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전 괜찮습니다. 제가 황태후 마 마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사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요.”
“무슨 제안이었지?”
이걸 대답하면 집안싸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힘내서 배려해 준다고 해도 어차피 이 집안은 이미 풍비박산인 것 같으니 입을 다물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황태후 마마의 사람이 되라고 하 셨습니다. 그러면…… 자유민이 되 게 해 주신다고.”
붉은 눈 사이의 미간이 확 좁아 졌다. 어지간히 짜증 나는 얼굴이었
다.
“그래서?”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 다.”
“왜지?”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다물었 다. 황제의 옆에서 노예살이하는 게 좋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고, 황제가 가엾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황태후는 내가 필요하다기보다 적당 한 놀림감이 필요한 것뿐일 테니까.
황제의 적안이 가늘게 좁아졌다.
“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 이 버릇이군.”
“제가 대답을 안 한 게 또 있습니 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중하기 짝이 없는 노크였지만 어 쩐지 다급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 어 났다.
“머리도 좋으니 직접 생각해 봐. 이따 자정에 내 방으로 와라.”
“등이 또 아프십니까?”
“오늘은 할 말이 있다. 지금 하기
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는 직접 문을 열었고, 문밖에는 궁내부 장관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 었다. 그 많은 사람을 데려다 놓았 는데, 황제는 자리에 없고, 세력을 넓히고 싶어 미쳐 있는 황태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오죽 속이 탔 겠는가.
황제는 왔을 때처럼 바람같이 사 라졌다.
나는 몸을 구부리고 인사를 하고 있다가 그가 사라진 다음에야 고개 를 들었다. 문득, 치료가 아니라 다
른 일로 둘이 만난 건 처음이지 않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개운해졌다.
그의 잘못도 아닌데, 그의 염려로 이렇게까지 속이 편해지는 것도 이 상한 일이지만 놀랍도록 개운해졌 다. 갑자기 기운도 퐁퐁 솟아나는 것 같았다.
이제 힘내서 다시 일을 해 볼까.
세수를 하고 다시 가벼운 화장을 했다. 그리고 와인이 묻은 옷을 벗 고 다시 말끔한 옷을 꺼내 입었다.
뺨은 세게 맞은 것치곤 그리 크게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늘의 임시 일터인 연회장으로 돌아갔을 땐, 다른 시녀들은 내가 돌아오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놀란 얼굴로 날 맞이했다.
연회장은 부드러운 음악과 아름다 운 조명, 그리고 시종장님의 완벽한 관리하에 아직 잘 돌아가고 있었다.
옆에 선 시녀는 황태후 마마와 폐하께서 한참 설전을 벌이는 통에 분위기가 굉장히 냉랭했다고 말했 다. 하지만 그 뒤로 폐하께서 갑자 기 사라진 후 어느 정도 분위기가 누그러져서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하하폐하갑자기 사라지 셨겠지. 정말 내게 괜찮냐고 그거 하나 물어보러 온 거였을까? 다른 볼일 있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그냥 가신 거겠지?
생각할수록 속이 간지러웠다.
몇몇 사람들은 날 알아봤는지 내 게 눈길을 주곤 했다. 시녀의 일이 라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이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해서 맡겨 주신 거니까 잘 해내고 싶었다.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카트를 밀고 다니자, 이내 따라붙던 시선들은 흩어졌다. 사라 진 내 몫까지 커버해야 해서 분주했
을 시녀들도 좀 여유를 찾은 눈치였 다.
밤이 깊어 갈 때쯤, 황태후 마마 의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황태후는 내가 상냥하기 짝이 없게 생글생글 웃어 주자 감동했는지 어이없는 웃 음을 지었다.
내가 가진 건 없지만 꼬리를 말 고 도망가진 않을 거다. 가진 건 지 위밖에 없는 사람에게 질쏘냐.
