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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7화 (7/103)

— 7화

황제는 마치 그다음 날부터 매일 같이 나를 만날 것처럼 말했지만, 막상 다음 날부터 열흘 가까이 지나 도록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황성의 일거리들에 적응하기 바빴다. 정말 기초적인 허 드렛일을 하는 하녀의 일을 돕기도 했고, 주방의 일을 돕기도 했다. 그 냥 ‘노예’면 차라리 어딘가에 딱 배 속이 될 텐데, ‘황제가 데려온 노예’ 라는 게 어지간히 이례적이고 어정 쩡한 입장인 것 같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모두 날그리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일단 나부터도 골디나에 있을 때 외국에서 온 사람이 있다 치면 조금 쯤 편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보곤 했으니까, 나에게도 그런 이미지가 덧씌워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는 사이에 나는 꽤 똑똑한 일꾼으로 인정받게 되었 다. 내가 남을 돕고만 살아서 그렇 지, 한다면 또 잘했다.

“셀레스티아.”

“네, 게일 님.”

“내가 저번에 서류철을 어디에 뒀 더라?”

“빨간 거 말씀이세요?”

“그래, 그거.”

“그거 게일 님이 쓰시는 책상 두 번째 서랍에 있어요!”

“허…… 넌 진짜 머리가 비상하다 니까.”

이런 일 같은 건 종종 겪게 되었 다. 최대한 얌전히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칭찬하며 납작 엎드려 지 냈지만, 내가 잘하는 것을 굳이 숨 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열흘째의 일과도 어떻게든 끝이 나서 힘없이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 가는데, 시종장님이 나를 소환했다. 황제와 만난 다음 날, 내가 먼저 시

종장을 찾아가기 전에 시종장이 나 를 찾아왔었다. 그때 본 이후로 두 번째 만남이다.

시종장은 콧수염을 기른 꼬장꼬장 한 중년의 마른 남자로, 날카로운 인상의 사람이었다.

뭔가 다른 일이 바쁜지, 내가 문 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른 일에 집 중한 채로 종이를 휙 내밀다가 고개 를 들었다.

“……아, 글 읽을 줄 모르겠지?”

“공용어 말인가요?”

“그래.”

“물론 압니다, 시종장님.”

시종장은 눈을 크게 떴다. 하녀들 은 모르겠지만, 시녀들은 대체로 글 정돈 읽을 줄 알던데. 사람을 대체 어떻게 봤길래 이런 걸로 놀라나.

“그렇군. 그러면 문제없지. 오늘은 특별히 외출 허가다. 이 주소로 가 봐.”

“ 외출이요?”

생각지도 못한 일에 그가 내민 쪽지를 받아 들었다. 수도 안의 지 리는 당최 알지 못했지만, 시종장이 내미는 쪽지라면…… 혹시라도…… 상징하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가슴 이 뛰었다.

“서, 설마……;

“그래. 네 동생, 무사히 데려왔으 니까 가 봐. 감시가 따라붙겠지만 신경 쓸 건 없다.”

급하게 고개를 세 번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한테 뭘……『

어떻게든 걸어서 문밖으로 빠져나 왔지만, 점점 더 걸음이 빨라져 결 국 뜀박질처럼 변했다.

황실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황급

히 찾아간 곳에는, 생각 밖으로 지 나치게 번듯한 집이 서 있었다. 그 곳의 방 하나를 빌려 쓰고 있는 것 이리라 짐작했지만, 심지어 그것도 아니 었다.

동생은 난롯가에 앉아 불을 쬐다 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꼭 닮은 붉은 머리에 잿빛 눈을 한 동생을 보니 마음이 다 찡했다. 아는 사람 이라곤 없는 외지에 있다가 고향 사 람을 만난 기분이라서 더 뭉클한지 도 모른다.

“사미 디온!”

“누나!”

난 황급히 달려가 동생을 살폈다. 안색이 나쁘지 않았다. 열도 없었고 기침도 안 했다.

“누나가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지? 너무 놀라게 해서 미안해.”

“갑자기 없어진 게 아니라…… 끌 려갔다고 해서 놀랐어. 전당포 누나 가 와서 한동안 돌봐 주고 갔거든. 그 누나는 뭐든 알잖아. 그 누나가, 세렝게반 형이랑 누나한테 어떤 일 이 있었는지 말해 주더라.”

