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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10화 (10/103)

— 10화

황제는 대체로 생각 없이 말하길 즐기는 게 틀림없었지만, 한다고 하 면 또 하는 성격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라도 일단 황급히 거절부터 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더 빨리 움직 이겠습니다.”

“그래, 앞으론 부르자마자 나타났 으면 좋겠군.”

“네네, 알아 모십지요.”

으, 짜증 나. 으!

하여튼 신분이 원수지. 저렇게 떠 들면서도 서류를 읽을 수 있단 말인

가.

난 얄미워 죽겠는 그의 등을 매 만졌다. 이젠 울긋불긋한 자국들도 꽤 많이 정리되었고, 그도 더 이상 내가 만지는 것만으로 신음을 흘리 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사나흘 손보지 않으면 또 덧나긴 하겠지만, 당장은 그리 고통스럽거나 하진 않 으리라.

연회에 내가 일손을 거들러 간다 는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지만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항시 부를 때 오기만 하면 그 이외의 시간에 내가 뭘 하 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대신 그의 상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자, 나는 황 급히 이 나라의 정세에 대해 속성 과외를 받을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 지는 황성 내의 식구들과 빨래하고 요리하면서 그저 노예처럼 살다가, 가끔 가서 황제를 치료해 주는 평범 한(?) 루틴을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일련 의 거대한 이벤트가 추가된다면 이

야기가 다르다.

게다가 얼떨결에 제국이 ‘우리나 라’가 된 입장인 내게는, 얼마든지 타인에게 실수할 여지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만약 어쩌다 큰 실수 라도 하나 해 보라지. 그러면 난 다 시는 내 귀여운 동생을 만나지 못할 거다. 죽어서나 만나겠지. 엉엉.

요즘은 어째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내가 찾은 적당한 속성 과외 선 생님은 빨래터에서 종종 마주치곤 하는 동갑내기 하녀 루아나였다.

난 일단 내가 얼마나 절박한 상

황에 처해 있는지를 설명하고, 제국 의 사정에 얼마나 무지한지도 설명 했다.

루아나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기 꺼이 협력해 주었다. 그녀는 연회장 에 들어갈 수 없는지라, 내게 그곳 의 광경을 꼭 설명해 줄 것을 당부 하기도 했다.

그녀는 두서없이 설명하는 편이긴 했지만, 제국의 사정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이해한 제국의 사정은 요약 하자면 이렇다.

황태후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는

데, 그중 지금의 황제가 배다른 아 들이자 지금은 돌아가신 정비의 아 들이라는 것. 황태후는 원래는 후궁 이었는데 지금은 황태후가 되었다는 것. 황태후는 제 아들이 황위를 잇 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풍문 이 있다는 것.

여하간에 별로 좋은 가정사는 아 니었다. 이제야 왜 황태후가 황궁에 기거하지 않는지 좀 알 것 같았다. 아무튼, 대충 황제가 집안 식구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무지렁이인 나로선 연회가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아직 잘 모르겠 지만, 아무튼 이 연회의 준비를 위 해 참 많은 사람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시녀들은 혼이 빠져서 뛰어다니는 날 보며 연회 때보다 연회 시작 전 이 더 바쁘다며 달랬다. 정말 그렇 다면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보다 더 바쁘다면 쓰러져 버릴 거다. 우리뿐 만 아니라 의상부장님이나 시종장님 도 내내 고함을 치며 황급한 걸음걸 이로 다녔다.

결국, 그 정신 없는 준비가 끝나 고, 완벽하게 단장된 정원과 완벽하

게 가꿔진 연회장이 만들어졌다. 궁 내부 장관님과 집사장님께서 머리를 맞대고 장장 2주 동안 고안한 완벽 한 자리 배치도도 드디어 확정되었 다.

연회 날 아침.

옷을 정갈하게 단장하고 연회장을 점검하느라 바삐 돌아다니고 있는 데, 황제가 연회장으로 왔다. 그는 궁내부 장관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 더니 내 옆을 지나가며 말을 걸었 다. 그는 답지 않게 좀 놀란 얼굴이

었다.

