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황제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가고 싶으면 보내 주는 건 어려 울 것 없다.”
난 깜짝 놀라 그를 봤다.
사람이 아프면 너그러워지는 법일 까? 그는 분명 필요한 만큼의 가치 를 지닌 것을 교환하는 계산적인 자 였다. 아니면 내가 그만한 가치 있 는 일을 했다고 느끼나?
“아카데 미에요?”
“어려울 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궁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머리가 좋다는 소문이 돌더 군. 그렇게 기댈 곳 없이 들어와서
박한 평가를 하는 시종장에게까지 좋은 소리를 듣고 있는 걸 보면 믿 을 만한 머리인 것 같더군.”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오
“지금 아카데미에 보내 준다고 그 렇게 좋아하는 건가?”
재밌다는 웃음도 밉게 보이지 않 았다.
“원래 박탈당한 삶을 살던 사람에 겐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도 귀한 법이라고요. 하지만…… 됐어 요. 지금의 저는 일하는 것과 동생 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제겐 이렇게 거대한 과제도 있고 요.”
“내 얘기군.”
“아시면 적당히 좀 하고 다니세 요. 아니면 정말 죽는다고요.”
황제는 이야기가 길어져서 내 손 이 움직이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 켰다.
서 있는 그와 나는 신장 차이가 꽤 난다. 하지만 이렇게 침대에 앉 아 있으니 얼굴이 너무 가깝다.
그는 그답지 않게 고뇌하는 얼굴 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
을 열었다.
“저번에 널 안고 자는 걸로 뭔가 나아지냐고 물었는데, 그때 네가 대 답을 했던가? 안 했던 것 같은데.”
칫, 기억력이 좋기는.
“한 번만 네 팔을 만져 봐도 괜찮 나? 아까부터 널 만지면 이 고통이 사그라들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군. 접촉이 매개라고 했으니까.”
어쩐지 아까부터 말이 많다 싶더 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난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라 어버버하다가 거절할 수도 없어 고 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팔을 감싸 쥐었다. 손아 귀가 어찌나 큰지 내 팔뚝을 다 감 을 것 같았다. 그의 뜨거운 손바닥 이 천천히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아차, 이래서야…… 정말 날 안고 자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베개가 되 는 삶은 달갑지 않다.
“효과가 전혀 없진 않은 것 같은 데, 착각인가?”
“……하지만 제 의지가 개입된 쪽 이 빠릅니다.”
그는 내가 내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내 말을 믿었는 지 팔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러곤
아까까진 뭔가 계속 말을 할 의지가 있어 보였는데, 갑자기 엎드려 고개 를 묻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난 눈물을 꼼꼼히 훔치고는 다시 그의 등의 부효과 해체 작업에 몰두 했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문득, 그 가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네?”
“앞으로는 내가 필요로 할 때, 다 른 곳에 있지 마라.”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린 황제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잠에 빠져 들었다.
창피하게 황제의 방에서 운 뒤로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에 나는 고작 며칠만 빼먹 고 매일같이 황제의 침상에서 그를 돌봤다. 황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를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방에 같이 들이는 일은 없었 다. 우리는 늘 단둘이서 대면했다.
처음엔 황제가 너무 처참한 상태 였기 때문에 황제를 치료하는 데에 만 애를 쓰느라 주변의 시선은 생각
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차즘 주위 에서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의식 하게 되었다.
특히 오늘은 꽤 오래 추궁을 당 했다.
여전히 소속이 불분명한 황제 직 속 노예인 나는, 오늘은 궁내에서 쓰는 베갯잇들과 흰 빨랫감들을 모 아다 빠는 일에 차출되었다. 궁 안 의 사람 수가 많다 보니 빨랫감의 수도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며칠 뒤에는 무슨 연회가 있다나. 준비해 야 하는 손님방에 들어갈 수건이나 연회에 쓸 테이블보 같은 것들도 죄 다 새로 빨아야 했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듬잇방망이 로 두드리는 것 같은 제일 힘든 일 은 남자 하인들이 했고, 여자 하인 들은 푹 삶아진 빨랫감을 발로 밟아 묵은 때를 뺐다.