시종장님은 바쁘게 종종거리며 지 나다녔고, 내 옆을 지나가다가 또 눈이 마주쳤다. 난 이번에야말로 혼 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바삐 지나 가면서 말없이 사탕을 쥐여 주었다.
지나가는 시녀마다 내 걱정을 해 주었지만, 일하는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난 다른 생각에 몰두하느라 우울해할 새도 없었다.
내가 황제의 어떤 질문에 대답을 안 했더라?
겨우 그 대답을 떠올렸을 때는, 카트를 정리하다가 더워서 팔을 걷 어붙이는 순간이었다. 내 팔뚝에 새 겨진 마법진이 흘끗 보일 때, 마침 내 그의 질문을 떠올렸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연회는 쉬이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정에 가 까워져서야 현장에 있던 시녀들은 교대하고 쉬러 갔고, 나도 방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피곤했지만 또 늦었다고 보챌까 봐 걱정되어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황제의 방으로 갔다.
황제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에 손님이 있을 때 간 건 또 처음이라, 난 놀라서 얼른 예를 차렸다.
패왕은 날 흘끗 보더니 제 손님 을 향해 말했다.
“이제 꺼져.”
나조차 들어 본 적 없는 험악한 언사에 속으로 놀랐지만, 그 손님은 익숙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일 어 섰다.
“아무튼, 신분 상승이 가능한 건 다양할 수가 있으니까. 앞으로 또 상담해. 내가 또 한 큐피드 하지.”
황제는 이를 갈 듯이 하며 그 남 자를 노려봤다.
“헛소리. 안 꺼져?”
“어련히 알아서 꺼질게.”
무슨 대화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는
나를 흘끗 쳐다보고 윙크하더니 나 가 버렸다.
그 남자가 스쳐 지나갈 때 신분 을 나타내는 배지를 놓치지 않고 보 았다. 티아헤브 공작가의 사람이다. 분명 교육을 받을 때, 황제의 친우 분이시라고 들었다.
모처럼 친구분과 계셨다면 방해하 지 말라고 말해 두셨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내가 좀 더 앞에서 대기하다 들어왔을 텐데. 이렇게 쫓아내듯 한 상황이 되자 마음이 불편했다.
황제는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붙 이고 앉아 날 바라봤다. 난 자리에 서 일어나긴 했지만, 늘 그의 곁에
있을 땐 침대 위였기 때문에, 이렇 게 평범한 테이블이 있는 방에서는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도 감이 오 지 않았다.
“이리 와서 앉지.”
“제가 어찌 감히……,”
“내가 권유형으로 말했던가? 앉 아.”
앉으라시면 앉아야죠. 제가 힘이 있겠습니까.
황제의 맞은편 의자에 앉다니, 정 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궁둥이를 불편 하게 붙이고 앉았다. 따지고 보면
침대 옆에 앉나,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나 똑같이 보이겠지만, 그쪽은 일 이고 이쪽은 아니니까.
늘 잘생겼지만 오늘따라 잘 차려 입어 더 잘생긴 그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권력자라 그런지 사람을 참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원래 짐승도 힘이 없는 개체들은 시선을 피한다 고, 불법 사냥을 즐겨 하던 옆집 가 게 할아범이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자꾸 내 목을 보는 것 같아 서 난 슬쩍 목을 만졌다. 흰 스카프 를 다시 잘 감았는데 왜, 이상한가?
패왕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말했다.
“봐서 알겠지만, 그런 자가 황태 후다.”
와, 난 아무리 화가 나도 입 밖으 로는 욕을 못 하겠던데. 과연 황제 라 막 할 수 있구나.
“하하…… 그렇군요.”
“내가 애써 병을 숨기려고 하는 것은, 무덤에 들어가도 썩지 않을 미치광이 같은 장로 놈들과 황태후 때문이다.”
다짜고짜 지금껏 말해 준 적 없 는 사정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황 제가 한숨을 쉬었다.
“뭐, 설명해 봐야 소용없겠지. 국 가 제도 자체가 다르니까, 네가 살 던 나라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잖아?