르베르티티가 신경 써 줬구나. 다 행이다. 언젠가 돌아가게 되면 꼭 보답해야지.

그건 그렇고 세렉의 이야기를 들 었다니까 좀 창피하기도 하고, 울적 하기도 했다.

세렝게반과 동생과 나는 한 몸이 나 다름없이 같이 자랐다. 나 스스 로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동생에게도 세렉이 변한 모습을 이 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내내 함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최악 의 모습을 들었다고 하니 굳이 나도 거칠 게 없었다.

“세렉, 그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 라니까. 으휴. 그래도 너랑 다시 만 난 것만 해도 꿈 같아. 어떻게 온 거야? 그 사람들이 잘해 줬어?”

“갑자기 한밤중에 처음 보는 남자 들이 나타나서 같이 가자는 거야. 난 정말 누나가 어떻게 된 줄 알았 어. 그런데 완전 강도처럼 생긴 남 자들이 갑자기 날 막 진찰하더니, 억지로 약을 먹이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고, 보살펴 주는 거야. 무서 워 죽는 줄 알았어.”

“……그게 뭐야, 진짜 웃겨.”

난 험악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심각하게 듣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고작 노예에 불과한 나한테 신발을 가져다주라고 했던 패왕님이다. 타

인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도 다 정한 구석이 있었다.

고작 하루 치료해 주는 사이에 마음속에 측은지심이 좀 생겼는지, 괜히 그를 생각하니 어디서 뭘 하느 라 안 보이는지 걱정이 됐다.

난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이야기 도 들려주었다. 세렉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팔려 왔고, 어쩌다 보니 황제 궁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패왕 을 직접 치료해 준 적도 있다고.

한마디 할 때마다 놀라기를 반복 하던 사미디온은 자신을 데려온 사 람들이 누구고, 이 집이 누구 소유 인지 깨달았는지 턱이 떨어지도록

입을 벌렸다.

“입 다물어. 파리 들어가.”

“와…… 그럼 이제 꼼짝없이 부르 크 제국 사람이 된 거네. 누나, 능 력 있다.”

“부르크 제국이 왜? 뭐, 아쉬운 거라도 있어? 골디나가 그리워?”

“아니. 나야 어차피 골디나에 있 어도 집 밖으로 잘 못 나가잖아. 그 런 거 없어. 그런데 누나는 아는 사 람들 다 거기 있잖아.”

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상관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정말 괜찮아?”

요 0 ”

그리운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 었지만, 언제고 또 보러 갈 기회가 있을 테니까 괜찮다.

“황성 이야기 들려줘.”

“그럴까? 그냥, 다들 잘해 줘.”

“황제는?”

“아직 그렇게 많이 못 봐서 글 쎄……-”

“부르크 제국의 패왕, 하면 이상 한 소문 많잖아. 남자를 좋아한다거 나, 여름에도 긴팔을 입는다거나. 아

무튼 여자한테는 관심 없는 것 같다 는 소문이 골디나까지 났었다고.”

그런 소문이 있었나? 하여튼 얘 도 르베르티티랑 자주 이야기하고 하더니 집에만 누워 있었던 주제에 쓸데없는 잡소문에는 빠삭했다.

그 화상 자국 같은 부반응의 흔 적들을 타인에게 그토록 보여 주기 싫어해서 난 소문이 아닐까? 그 황 제도 삶이 퍽 고단할 법했다. 시중 이야 딱 몇몇을 정해 놓고 시킨다고 해도, 여자를 만나는 건 불가능하겠 지. 그렇게까지 꺼려 한다면.

“황제가 여자를 좋아하든 남자를 좋아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런

게. 난 노예로 팔려 간 건데 그런 걸 신경 써서 뭐 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황제 얼 굴 볼 일 많다며?”

그래야 되는데. 열흘이 되도록 어 디 가서 뭐 하는지 얼굴도 안 보이 더라.

“아냐. 많을 예정이라곤 했는데, 막상 얼굴 볼 일 그렇게 없어.”

“그래? 잘생겼어?”