나는 그녀들과 같이 거대한 대야 위에서 철퍽거리며 신명 나게 발을 놀렸다. 삶은 빨랫감에서 때가 빠져 나오는 게 눈에 보이자 보람도 있었 다.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같이 빨 래를 밟던 하녀들은 내가 훙얼거리 는 노래에 같이 발을 맞췄다.
일을 흥겹게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 해도 해도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점점 다리가 아파 왔고, 결
국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옥이 있다면 황성의 빨래터가 아닐까요?”
“셀레스티아가 또 이상한 소리 해.”
하녀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 다.
“이렇게 좋은 일터가 또 어딨다고 그래. 봉급도 괜찮고, 이렇게 사람대 접도 해 주는데.”
“하지만 빨래가 이렇게 많잖아 요!”
“크크크, 그건 그렇지.”
여자 하인들이 한바탕 빨래를 해 치우고, 그것들을 남자 하인들이 끙 끙거리며 옮기는 사이에 나란히 앉 아 숨을 돌렸다.
그중 좀 짓궂고 나와 많이 친해 진 동갑내기 여자가 슬쩍 내 옆으로 붙어 앉았다. 그러더니 무슨 비밀스 러운 이야기를 하듯, 내 쪽으로 고 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루아나?”
“그래서, 황제님이 널 왜 매일 불 러들이시는 거야? 설마, 획기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 아냐?”
난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눈에
띄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정말 이 렇게까지 궁금해할 일인가. 이들의 궁금증을 좀 해소해 주겠답시고 사 실을 실토했다간 내 목도, 이들의 목도 사이좋게 날아갈 텐데.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다른 하녀들도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쫑 긋 세운 게 보였다.
근데 이 황제 방문 사건의 결정 적인 문제는, 달리 댈 만한 적당한 핑곗거리가 없다는 거다. 내가 대체 뭐라고 말을 하겠는가? 황제쯤 되는 사람이 나 같은 노예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그냥……소 하하.”
넘어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얼버 무려 보았지만, 역시 루아나는 조금 도 만족하지 않은 눈치였다.
“너도 알겠지만, 폐하께서 워낙 잘생기셨잖아.”
갑자기 칭찬 타임이야?
“폐하께서는 그 많은 귀족 영애들 의 구애도 마다하신 분인데, 왜 너 만 자꾸 찾으시는 거야? 무슨 비결 이라도 있어? 나도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곁에서 잠들고 싶다. 그 냥……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딱 잡고…… “루아나.” 하고 이름만 불러 주셔도 사르르 녹아 버릴 거
야.”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진 건 나 뿐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하녀들은 혀를 차면서도 루아나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이 사람들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가 무 스”
“그럼 뭔데?”
“……이런저런……;
“ 어?”
“그냥 잡일 하는 거지, 뭐! 네 말 대로 잘생기고 키도 크고 손도 크고
근육도 많고 카리스마도 있는 데다 인기도 많은 황제 폐하 곁에서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잡일 해, 잡일.”
“역시 그렇지? 그거 봐, 내가 그 럴 줄 알았다니까.”
루아나는 어떻게 이해해 줬지만, 그 옆에 있는 하녀들은 여전히 의심 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왜 너만 불러?”
“제가 일을 좀 잘합니까?”
“……그건 그렇지만, 네가 워낙 곱상하게 생겼어야 말이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노예 얼
굴이 네모나건 동그랗건 황제 폐하 께서 관심이나 있으시겠어요? 안 그 래요?”
어휴, 하여튼 이 사람들은 사람은 좋은데 일 안 하고 재밌는 가십거리 만 있으면 수다를 멈출 줄을 모른 다. 난 앞치마를 펄럭이며 벌떡 일 어났다. 빨리 이딴 화젯거리를 끝내 야지.
“어휴, 이렇게 느리게 해서 언제 일을 끝내겠어요! 일해요, 일! 일이 이렇게 많아서야, 원!”
