라니, 웃긴다.
화제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손끝으로 천천히 더듬으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이걸로 그게 가능하다고? 얼마나 많이 새긴 거지?”
“등이랑 목 뒤까지요.”
황제는 내 목덜미 머리카락을 들 추고 그것에 손을 댔다. 손가락 끝 만 닿았을 뿐인데도 뜨겁게 느껴졌 다.
“이렇게까지……오 마법진이 아무 리 면적에 비례한다지만 부작용이 적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새기는 과정도 고통스러웠을 테고. 아무튼 지극정성이었군.”
화제 전환이 성공적이라는 건 잘 못된 판단이었다.
실제로 그때 지독히 고통스러웠고 부작용이 많았던 것도 맞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굳이 하고 싶지 않았 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등 쪽도 조금 더 걷어 올려 보여 주었다. 그의 시 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간지
러웠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이 내 등에 닿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아프진 않나?”
“통증은 없습니다.”
“이걸 네가 다 이해하고 새겼다 고? 독학으로?”
“ 네.”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
난 멋쩍게 볼을 긁었다.
“등이나 어깨에 있는 건 제가 직 접 할 수가 없으니까, 문신 집에 가 서 똑같이 그려 달라고 했어요. 골 디나의 수도 뒷골목에 진짜 끝내주
게 문신을 잘 그리는 할머니가 한 분 계시거든요. 솔직히 제 손보단 그 할머니 손이 믿을 만하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무식한 짓을 하고도 아 직 살아 있는 게 신기하군.”
“저도 무식한 짓이라곤 생각해요. 지금은 다시 하라고 해도 못 한다고 요. 진짜 사람이 왜 그렇게 멍청했 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좋았나?”
맥락을 벗어난 질문에 난 고개를 돌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 패왕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그런 가까운
거리가 불편하지 않은지 내 눈을 응 시하며 고쳐 물었다.
“새인지, 개인지 하는 그놈 말이 다.”
“……세렝게반이요?”
“그래.”
그놈은 좀 생각을 안 하려고 해 도, 내 지난 삶에 너무 깊숙이 개입 되어 있었던 내 삶의 목표이자, 내 어린 시절을 모두 바쳐 사랑한 첫사 랑이기 때문에 과거 이야기를 하면 이름이 꼭 튀어나오나 보다.
“뭐…… 그땐 그랬죠.”
“지금도 그립나?”
빨래터의 하녀들만큼이나 이 황제 님도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걸까. 그 런 걸 왜 묻고 그런담.
“그럴 리가 있나요. 그 개새끼 때 문에 이 먼 타국까지 팔려 와서 얼 마나 고생했는데요. 폐하를 만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
“돌아가고 싶나?”
어차피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보 내 줄 생각도 없어 보이면서, 물어 보긴 왜 물어보는지.
난 하루 동안 내내 단련된 서빙 용 미소를 지으며 서비스 대사를 해
주었다.
“아뇨. 황제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이 아름답고 안전한 제국에 뼈를 묻 겠사옵니다.”
아, 웃었다.
예상하지 못한 황제의 깊은 웃음 에 나는 뜻하지 않게 놀란 모양이 다. 갑자기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걸 보면.
황제는 그날 말이 많았다. 난 아 마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술을 좀 마 셔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고만 생각
했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 괜히 대화 를 몇 번이고 곱씹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다가도, 와인이 잔뜩 묻은 스 카프를 빨다가도.
별건 아니고 너무 얘기를 많이 해서 그렇다. 이제는 주인님이 아니 라 미래의 상관이 될 사람이니까, 반추를 통해 대화했던 정보들을 저 장해 두는 거다.
오늘은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한 날이었다. 난생처음 연회장에 발을 들여 보질 않나, 연회장에서 시중을 들라고 청하러 온 사람이 황제의 동 생이질 않나, 황태후 마마께 불려가
서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질 않나.
그리고 마지막엔 패왕이 치료도 아니고 내 신분 건을 가지고 이야기 를 나누자고 불러들이더니, 비서가 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질 않나.
비서라니.
그 말을 들을 때도 가슴이 벅찼 지만, 다시 몇 번을 곱씹어 봐도 듣 기 좋다. 그리고 아카데미! 문턱에 발을 대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곳에 내가 정말 간다니.
역시 사람은 뭐든 전문 기술을 가져야 한다. 나처럼 아무짝에도 쓸
모없는 능력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 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노예 신분에서도 벗 어나잖아. 아카데미에도 가고.
난 신이 나 빙글빙글 돌아 침대 에 풀썩 몸을 뉘었다.
아카데미에 가면 배우고 싶은 게 정말 많다. 뒷골목 서점에서 쭈그리 고 앉아서 본 책들은 정말 이상한 고서적이 많았기 때문에 내 취향은 하나의 과목에만 편중되어 있지 않 았다. 약초학도 좋고, 마법학도 좋 고, 정치, 경제, 역사, 다 흥미가 있 었다.
혼자 책을 읽거나 독학하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 있는 일이지만, 아카 데미라니. 그 학문의 상아탑에서는 매일같이 토론이 이뤄지겠지? 틀림 없이 신분 같은 건, 학문과 진실만 을 탐구하는 그들에겐 중요한 문제 가 아닐 거다.
난 너무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다. 이제 이 사치스러운 목욕 시설도 적응되어서 황궁 밖에 나가면 아쉬워질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득 비누 거품을 내어 몸을 닦 다 말고 내 몸에 새겨져 있는 술식 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기에 좋진 않다.
징그럽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오 늘 봤던 그 수많은 여인의 매끄럽고 흠 하나 없는 살결을 떠올리면, 다 신 지워지지 않을 이런 마법진을 온 몸에 새기고 다니는 내 피부는 보기 에 좋진 않으리라.
어차피 연애는 할 생각 없고, 남 자 따위 다시 만날 생각도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꼭 남자가 아니라 도…… 뭐, 동료라든가, 친구라든가, 상관에게라도 좀 더 나은 모습을 보 이고 싶은 법이잖아, 사람이.
물을 세게 틀고 그 아래에 머리 를 가져다 댔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이제 나는 아카데미에 가서 열심히 공부 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 내 동생한테 맛있는 것도 먹여 주 고, 나도 맛있는 것도 먹고! 이 비 싼 제국 수도에 집도 하나 장만하는 거다. 황제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도 좋지만, 내가 직접 구매하는 건 더 좋을 테니.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허공에 대 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 다음 날부터 바뀐 처우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갖가지 일 감에서 즉시 해방된 것, 두 번째는 자유민이 된 것.
황제 소속의 노예도 처지가 이상 했지만, 황제 소속의 자유민은 더 처지가 이상했다. 원래 내가 존대를 했던 시녀들은, 내게 같이 반말을 하는 게 어떠냐고 슬그머니 권해 왔 다. 그리고 지나가다 마주친 하녀들 도 내게 하던 대로 반말을 해도 좋 을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중에서 내 일을 제 일같이 가 장 기뻐해 준 것은, 매일같이 함께 일하던 루아나였다. 루아나는 연회 장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 달라며 날
찾아왔다가 뒤늦게 소식을 접하곤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오늘부터 노예 탈출인 거야?”
“그렇게 됐나 봐.”
“와…… 난 이렇게 될 줄 알았 어.”
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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