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난 냉큼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 다.
“네가 그거군. 요즘 우리 아들이 가까이한다는 노예.”
가까이하는 노예라니……오 빨래터 에서 하녀들과 수다 떨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설마 황태후 마마께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와인을 대접해 드리라 하셔서 왔 습니다.”
“정말 우습군. 우스워. 이제는 노 예를 사다니. 어떤가, 내 아들이 잘 해 주는가?”
고개를 들어야 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고, 대답해야 예인지 하 지 않아야 예인지도 알 수가 없어,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소중히 여기는 게 없는 앤데, 심지어 사람을 데려왔다. 내가 제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을 막기 위 해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게 답 이라고 여기는 무서운 놈이…… 제 방에 자꾸 들이는 여자가 있다.”
루아나가 해 준 이야기대로 이 황태후 마마와 폐하의 사이는 실로 안 좋은 모양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황제와 내 사이
가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 저 치료 서비스가 사람 모양일 뿐인 데.
그보다 이 황성에 머물고 있지 않은 황태후 마마까지 그런 이야기 를 하다니. 무슨 소문이 어디까지 어떻게 돌고 있는 걸까. 그냥 하녀 들한테야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지 만, 황태후 마마를 상대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오랜만에 생긴 장난감이라니…… 나로서도 재밌는 이야기군.”
듣고 있자니 찌릿찌릿한 악의가 느껴졌다. 무슨 사달이라도 나는 건 아닐까. 오는 길에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고작 나 같은 사람을 저렇게 진 지하게 상대하고 있는 걸 보면, 황 태후는 어떻게 해서든 황제에게 타 격을 주고 싶어 근질근질해 하는 것 같은데.
“이름이 뭐지?”
“셀레스티아입니다.”
“그렇군. 그대는 어디서 왔지?”
“골디나입니다.”
“목소리가 예쁘군. 지금 당장 내 사람이 되겠다고 말해라. 내가 널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마.”
위엄 있는 목소리가 당연히 그리 될 것이라는 듯 말했다.
황태후의 사람이 되라고? 그러면 자유민으로 만들어 준다고? 나는 너 무 파격적인 제안에 간이 다 떨렸 다. 진짜 내 삶의 향방은 알 수가 없다.
솔깃한 제안일지도 모른다. 솔직 히 노예에게 그보다 더 달콤한 제안 이 어딨으랴.
빚을 져서 노예가 되거나, 형벌을 받아서 노예가 된 자들은 기한이라 도 정해져 있지만, 나는 그런 것도 아니다. 세렉 미친놈이 아예 내 신
원을 인도해 버린 거니까. 그 나라 에서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인 나는 그냥 팔려 온 거다.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 면 평생 노예 신분으로 살아야 할지 도 모른다.
뒷골목에서 살아오는 동안 쌓은 풍부한 인생 경험이 내게 말했다. 이 제안, 너무 부담스러워서 받아들 였다간 살아남기 어려울지도 모른 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것이라고.
“어허, 대답이 늦다. 어서 내게 황제의 은밀한 약점 한두 개만 슬쩍 말해 준다면, 내가 네게 꽤 괜찮은
신랑감도 점지해 주마.” 황태후가 재촉했다.
한다고 해야지. 한다고 해야 하는 데……느
눈앞에 끙끙거리며 엎드려 있는 멍청한 황제의 등이 아른거렸다. 머 지않아 또 그 꼴이 되어서 나타날 게 뻔한데…… 내가 없으면 황제는 곤란을 겪을 테다. 이렇게 무력한 나라도 황제에게 소용이 있다면 그 를 돕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평범한 몰락 귀족 가문에 시집가는 삶 따위 별로 동경 해 본 적도 없었다.
내 본능도, 내 이성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외쳤지만, 난 결국 거 절했다.
“송구하오나, 저는 그리할 수 없 습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이 대사 하나만은 모자지간에 똑 같군.