하녀들은 뭔가 더 흥미로운 이야 기를 들을 것을 기대했는지 아쉬운 얼굴로 궁둥이를 들었다. 저 하이에
나 같은 사람들은 이 화제를 앞으로 도 백 번은 더 꺼낼 거다.
정말 힘들다, 힘들어.
그날, 방에서 쉬고 있는데 세레나 가 들어왔다.
처음에 내 교육을 맡았던 시녀 세레나는 그 뒤로도 종종 내게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날 지도해 주곤 했다. 난 익숙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세레나 님.”
“그래.”
“무슨 일 있으세요?”
세레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의자 에 앉았다. 나는 다른 의자가 없는 관계로 짚 침대에 궁둥이를 걸쳤다.
“너도 들어 알겠지만…… 이번에 폐하께서 도적을 소탕한 건과 관련 해서 큰 연회를 열게 되었단다.”
“아, 네. 들었어요.”
그래서 그놈의 테이블보를 산더미 처럼 빨았으니까 말이다.
“황태후 마마께서 직접 주최하시 는 연회이니만큼,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동원돼. 국내뿐만 아니 라 해외에서 사신들도 바글바글하게 몰려올 거야. 초청 명단만 해도 얼 마나 긴지 모른다고.”
황태후. 분명, 폐하께는 비가 없 기 때문에 황실에서 가장 높은 신분 의 여자는 그분이라고 들었던 기억 이 났다.
“제가 도와 드릴 일이라도 있을까 요?”
세레나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그날 시중드는 아이 중 하나가 갑자기 집에 우환이 있다
며 가 버리는 바람에
하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큰 연회인 데, 나 같은 게 서빙한다고 돌아다 녀도 괜찮은 걸까? 대체할 일손이라 면 달리 있을 텐데.
“저야…… 그래도 괜찮지만……-”
“너만 괜찮다면 꼭 부탁하고 싶어 서. 다른 날도 아니고 그날은 진짜 똘똘한 애들만 뽑아서 서빙을 시키 거든. 실수하면 큰일 나니까.”
“네.”
“좀 까다로운 손님들이 있는데, 갑자기 그런 것들을 애들한테 일일 이 교육한다고 해도 너만큼 잘 외울
지도 모르겠고.”
갑작스러운 연회 준비에 세레나도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어차피 황실에 묶인 몸인데 못 할 것도 없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덕분에 살았어. 잘 부탁해.”
세레나가 방긋 웃고 나갔다. 어쩐 지 오늘따라 그녀의 웃음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기분 탓일 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날은 황제님과 직접 마주칠 일 이 없었지만, 그다음 날은 황제의 몸을 돌봤다.
근래 들어 알게 된 사실은, 황제 는 침대에서도 일감을 놓지 않을 정 도로 일벌레라는 거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서류를 뒤적거리는 황제의 등에 붙어 있곤 했다.
오늘도 그 일과는 그리 다르지 않아서, 황제는 침대에 앉아 잘 정 리된 서류철을 뒤적거리면서 내 인 사를 받았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 괜찮다.”
붉은 눈이 나를 쓱 살폈다. 그는 언제나의 일과라는 듯 자연스레 윗 옷을 벗더니 다시 서류를 집었다. 내가 등 뒤로 다가가자 패왕이 중얼 거렸다.
“느리군.”
대체 얼마나 빨리 오라는 거야? 진짜 불만으로 가득한 황제다.
그렇다고 일하던 차림으로 달려올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도 명색 이 황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그렇게 까지 응급 상황도 아니고. 난 시종 이 부르러 오자마자 부랴부랴 챙겨 서 온 건데, 이런 반응이라니 빈정
이 상했다.
“……부르시자마자 바로 왔습니 다.”
“내 생각엔, 네 방을 내 바로 옆 방에 마련해 주는 게 좋을 것 같 아.”
“바로 옆방 말씀이세요?”
이 방에서 나가면 그 으리번쩍한 복도가 나온다. 복도에 경호병이 줄 줄이 늘어서 있는 그 복도를 끼고 바로 옆방이라니, 절대 사절이다. 게 다가 어느 노예가 황제의 옆방에서 지낸단 말인가.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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