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하지만…… 그래도 돼요?”
“응? 무슨 소린가? 패왕께서는 검도 그리 능통하신 분께서 마법도 잘 쓰시니, 이게 하늘의 축복이 아 니고 뭐겠는가? 나타나시는 것만으 로도 다들 벌벌 떨며 꼬리를 내리 고,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니까 말이야. 이번에도 한탕 하셨다지. 불 덩이를 펑, 하고 말이야. 그걸 직접 본 자들이 부러워 죽겠다니까.”
그 아저씨는 신이 나서 설명하다 가 다른 일행을 찾아서 휙 가 버렸 다.
전장에서 사기는 많은 것을 결정
하는 거겠지? 내가 나가 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세렉이 잘난 듯이 떠들어 대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멀 리까지 원정을 떠난다고? 아니, 그 보다 또 싸웠다고? 그 등짝을 하 고?
난 황제의 울긋불긋한 등짝을 보 고도 아까 그 아저씨가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을지 정말 궁 금했다. 황제도 그냥 한 명의 인간 에 불과한데, 그렇게까지 그에게 많 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니.
명령을 내리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타입인가? 아니면…… 소문 대로 그냥 학살을 좋아하나? 혹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입증할 필요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는 황제인데.
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소란스러 운 가운데, 저 멀리서부터 와— 하 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흰색 말, 갈색 말들 사이에서 딱 단 한 기의 눈에 띄는 흑마를 몰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워낙 건장하고 떡 벌어진 체격인 데 다 자세도 좋아서 멀리서도 확 튀었 다. 앞뒤, 양옆으로 무시무시하게 생 긴 무기를 든 남자들로부터 호위를 받고 있었지만, 조금도 기가 눌리지
않는 것이 대단했다.
누가 봐도 이 제국을 지배하는 남자다.
나는 꽤 뒤쪽에 서 있는 데다 앞 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손을 흔들 고 박수 치며 환호하고 있었기 때문 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행렬이 눈앞을 스쳐 지나갈 때 멍하 니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 다.
내가 감히 누굴 동정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허드렛일을 하며 그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막연히 궁금해하는 사 이에, 그는 제 백성을 위해 검을 휘
두르고 왔다.
조금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 그 얼굴에는 단호한 위엄과 기 개가 서려 있었다. 그 어깨에 이 제 국을 짊어지고도 살아갈 수 있는 패 왕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긴 소매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틀 림없이 그는 지금 정상이 아닐 거 다.
그 인파를 뚫고 돌아가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 황실 마
차가 아니었다면 해가 져도 도착하 지 못할 뻔했다.
마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려는 데, 시종이 나에게 다가왔다. 황제가 찾고 있다는 전언을 알려 왔다. 그 과시하는 행군을 본 뒤에 그를 보자 니 어쩐지 두려운 기분이 들었지만, 내게 무슨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 다.
내방도 꽤 훌륭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처음 가는 제국의 황제 가 기거하는 곳은 차원이 다르게 화 려했다. 그의 방으로 다가가는 길목 부터가 이미 화려한 태피스트리의 향연이었고, 복도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초상화가 아래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그 복도의 끝에 다다르 자, 한 번 본 적이 있는 호위병이 내 키의 두 배는 됨 직한 거대한 문을 열어 주었다.
황제의 방이자 침실은 정말 화려 함의 수준이 달랐다. 눈이 닿는 곳 마다 번쩍거리는 물건들이 놓여 있 었다. 미리 언질을 들은 대로 큰 방 을 지나가자 금사로 만들어진 캐노 피가 달려 있는 거대한 침대가 보였 다. 거기에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 폐하.”
세레나가 시킨 것을 기억해 내며
완벽한 법도에 맞추어 예를 올렸지 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대답이 있어야 내가 고개를 들든지 말든지 할 텐데.
나는 다시 한번 캐노피가 드리워 져 있는 침대 쪽을 향해 고개를 조 아리며 말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이리 가까이 오라.”
목소리가 안 좋다.
마법을 잘 쓰고 어쩌고 하는 행 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쟁쟁 울렸 다. 불덩이가 어쩌느니. 바보도 아니 고 그 꼴을 하고 가서 마법을 또
썼으니 당연히 몸 상태가 안 좋겠 지.
난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 었지만, 그 기분을 떨쳐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제가 시키는 대로 캐노 피를 걷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제는 낯이 창백해진 채로 이불 위에 단정치 못하게 엎드려 있었다. 신발까지 신은 채로 그러고 있는 걸 보면, 돌아오자마자 모든 힘이 다 빠진 게 틀림없었다. 행진할 때는 그렇게 당당하고 천하를 다 가진 사 람 같더니.
그런 와중에도 손끝과 발끝까지 가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단정 한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 다.
“제가 좀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목소리가 살짝 쉬어 있었다.
곁에 바짝 붙어 앉은 내게까지 열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상 의는 다행히 단추로 잠그는 것이라, 그것을 벗겨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더 엉망진 창이었다. 설마 매번 이 꼴이 된 다
음, 증세가 자연스레 가라앉기를 기 다려 나다녔던 걸까. 어떻게 이렇게 까지……소
팔을 걷어붙이고 그의 등에 양손 을 짚었다.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 다. 아마 지독한 고통일 거다. 마력 을 쓰지 못하는 나는 직접 겪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세렉은 이것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상처 만 생겨도 눈물까지 보이며 나를 찾 아왔었다.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빠 르게 고통을 완화하려고 했다.
대체 어떤 살상 마법을 쓴 건지, 술식이 길기는 또 얼마나 긴지……
거꾸로 계산하는 것도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어려운 마법을 쓰는 걸 보면 이 사람은 세렉과는 달리 마법의 이해도가 너무 높아서 문제 인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 과용량 을 쓰는 거다. 너무 많이 알아서, 그 효율을 포기할 수가 없으니까. 대규모 마법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겠지. 제가 한 몸 힘내 면 백성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으니 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냐고.