난 쓰게 웃으며 자리에 납작 엎 드렸다.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일어나 보아라. 셀레스티아라고 했나?”
“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황태후는 나 를 그녀의 바로 앞까지 불러 세웠 다.
짝! 눈앞에 불이 번쩍하도록 고개 가 돌아갔다. 짝! 또 한 번 그녀의 시종이 내 뺨을 후려쳤다. 나는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으로 넘어 졌다. 머리 위로 내가 가지고 온 와 인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목에 두른 긴 스카프가 온통 와인색으로 물들고, 바닥을 짚고 있는 손까지 와인이 흘러내렸다.
황태후는 그저 귀찮은 벌레 보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비틀 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시 말해 보아라.”
“송구하오나……,”
나는 다시 뺨을 얻어맞고 바닥으 로 엎어졌다. 그냥 맞는 것보다 모 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모 멸감이 느껴졌다.
쾅!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면서 연 회장의 한쪽에 있는 문이 벌컥 열렸 다.
저렇게 거대하고 무거운 문이 저 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냥 밀기도 힘들던데.
황제는 느린 걸음이지만 명백한
분노가 담긴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를 먼저 바라보고 황태후를 바라봤다.
“뭘 하신 겁니까?”
황태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 기가 막혀서. 지금 내가 노예를 데려다가 얘기를 좀 했기로 서니, 나를 나무라는 거냐? 이 나 를?”
“그래서 뭘 하신 겁니까?”
“내가 해 봤자 뭘 했겠어. 그냥 주제를 좀 알게 해 줬지.”
“오늘은 유홍을 다 즐기셨으면 그 만 돌아가 주십시오.”
패왕은 손목을 붙들어 날 일으켜 세웠다. 나한테 화가 난 건가? 그 적안이 나를 쏘아보았다.
“가란다고 가고, 오란다고 오나?”
“ 폐하……
“꼴이 말이 아니다. 방으로 돌아 가.”
“……알겠습니다.”
그는 가라고 해 놓고 오래도록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나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멍청하게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내 이마를 닦 아 주곤 내 손목을 겨우 놓아주었
다.
황제와 황태후로부터 몸을 돌리고 서야,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급한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황태후 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간 아무리 긁어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정말로 화를 내는 건 아 니지? 저건 노예잖아?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줘야지. 안 그래?”
3, 그녀가 아카데미에 간 이유
방으로 돌아가는 중에 시종장님을 마주쳤다. 시종장님은 연신 웃으며 눈앞에 있는 더마 국의 장로에게 기 침 완화제를 권하고 있다가 나와 눈 이 마주쳤다.
오늘은 실수라곤 없어야 하는 날 인데, 연회장에서 시녀 대용으로 고 용한 노예가 울고 나오니 시종장님 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눈으로만 무슨 일이냐고 물어 오는 그에게 딱 히 뭐라 해 줄 말도 없었다. 그냥
고개만 까딱하고 인사를 했다.
본디 시녀란,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그림자처럼 눈에 띄지 않기 마 련이라 달리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대한 다른 사람 눈에 띄 지 않게 신경 쓰며 내 방으로 바삐 돌아갔다. 질책은 나중에 한꺼번에 받아야겠다. 와인에 젖은 꼴을 하고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방에 돌아와서 거울을 보니 눈이 토끼처럼 빨갰다. 우울해 보이는 내 얼굴과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너 무 한심한 몰골이 웃겨서 웃음이 터 졌다. 뒷골목에서 같이 지내던 사람 들이 지금 날 봐야 하는데. 고작 그
런 일로 우냐고 다들 얼마나 배를 잡고 웃어 줄까.
셀레스티아, 성질 다 죽었네. 고 작 뺨 맞았다고 울고.
솔직히 내가 운 건 슬퍼서가 아 니라 너무 억울해서다. 나도 손이 있는데, 그 시종이나 황태후의 뺨을 마주 때려 줄 수 없는 게 억울해서.