“오늘, 연회에 너도 참석하나?”

“네, 저도 일을 돕게 됐어요.”

황제의 적안이 나를 한참 쳐다봤 다.

“유달리 예쁘군.”

“그런 말, 잘하시네요.”

난 내가 입은 옷을 내려다봤다. 그냥 평범한 시녀 복장이었다. 평소 와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에 흰 천 장식을 하고, 목에도 흰 스카프를 해서 시녀라는 것을 표시한 것 정 도. 그냥 시녀들이 입는 까만 원피 스다.

그에 비해 그는 보는 사람이 절 로 감탄할 만한 대단히 멋지고 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머리가 검정 이라 그런지 칙칙한 검은색 정장이 대단히 잘 어울렸다.

“연회에서는 웬만하면 사람들하고 말을 섞지 말도록.”

“……제가 누구랑 말하겠어요.”

뭔가 불편해 보이던 황제가 작게 웃었다.

“그건 그렇군.”

그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볼일은 그게 전부였는지 궁내부 장관과 이 야기하며 어디론가 가 버렸다.

고작 그 한마디 하려고 나한테 왔나? 설마하니 칭찬 쪽이 본 용무 는 아닐 거 아냐.

내가 말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조금만 덜 바빴더라면 난 그 화 두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봤을지 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연회장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정말 각국의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 은 다 와 있는 모양이다. 나는 머릿 속으로 참석자 리스트를 몇 번이고 되짚어 보며 연회장을 바삐 돌아다

녔다.

리비아 국의 사신은 날것을 못 먹는다. 푸가 국의 공주는 거위 요 리를 좋아한다. 더마 국의 장로는 먼지 알레르기가 있다.

거의 이쯤 되면 퀴즈를 푸는 거 아닌가. 나는 다른 시녀와 시종들이 제 일을 잘해 내는 것을 보면서, 모 자란 부분을 간혹 보충해 주는 역할 을 맡았다.

다른 것도 힘들었지만 내내 웃는 표정으로 다니느라 볼이 다 아플 지 경 이 었다.

시간이 좀 나서 겨우 멈춰 선 나

는 음료 카트에 기대어 잠깐 쉬었 다.

연회라는 것은 어마어마했다. 당 연히 눈이 돌아가게 화려할 거라곤 했지만, 상상과 현실 사이에는 정말 로 큰 갭이 있었다.

이렇게 듣기 좋은 음악이 있다 고? 난 어릴 때부터 쓰레기통을 뒤 집어 놓고 두들기는 아저씨와 줄이 두 개밖에 없는 바이올린을 연주하 는 아줌마의 음악을 매일같이 듣고 자랐다. 그리고 그 음악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너무 달라서 좀 허탈할 정 도다.

음악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옷차 림이나 머리 장식 같은 것만 보아도 확 티가 났다. 나는 소매치기에게 배운 강습을 통해 비싼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진짜 보석과 가짜 보석을 잘 구분할 수 있었다. 그 귀족들이 걸친 물건, 보석들은 모두 진짜였다. 진짜일 뿐만 아니라 정말로 내가 평 생을 일한다 해도 한 번 만져 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기라도 하듯 값비싼 옷감을 아낌없이 사용한 풍 성한 드레스와 값비싼 보석을 장식 하고 나타난 걸 보니 - 별로 박탈 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 역시 신

분이 다르긴 다르다는 걸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할 때마다 새로운 인물이 소개되었고, 연회의 시작을 알릴 때쯤 황태후와 황제가 등장했다. 황제의 남동생도 온다고 들었는데,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 는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봐도 위품이 넘치는 황태 후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황제는 가장 먼저 댄스 플로어에 나 섰다.

검은 정장에 보라색 띠를 두르고 한껏 멋을 부린 그는, 저와 꽤 체격 이 차이 나는 어떤 아가씨와 함께

가벼운 춤을 췄다. 둘 다 춤 같은 건 아주 익숙한지 능숙하게 몸을 움 직였다. 둘은 정말 잘 어울려 보였 다.