“잘생겼지, 황제인데. 예쁜 여자만 꼬셔서 혈통을 이었을 거 아냐. 훤 칠하더라,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럼. 사람 말을 좀 무시하는 경 향이 있어서 그렇지, 근본은 착한 것 같아. 아직은 추론 단계지만.”

동생이 웃었다.

“그럼 다행이네.”

“뭐가?”

“누나 취향은 쓰레기잖아.”

와, 반박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세렉과 처음 사귄다 고 했을 때부터 사미디온은 반대했 었지.

칫, 그래. 얘 말을 잘 듣지 않은 내가 잘못했다.

지난 열흘 동안 까맣게 잊고 지 낸 세렉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사람 마음이 또 그렇다.

만약 세렉이 내 얘기를 전해 듣 는다면, 노예로 팔려 나갔다고 들을 것 아닌가. 그러면 또 얼마나 안심 하고 하던 개새끼 짓거리를 계속하 며 살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어떻게 해야 이 분함을 갚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더 출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식보 다 훨씬 더 출세해서 더 잘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권력과 돈이라면 벌 벌 기는 세렉이, 나를 붙잡지 않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 줘 야 속이 개운해질 것 같았다.

동생을 보러 갈 때는 수도의 외 곽을 따라 갔던 것 같은데, 돌아오 는 길은 굉장히 넓은 중앙로 쪽을 통했다. 광장을 지나갈 즈음에는, 인 파가 넘쳐서 마차의 속력이 걷는 것 보다 느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난 마차의 마부석 쪽을 흘끗 보 았다. 거기엔 감시 역으로 붙은 듯 한 과묵한 기사님이 한 분 타고 계

셨다. 내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내 목을 슥, 하는 역할이겠지

“잠깐 내려서 구경하고 가도 돼 요?”

그 기사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 였다.

“좋을 대로.”

의외의 쉬운 허가였다. 노예의 외 출이라는 게 그리 쉽게 막 허가되고 그런 게 아닌 줄 아는데, 제국의 황 제 폐하께서는 역시나 통이 컸다. 나에 대한 제약을 많이 두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길의 중간을 비우고 왁

자지껄하게 모여서, 각자 손에 손수 건이나 작은 깃발 같은 것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난 그들의 틈을 비 집고 들어가 적당히 인상이 좋아 보 이는 아저씨를 골라 다가갔다. 내 감시 역께서 내 뒤에 바짝 붙어 서 계셨지만, 난 최대한 일행이 아닌 척하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 네요!”

“하하, 귀여운 아가씨군.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지.”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무슨 일이 있냐고? 하하, 이 아

가씨가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촌구석에서 살다가 요 근래 올라 왔지 뭐예요.”

“폐하께서 이번에 또 도적단들을 해치웠다는 이야긴 들었지? 오늘 당 당하게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셔서 곧 여길 지나가실 거라고.”

폐하.

그가 말하는 폐하가 내가 아는 그 폐하가 맞는다는 건 알겠다. 하 지만 막상 지나가는 사람의 입에서 존경하는 시선과 함께 그 칭호를 들 으니까, 어쩐지 굉장히 거리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실제로도

굉장한 신분 갭이 있지만……노 거의 하늘과 땅 수준으로……으

그 잘난 패왕께서 직접 도적 소 탕까지 해야 되는 걸까? 제국은 땅 이 넓어도 어지간히 넓으니까 많은 일이 있겠지? 변방의 수호까지 황제 가 직접 담당하는 걸까?

황궁 안에서는 눈치를 보느라 이 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잘 물어 보지도 못한다. 그래서 열흘이나 있 었는데도 제국의 정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주변이 점점 더 왁자지껄하게 시 끄러워져서 난 목청을 조금 돋워 물 었다.

“도적이 자주 나타나요?”

“그럼. 툭하면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라고. 일해서 먹고살 생각은

안 하고, 맨날 약탈이나 일삼는 미

친 것들이지. 세력이 자꾸 불어나서

소탕에 애를 먹는다지만, 폐하께서 직접 가셔서 한 방에 쓸어 버렸다지 뭐야. 이제 그쪽은 한동안 잠잠할 거야. 클클.”

그게 뭐야, ‘한동안’이라니.

이렇게 거대한 제국에서 한 명의 무력에 의존하는 현실, 괜찮은 걸 까?

해왕에게 비서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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