원래 나는 내 잘못을 잘 인정하 는 편이 아니다. 뭐든 내 탓을 하기 보다는 남 탓을 하며 살아야 사람이 잘 산다.
아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황태후 는 또라이다. 제 사정이 뭐든, 제
아들 사정이 어떻게 됐든, 어떻게 이렇게까지 신분 격차가 있는 아랫 사람을 괴롭히냐고! 귀족에겐 권리 도 있지만 그만큼 베풀 의무도 있는 거 아니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날 건드린 다고 해서 황제가 눈썹이나 까딱하 겠는가.
물론, 지금이야…… 황제에게 내 존재가 좀 필요한 상황이긴 하다 만……, 그리고 그 알약이 안 듣는 체질이 어떻게 개선되지 않으면 평 생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긴 하지 만……,
그런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던데 어떻게 날 황제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오해해서, 고작 가엾은 노예를 그렇게 불러다 괴롭힌단 말 인가.
으, 화딱지 나!
난 애꿎은 베개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주먹을 몇 번 내지르니 그나 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 다가 조금 신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붕붕 휘두르며 속으로 황태후 욕을 실컷 하고 나니 개운해졌다.
아오, 황태후. 가다가 와인 날벼 락이나 맞아라!
마음이 좀 차분해지자 이제 슬슬
다시 내려가 봐야 되나,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막 베개를 내려놓으려는 데 계속 휘둘러 대던 바람에 아차, 하는 사이에 베개가 손에서 벗어나 날아갔다.
“……기운이 넘치는군.”
누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오 늘따라 빼어나게 멋진 차림의 황제 가 내 초라한 방에 서 있었다. 문까 지 잘 닫은 상태다. 심지어 내가 던 진 베개는 황제를 시해하려고 한 무 기가 되어 황제의 손안에 잡혀 있었 다.
미친, 난 이제 정말 당장 목이 잘
려도 할 말이 없다. 어떻게 하지? 엎드려서 빌까?
대체 언제 온 거야? 어디서부터 본 거야?
“노크 소리, 못 들은 것 같은데 놀라게 했군.”
“괘,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 안 괜찮다. 너무 창 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 다.
황제는 방 안을 휙휙 둘러보곤 여느 때와 같이 방 안에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태연하게 차지하고 앉 았다.
아니, 지금? 지금 나랑 얘기하자 고? 연회…… 연회는 어떻게 하고 여길 은 거야? 지금 황제를 보겠다 고 전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몰 려든 인파가 저 연회장에 득실득실 한데, 여기 있어도 괜찮나?
그 와중에 내가 연회장 분위기를 다 망쳐 놓은 것을 혼내러 온 건 아니겠지? 내치려고? 자르려고? 내 동생까지 죽이려고?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사라졌 다.
황제는 그의 키와 몸에 비교해 초라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도 위
엄이 넘쳤다. 고개를 비딱하게 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곤 손을 뻗어 내 목에 묶인 흰 스카프 끝자락을 만졌다. 흘끗 바라 보니 그의 손에 쥐어진 부분의 옷감 은 온통 와인색으로 더러워져 있었 다.
그는 시선을 들고 내게 물었다.
“좀 괜찮나?”
“제 동생은 죄가 없습니다……, 네‘?”
“좀 괜찮냐고 물었다.”
“……네?”
“귀가 안 좋나?”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내 안부나 걱정하고 있으니 내가 놀라, 안 놀 라?!
“……아니요. 좋은데요.”
“내 동생과 황태후가 무례를 범했 더군.”
동생? 아, 그 웃는 얼굴의 흑발의 남자가 설마……소
그러고 보니 너무 웃는 인상이라 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닮은 듯도 하다.
전혀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흑발 자체는 보기 드문데 왜 생각지도 못 했을까?
난 그가 날 한참 빤히 보고 있단 걸 알자, 내 눈이 아직 붉어져 있을 게 새삼 좀 창피했다.
#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