나도 남한테 멍청하단 말을 할 자격은 없는 사람이지만, 이 황제 는…… 직책이 황제잖아. 그런데 이
렇게까지 하다니, 말도 안 되게 멍 청하다.
화가 나니까 눈물이 다 났다. 손 과 머리는 바삐 움직이며 그의 상처 들을 만졌지만, 눈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멍청이십니까?”
“내가 너무 아픈지 헛소리가 들리 는군.”
황제는 딱히 화를 내는 것 같지 는 않았지만, 지친 얼굴로 나를 흘 끗 쳐다봤다. 그러곤 미간을 찌푸리 며 나를 노려봤다. 곤란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울지?”
“ 그냥요.”
“나 때문인가?”
“말 시키지 마세요. 안 그래도 어 떤 사람이 이상한 마법을 쓰고 와서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노예가 입을 다물라고 했다고 입 을 다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만, 늘 내 말 따위 잘 안 듣는 이 황제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청개구리, 진짜.
“이름이 뭐지?”
진짜, 빨리도 물어본다. 그걸 지 금 물어본다고?
난 내 이름이 다섯 글자인 게 부 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데, 막상 황제의 입으로 그런 질문 을 들으니 선뜻 말이 튀어나오지 않 는 것도 사실이었다.
“셀레스티아예요.”
“그렇군. 동생은 데려왔나? 시종 장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의사를 붙여 주셨다고……오 그렇 게 안색이 밝아진 건 처음 봤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그래.”
난 그가 갑자기 다정하게 구는 것도 짜증이 났다. 말하는 중에도 눈물이 펑펑 나서, 결국 연산 같은 건 할 수 없게 됐다. 난 자꾸만 차 오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짜증 을 냈다.
“누가 이렇게 멍청하게 마법을 써 요? 부효과가 왜 생기는지 몰라요?”
그는 노예에게 이런 설교를 듣는 게 재밌는지, 아니면 고통이 좀 완 화되어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는 것처럼 입매를 비틀었다.
“마법의 이해도가 낮아서?”
“문제는 마법의 이해도가 낮은 게 아니라 너무 과용량을 쓰는 거예요. 적당히 좀 쓰시라고요.”
패왕의 붉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재밌군. 골디나의 아카데미 제도 는 썩 나쁘지 않은 모양이야. 커리 큘럼이 어떤진 몰라도, 생각 외의 수준으로 이해하는 점에는 조금 놀 랐다. 제국에도 적용할 부분이 있을 지 모르겠군.”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난 기 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다녔는데요. 안 다녔다고 요.”
“ 뭘?”
“아카데 미요.”
황제는 잠깐 대답이 없었다.
“그럼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 지?”
“독학이요.”
“그게 가능한가? 그보다 애초에 왜 안 다닌 거지? 마법은 어차피 익힐 수도 없는 몸이라고 하지 않았 나? 마법을 다루는 아카데미가 아니 라면 그리 비싸지도 않을 텐데. 골 디나는 학구열이 높은 문화라고 들 었다.”
난 하도 펑펑 울어서 좀 제정신 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 따위 절대 꺼내지 않았을 텐 데.
“세렉 때문이에요.”
나도 모르게 아차 했을 땐, 저번 엔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던 그가 내 말을 퍽 귀 기울여 듣고 대꾸까지 해 준 차였다.
“세렉? 사람인가? 골디나인이라면 신분이 다르겠군.”
진짜, 이 황제님의 관심사는 짐작 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대꾸하다니.
“원래 이름은 세렝게반이었어요.”
“흐 허
%그
난 그냥 그렇게 말하면 넘어갈 줄 알았는데, 황제는 굳이 또 그걸 캐물었다. 난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고 생각하며 속으로 후회했지만 이 미 늦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인데, 걔 앞길에 돈을 다 쓰고 나니 제 꿈에 쓸 돈은 없더라고요.”
“어리석었군.”
“그런 식으로 단정 지어서 말하지
마세요.”
“아니, 그 남자 말이다. 이 노예 는 머리가 좋은데, 이 머리에 돈을 쓰는 쪽이 수익률이 더 높을걸. 독 학으로 그 정도라.”
이 노예 운운하는 말이지만, 칭찬 이다. 그는 칭찬이나 감탄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고, 나는 황제의 그런 면모는 좋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아 지 니 까.
“골디나에서 신분 상승을 도모하 기 쉬운 게 마법이라는 수단이라서 그래요. 신분 제도라는 건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요.”
“흐음……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골디나가 우리나라보다 좀 더 심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인재 풀이 한정되어 버리질 않나. 골디나의 여왕은 멍청할 때가 있어. 그 선대 여왕은 그리 현명했다고 들 었는데, 나로서는 잘됐지.”
“언젠가는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요. 아카데미에도 가고, 공부도 해 서, 보란 듯이 잘난 사람이 되고 싶 기도 하고.”
“세렉인지 뭔지한테 잘 보이고 싶 어서인가?”
그 나른한 목소리가 뭐든 다 알
고 있다는 것 같아서 좀 짜증이 났 다.
이 어리석은 폐하님께서는 내 멍 청한 연애를 비난할 수 없는 것 아 닐까.
난 왜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 고 있는지 점점 모르게 됐지만, 어 쩐지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얘기해 놓고 멈춰 봤자 소용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그 녀석, 자기가 좀 잘나 졌다고 절 창피하게 봤다고요. 훨씬 더 잘난 사람이 돼서, 그때 놓친 걸 후회하게 해 주고 싶어요.”
배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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