뭐야, 여자 안 좋아한다더니 잘만 놀잖아. 애인인가?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너무 확신 있는 어조로 모두가 황제 에게는 여자가 없다느니, 애인이 없 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해 대는 것만 듣다 보니, 정말 없을 거라고 생각 했나 보다. 너무 의외의 광경에 자 꾸 눈이 갔다.

저 사람은 고작 노예인 내가 시 녀복을 좀 더 정갈한 거로 걸치고

머리와 얼굴을 좀 꾸몄다고 해서, 그걸 알아봐 주는 기묘하게 자상한 황제다. 틀림없이 제 애인에게는 훨 씬 더 달콤하고 꿀을 바른 소리를 잘도 하겠지.

황제가 뭐라고 중얼거릴 때마다 그와 함께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있 는 여자는 쉴새 없이 하하호호 웃어 댔다.

이럴 때 일거리가 없을 건 또 뭐 람.

패왕이 승전보를 알리며 돌아왔을 때 느꼈던 그 어마어마한 거리감이 다시 느껴졌다. 당연한 거리감인데 느낄 때마다 새로이 낯설다. 그게

다 저 황제가 밤낮없이 사람을 불러 대니까 그렇다.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정 확히 내 쪽을 향해 오는 발걸음에 난 몸을 곧추세우고 미소를 지어 보 였다.

그 사람은 흑발에 녹안. 사람을 녹일 듯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남자 였다. 기본 장착 얼굴이 웃는 상인 사람은 흔치 않은데, 서비스직에 종 사하나? 저렇게 환하게 웃는데 어쩐 지 기분이 나쁜 구석이 있었다. 처 음 보는 사람에게 선입견을 품는 건 나쁜 일이지만……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옷감

이 고급스럽다. 아마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비싼 축에 들 것 같은 수제인 게 틀림없는 옷감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처음 보는 게 틀림없었지 만 내게는 총명한 두뇌가 있었다. 가슴팍에 달린 배지를 보면 틀림없 이 알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에겐 배지가 없었다. 누 구지?

당황한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남자는 웃으면서 내 앞에 있는 음료 카트를 가리켰다.

“와인 한 잔만 배달해 줘.”

“네. 어느 쪽 말씀입니까?”

“첫 번째 테이블.”

거긴 황태후가 끼어 있는 테이블 인데. 그 테이블은 서빙하는 사람이 달리 있었다. 시종장님께서 직접 하 겠다고 말씀한 부분이기도 하고, 집 안 사정을 듣고 나니 황태후 마마에 게 가까이 가는 일이 솔직히 그렇게 내키지 않았다.

“뭐 해, 안 움직이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귀족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나는 어 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다가 시종장님을 마주치길 바라 는 수밖에.

“나도 같이 가 주지.”

“……감사합니다.”

아니, 그 요행도 바랄 수 없나 보 다. 그 남자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 지 계속 웃으며 내 옆을 따라 걸었 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남자 를 보는 족족 고개까지 숙여 가며 인사를 했다.

귀족이 인사할 만한 신분이라는 거다. 그러면 나는 죽은 듯이 시키 는 대로 할 수밖에. 분명, 인사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은 모

조리 외웠는데, 이 사람은 누구지?

천천히 걸으려고 노력은 해 봤지 만, 가는 길에 시종장님을 만난다는 천하의 요행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 았다. 그러다 어느덧 순조롭게 카트 를 끌고 첫 번째 테이블에 도착해 버렸다.

거기에는 내가 본 중 가장 위엄 을 과시하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무거운 머리 장식을 하고도 아무렇 지도 않다는 얼굴로 날 쏘아보고 있 는 그 여인은, 온몸에 황제 가문의 것인 게 틀림없는 보라색 천을 휘감 고 있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은 발을 넘어 바닥에 끌리는 길이였다.

어찌나 위엄이 넘치는지 그분 주 위는 온통 고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저분이 황태후. 바라지도 않는데 스케일이 큰 사람만 만나네.

#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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