진짜 어이없다. 항상 제 판단이 먼저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배 우면 저도 다 알 수 있는 건데, 제 가 모르는 게 무슨 죄라는 것처럼.”
황제는 이렇게 내가 툴툴거리는 걸 잘 받아 주는 편이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내를 덜 감추게 되었
다. 그리고 지금도 또 투덜거리고 말았다. 여전히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해서 내 목을 다시 한번 만지는 데, 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 를 기울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네게 많 은 걸 설명하고 싶다면, 내가 널 가 르쳐야 하는 거군. 여러 가지로 귀 찮은 일이지만 뭐든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그나마 머리 하나는 쓸 만하니 그리 더디 걸리진 않겠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 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황태후의 말에도 일리는 있겠 지. 널 노예로 계속 두고 네가 일을 하게 둔다고 해서 네가 눈에 덜 띌 거라는 생각은 내 오산이었다. 솔직 히 말해서, 이 정도로 빨리 주목을 끌 줄은 몰랐으니까.”
“……네?”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고 말했 지?”
“네‘?”
“보내 주지. 가라. 노예 신분도 이제 딱히 필요 없겠지. 자유민이 다.”
그렇게 한마디로 내가 막 자유민
이 된다고? 생각해 보면 저 황제의 한마디면 나라 하나도 없어질 판인 데, 노예가 자유민이 못 될 것도 없 긴 하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기 쁨도 안 느껴졌다. 갑자기 왜?
황제는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대신, 함부로 달아나면 상상도 못 할 빚을 지워 주지.”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셔
“무슨 말도 안 되는 겸양을 이유 로 거절하는 건 필요 없다. 예절 같 은 건 진절머리가 나니까. 대신 제
대로 배워서 쓸 만한 인재가 돼라.”
인재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정말 아카데미에 보내 주겠다는 거다. 게 다가 자유민의 신분으로. 노예는 아 카데미에 갈 수 없으니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 까?”
“네가 편하다.”
“ 네?”
“곁에서 모신다는 놈들에게까지 이런저런 걸 감추는 것도 짜증이 난 다. 얼른 졸업해서 비서로 일해라. 봉급은 섭섭지 않게 주지.”
비서라니……?
비서라는 직업은 골디나에는 없었 지만, 여기 제국에는 있었다. 지금 황제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것은 자 크 백작인데, 그분이 워낙 연세가 많아 언제 은퇴할지 모른다는 이야 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궁정 내에서 대소사를 담당하는 궁내부 장관과는 달리, 패왕 개인을 돌보고 일을 돕는 사람이다.
상처를 숨기기 위해 늘 긴팔 옷 을 입는 그다. 하지만 비서에겐 말 했을 줄 알았다. 설마 자크 백작님 께도 말을 안 했을 줄은 몰랐다.
황제의 궁내 입지가 확고하다고
생각한 건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그 렇게까지 많은 걸 신경 쓰면서 피곤 해서 어떻게 살아? 진짜 말도 안 되게 힘겹게 산다. 내 인생도 내 인 생이지만, 이 황제도 만만찮게 피곤 한 인생이다.
패왕의 비서를 내가 감히? 하지 만 그가 나를 편히 여긴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 싫은가?”
난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게 아니다. 싫은 건 아닌데……오
황태후가 말했던 파격적인 제안과 이 파격적인 제안 사이에는 큰 차이
가 있었다. 황태후가 제안한 것은, 틀림없이 받아들이는 게 더 좋은데 도 도저히 내키지 않았는데…… 지 금의 제안은 내가 할 수 있을까 생 각될 정도로 과분한 일이어서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분은 차차 조정해 주지. 봉급 이 있거나 과한 신분은 아니니 너무 기대할 필요는 없다.”
“정말 제가 그래도 괜찮을까요? 신분의 조정이라는 게…… 그렇게 막 해도 되는 일도 아니고…… 다른 분들의 시선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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